국내 성지 순례기

9.절두산(2)

bonitahuh 2022. 10. 20.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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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꾸어진 정원과 숲에 군데 군데 이런 조각상들이 있어 천천히 생각하며 산책하기가 참 좋다.

팔마(종려나무 가지)를 든 예수상(최봉자 수녀작)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승리를 의미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못자국이 난 손을 들고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 상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Sanctus Ioannes Paulus II,1920.2.18~2005.4.5) 흉상

폴란드 제2공화국 바도비체 출신으로 교황 재위 기간은 197810.16~2005.4 선종때까지이다

한국 방문은 두번인데 첫번째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축하를 위해 1984.5월이고

두번째는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성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상.

.1784년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Pedro 1756~1801.4.8)동상

 

1756년 서울에서 테어났으며 정조때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784년 정조 8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다가 거기서 그라몽 신부에서게 세례를 받아

베드로한 세례명을 받고 한국의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다

정조 8년 이승훈은 묵주와 성서, 성상들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1785년 정조 9년 봄에 봄 명례동(明禮洞 명동)김범우(金範禹)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웠다.

주일 미사와 강론을 행하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천주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신해박해때에 관직은 삭탈되고 사학의 원흉이라는 죄목으로 결국 1801년 서소문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손자 증손까지 순교하여 4 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허지만 이승훈은  순교에 대한  사실여부에 대한 이론이 있으며,.

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가 끝나지 않아 현재 시복 대상에 빠져 있단다.

.남종삼 요한 (南鍾三 John 1817~1866.3.7)

성 요한은 1817년 충주에서 태어나서 22세에 문과에 급제해여 승지 벼슬자리까지 올랐다.

대원군의 박해 때에 외국인 선교사들을 숨겨준 일이 발각되어.

많은 고문과 고초를 겪은후  1866.3.7일에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그가 죽을때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며 그의 나이 50세였다.

 

1968년10월 6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때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에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십자자의 길 조각상 건너편에 서 있는 성모상.

.성지 정원  멀리 요한 바오로 이세 조각상이 보인다.

은언군(恩彦君 1754.5.19~1801.6.30) 묘비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의 서장자이며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 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송 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십자가의 길 초입 조각상들 건너편에 세워진 돌비

서울대 미대 이순석 교수의 작품으로 강화도 바닷속에서 수집한 검은 자연석에 직접 글을 새겼다.

높이 2,25m. 돌둘레 1.8m  검은 돌 기둥 앞면에는 "영광"이란 글짜를.

뒷면에는 세로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글짜를 십자 모양으로 새겨 넣었다.

돌비 상단에는 가시관과 왕관을 그려 새겨서 순교자들의 고난과 영광을 상징하였다.

십지가의 길 14처 순서대로 조각사이 줄지어 서 있다

조각에 새겨진 말씀을 읽으면서 천천히 묵상하며 걷기에 아주 좋다.

신자들이 삼삼 오오 모여 기도문을 함께 읽는 모습과 혹은 혼자 십자가 길 조각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십자가의 길 안내문

돌에 새겨 글씨를 썼는데 잘 안보이니 그대로 옮겨 본다

"우리 주님 예수게서는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갈마리아 산에 오르셨다

십자가의 길을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부활에 이르는 15장면을 묵상하는 기도의 여정이다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리스도께서 밟으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 부활의 기쁨에 참여했다

절두산 성지를 찾은 오늘의 우리도 이 곳에서 순교했던 신앙의 선조처럼 다른 그리스도이며 작은 예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 사람의 참다운 길이 무엇인지를 외치고자 한다

이 곳 십자가의 길에는 오늘의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 부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순교했던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선공의 머리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이부분은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던 '텬쥬셩교 공과'에서 따왔다

이곳에서 순교했던 분들도 틀림없이 이 목판본 '텬쥬성교 공과'에 실려있던 '성로선공' 을

십자가의 길을 바쳤으리라

지금 우리는 이 곳의 순교자들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가르침을 증언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중인이 되기를 그들과 함께 다시 다짐하련다"

신유박해 선교200주년 2001.11.1

.십자가의 길 조각은 이춘만(크리스티나) 조각가의 작품들이다.

신유 박해 20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하여 2011년 설치되었다.

언듯 이름이 남자인줄 알았는데 1941년생의 여자 조각가이다 .

이름도 남자 같고 조각작품도 선이 굵고 터프해서 남자인줄 알았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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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15 처에서 예수님 못자국 선명한 손바닥에 손을 마주대고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우리도 2년전에 갔던 이스라엘의 비아돌로로사를 떠올리면서 조각에 새겨진 글씨 하나 하나를 읽어본다.

이스라엘의 비아돌로로사는 너무 비좁고 소란스런 시장안 골목이었지만.

그래도 2000여년 전 우리 주님이 직접 걸어가신 길 이기에 참으로 많은 은혜가 되었다.

절두산 성지의 십자가 길은 그와 반대로 너무 조용하고 정결하여 비록 우리 주님이

직접 걸어가신 길은 아니지만 조각상 아래 말씀을 찬찬히 묵상하며 걸어보니 이 또한 너무 은혜 스럽다.

우리 사부인은 카톨릭 신자인데 내가 절두산 갔다 왔다하니.

사부인도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울때 혼자 여기를 오면 많은 위로가 된다하여 공감 백배!!!.

.절두산 순교기념비 (이춘만,크리스티나 작.2001).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가운데 자리잡은 '큰칼' 모양의 작품은 주탑(主塔)이다.

주탑의 정면에서 오른쪽에 있는 우측탑(右側塔)에는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있다.

이는 이곳에서 순교가 있었음을 말함과 동시에 이곳의 지명이 절두산임을 암시해준다.

주탑의 왼쪽에 있는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이곳에서 순교했을 또 다른 무명 순교자들을 조각해 넣었다.

주탑과 우측탑에는 모두 33명의 순교자들이 늙지도 변하지도 않을 화강석 육체를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주탑.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의 주탑(主塔)은 높이 8m, 가로 5m, 세로 4m 중량 150톤이다.

기념탑의 상부에는 조선시대 죄수들이 목에 썼던 형틀인 '칼'을 상징하는 조각을 했다.

주탑의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그 순교자들의 머리 위에는 아치(arch)형으로 이름을 새겼다.

주탑의 오른쪽 옆면에는 '전구(轉求)하는 성모'를 선으로 처리하여 새겨 넣었다.

주탑의 왼쪽 옆면은 '부활한 예수'를 각인했다. 이는 가로 1m 40cm, 세로 2m 40cm 크기로 되어 있다.

형틀을 받치고 있는 주탑의 뒷 기둥의 옆쪽에는 높이 8m에 폭 3m 60cm 두께 1m가 넘는.

'전구하는 성모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새겨 넣었다.

주탑의 전체는 모래 위에 파도가 만든 모래톱 자욱처럼 처리했다.

주탑의 뒷면에는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밝혀진 33명의 명단을 도표로 만든 '절두산 성지 순교자 명단'을 새겼다.

이 명단은 전문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서 각종 교회기록을 참고하여 작성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더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이들의 명단만을 제시했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좌측탑

좌측탑은 길이가 5m, 가로가 2m 30cm, 세로가 1m 60cm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관찬 기록에 등장하는 무명인 4명을 비롯하여, 힘없는 농부, 상인, 노비들의 신앙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 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순교탑'이다.

절두산 순교기념비.

우측탑은 절두탑이다. 이 탑의 상부에 있는 절두상(切頭像)은 사실 이 순교 현양 기념비의 중심 테마다.

순교자의 잘린 머리는 탑 위에서 오늘의 우리를 경계하고 있다. 이 절두상의 부릅뜬 한 눈은 탑의 중심이다.

이 부릅뜬 눈으로 무거운 화강석 기념탑은 지탱되고 있다.

그리고 그 눈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있기를 경계한다.;

또 다른 한 눈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눈물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참 믿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겨레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정에서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치명자인 남편 김진(베드로)를 따라 닷새 후에 순교한 김큰아기 순교자의 상을 비롯하여.

열세 분의 상이 새겨져 있다. 우측탑의 윗면에는 조광 교수가 짓고 김단희 선생이 쓴 '절두산 순교 기념 비문'이 있다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절두산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우리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먼저 간지라

양화진 공원을 지나 절두산 성지를 돌아보고 거꾸로 내려 올때 이 계단을 내려서니 바로 길이었다

어떻게 가던지 공원을 거쳐 지나가니 마찬가지이다

절두산 성지도 외국인 선교사 묘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경건한 성지이다

천주교인이던 기독교인이던  간에  상관없이 두 곳 다 가 보기를 적극 권면하고 싶다

절두산이 자연적인 경관과 웅장한 건축물과 조형물들로 볼거리가 많다면

선교사 묘원은 가슴에 찡 하도록 와닿는 강렬한 느낌이 있었다아무튼 오늘로 양화진 순례 일정은 마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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