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6.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6)

bonitahuh 2022. 10. 20. 04:41

윌리엄 리처드(Brigadier Williams. Richards, 이도식1878~1920.2.5)

묘비에는 "Duty done Victory Won"

의무를 다하고 승리했다

 

1878년 영국 런던에서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열두 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의 묘 앞에서 헌신을 다짐했다

런던 만국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7년간 선교 사관으로 봉직하였으며

1909년 2월 8일 메리 킬로(Richards, Mary K.) 부관과 결혼하고 만국 본영의 문학부에서 봉직했다.

1913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선교 사관으로 파송되어 지방 장관과 청년부 서기관으로 봉직하였다.

1918년 6월 2일 한국 구세군 서기장관으로 명령을 받아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내한하였다.

한국에 부임한 리처드 서기장관은 구세군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

선교자금을 조달하고 한국 여성사관을 양성하였으며 고아원을 개원하여 구제사업에도 공헌했다.

구세군 고아원 운영 과정에 대하여 그의 딸의 기록에는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구세군 사관 학교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아이가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 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이 무렵 구세 공보와 관련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구세군 선교사 가족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여러 명이 희생 되었다.

실베스터 선교사의 집에도 천연두가 전염되어 실베스터 선교사의 두 아들이 앓아눕게 되었는데,

셋째 아들 더글러스가 두 살의 어린나이로 천연두에 의하여 사망하였고, 곧바로 큰 아들 고던도 사망하였다.

리처드도 이로 인하여 다음 주간에 병에 걸렸으며, 얼마간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결국

그도 천연두로 인하여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히고 말았다.

한국 땅을 밟은 지 2년만이었다. 그 후 그의 부인과 3자녀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돌아갔다

 

리처드는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의 아버지(캐나다 사령관)와 캐나다 구세군의 헌금으로 아영 영문에 1922년 12월 8일

리처드기념관’ 이 건립되었다.

마그다 코흘러( Magda Kohler,高月羅, 1886.6.10-1913.5.23)

 

마그다 코흘러(Kohler, Magda)는 1887년 6월 10일 스웨덴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스웨덴 구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제1진의 구세군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독신으로 내한하여 제1대 사령관 호가드의 비서로 일했다.

선교에 열성이 대단하여 한국말을 배운 뒤, 시골로 다니면서 많은 한국인과 가까이 하려 노력했다.

순회 전도를 마치고 경북 의성(원당) 지방에서 자원하여 담임사관으로 헌신했다.

호가드(Hoggard)사령관 부인과 함께 경북지방(노매실, 원당, 소일)을 순회하면서

5-6백리의 멀고 험한 길을 마다 않고 걸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장티프스 때문에 숨진 사람들을 수습해 주는 등 원당지역에서 주민들에게 많은 감화를 끼쳐

그를 아는 한국인들은 ‘고월라(高月羅)’라는 한국 이름을 모방하여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정도로 본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열정적인 봉사와 사랑으로 감화를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

1913년 그는 의성에서 장티푸스 환자를 돕다가 자신도 감염되어 의성(원당)에서 대구에 이르는

 150여리를 들것에 실려 대구 동산 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하였지만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913년 5월에 소천하였다.

호가드 사령관은 그의 시신이라도 서울(양화진)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그 후 그의 유해가 대구 동산병원 구내에 묻혀있는 것을 확인하고 2000년 9월 27일

구세군 선교사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양화진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별세 한 뒤 그를 추모하여 플로렌스(Florence Riley)는 1913년 7월 코리아 미션 필드에

“Memorial Tribute to Captain Magda Kohler”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전도 행적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가 남긴 어록으로는

"예수를 위한 고난을 감수할 것과 예수의 십자가를 나누기를 원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기 원한다"이다

그는 순직 후 일 계급이 특진되어 정위가 되었다.

에이커홈(Earland Akerholm, 玉居欽 1888.3,13~1920)

구세군 선교사로 헌신한 영동병원 설립자

1888년 3월 13일 스웨덴(Barkeryd)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4년 3월 9일 구세군 사관(正尉)으로 내한하여 처음에는 개성 지방관으로 봉직하였다.

1916년 6월 스웨덴에서 함께 내한한 구세군 선교사 나탈다(Natalta)와 ‘경성 제일 영내’에서 결혼하였다.

부흥회의 배경과 성과에 대하여 1918년 7월 1일자 구세신문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보도하였다

개성지방관 에이커홈(Akerholm)과 그 부인, 경성 본영의 어륵손(Ericsson) 선교사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합심 협력하여 가두 전도와  영내 예배를 통하여 1,430명이 복음을 접하고, 31명이 회개하였으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토요일(18일)과 주일에도 여전히 계속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에이커홈 선교사는 1920년 충청북도 지방관으로 전임 되어 선교 사업을 계속하였다

.

이때 그는 사재를 출연하여 조성한 기금으로 영동 병원을 설립하여 농촌 지역에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충청북도 지방 활동 중 1920년 3월 15일 장티푸스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영동 계산리(향교 건너편) 뒷산에 안장되었다

2000년 구세군 대한 본영은 이들 선교사의 숭고한 신앙과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는 취지에서

구세군 순교 성지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여 2000년 9월 27일 에이커홈의 유해를 충북 영동에서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朝鮮忠淸北道 救世軍地方營 族官 玉居欽 主降生 一八八八年 三月 十三日生 一九二十年 三月 十五日 別世"

그리고 ”復生者 我生命者 亦我信者 雖死必生而 信我者 永不死爾信否" 

"조선 충청북도 구세군 지방영 옥거흠 주강생 1888년 3월 13일생 1920년 3월 15일 별세"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을 입게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하셨으니 우리 대신 죽으시어 저와 함께 살게 하시니라”라 기록되었다.

 

부인: 서울 여자 관장 나탈타 에이커 홈(Natalta Akerholm 1965.1.10) 

 

스웨덴 출신의 여성 사관으로 1914년 3월 9일 내한하였다.

에이커홈과 서울에서 1916년 6월 결혼하고. 1920년 남편이 소천한 후에도 한국에서 구세군 선교사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1922년에는 전도를 위하여 성경과 찬송가를 자비로 사서 나누어 주었으며

1925년 7월 경성 제2영 담임사관으로 봉직하였다.

1925년 9월 19일 정위에서 부관(副官)으로 승진하여 함경도 고산 구역관(區域官)으로 임명되었다.

구역관 취임식에는 서기장관 등 많은 구세군 사관과 병사들이 참석하였다.

 

1928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구세군 사관학교가 개관될 때는 여성 사관의 교관이었다.

1930년 영국 만국 사관 대학 연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여자 관장(1933), 서울혜천원(1938)에서
폭넓게 활동하면서 1934년 4월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이밖에 그는 구세군 본영 사관 부인들로 조직된 자선위문단 책임관,

원산 선교사 휴양 관장, 여성 사업부, 사회사업부에서 봉직하였다.

1940년 12월 2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출국되었다가. 그 후 스웨덴에서 80세 고령으로 1965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양화진에 잠든 구세군 선교사는 6명으로 가족까지 하면 12명이 잠들어 있다

마벨 영 (Mabel B .Young1883.9.4~1935.11.7)C13

 

마벨 영 선교사는 1883년 9월 미국 펜실베니아 스프링필드에서 출생하여

펜실베니아 베들레헴 소재 세인트 루크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이후 수년 간 고향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1919년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언니를 만나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 간호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해 11월, 선교사를 자원하여 캐나다 연합 장로 교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이로써 마벨 영 선교사 가족 중 언니 플로렌스는 인디아, 헬렌은 일본등 세 자매가 모두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원산 구세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1922년부터 1935년까지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장으로 헌신하였다.

그녀는 여러 가지 재능을 지녀 남대문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또 마벨 영 선교사의 꿈은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은 이 소망을 들어주셨다.

그녀는 독감으로 단 5일 동안 앓은 후 1935년 11월 7일 아침에 조용히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안나 P.야곱 센 (Anna P.Jacobsen 한국명: 雅各善1868~1897.1.20)C1

 

제이콥슨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견한 첫 서양의료 간호선교사로

제이콥슨은 1868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간호교육을 받았다.

간호학을 공부한 뒤  “외국에 나가 병원도 없고 병자의 간호도 할 줄 모르는 불쌍한 백성들에게.

평생을 몸과 배운 학문으로 헌신하겠다”고 다짐할 때 한국에서는 1894년 9월 말 에비슨이 미국 선교 본부에

한국인 간호사를 훈련시킬 수 있는 전문가 2명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북장로회에서 1895년 4월 6일 한국에 최초로 훈련된 간호사(first trained nurse)

야곱센과 여의사 파이팅(Whiting)이 내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한국인 간호사를 훈련시키는 임무가 있었다.

 

이 무렵 제중원은 국립병원 체제에서 선교기관 운영 체제로 근본적으로 개편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병원운영의 재정적 책임을 인수하여 병원 근대화에 힘쓰고 있을 때였다

한국에 도착한 야곱센은 구리개(銅峴)에 있던 제중병원에서 에비슨 병원장을 도와가며

강인한 의지와 헌신적인 봉사로써 한국인을 위하여 밤낮으로 고생하며 환자들에게 따뜻한 간호의 손길을 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올바른 행실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를 품어 냈다.

그는 간호사역에 충실하면서 한국의 간호교육 기틀을 다지는데 힘썼다.

이후에는 ‘세브란스병원 의학당’에서 간호학 교수로서 ‘붕대법 및 마시지’를 가르쳤다.

 

 

내한한 지 얼마 안 있어 청·일 전쟁으로 인한 환자를 돌보고, 1895년 여름 서울에 만연된 콜레라 방역사업에

에비슨과 진력하여 일찍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제이콥슨 선교사는 한국인,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했는데, 한 보고서에는 그녀가

 

“나는 이제 조선의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고

친근하게만 생각해 준다면, 만족하리라.”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과로와 열악한 생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이질에 걸렸다.

뒤따라 간농양(肝膿瘍)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1897년 1월 20일 서울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했다

 

H. G.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장례식이 집례 된 후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0월 말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고, 이듬해 1월 20일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됐다.

1897년 1월 21일자 <독립신문>은 제이콥슨 선교사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이 여인의 죽음은

조선에 있는 것에 비하면 낙원에 있는 것이지만 조선 인민에게는 크게 손해”라고 보도했다.

플로렌스 힐(Riley Florence, Hill,許日夫人, 1891-1922.1.5)

오벨리스크 형식의 묘비에는 "東出十三年餘之生命 爲朝鮮民族獻身日日歡迎",

(한국에서 13년 동안 자신의 생명을 조선 민족을 위해 날마다 헌신했다)

하단에는 “Jesus, Jesus, Precious Jesus(예수, 예수,존귀한 예수)”라 쓰여 있다

옆 자리에는 아들(윌프레드 힐,남편이 재혼하여 낳은 아들)도 묻혀있다

1891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만국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1909년독신으로 한국에 왔다

호가드 사령관의 비서로 일하면서 호가드 사령관의 부인과 충정지방 전북 지방.경북지방들을 말을 타고

때로는 걸어다니며 전도와 집회를 인도하고 부인 사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1910년에 구세군 선교사로 입국한 윌리엄 알프레드 힐(허일)과 동역하다가 1913년 결혼했다.

남편 윌리암이 충정 지방관에서 한국의 구세군 사관학교 3대 교장에 임명되어 부부가 함께 남녀 사관 양성에 동역하였다

서울로 옮겨 부인회 집회 인도와 여자 사관학생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순직 선교사에 관한 글도 썼다.

1922. 1. 5 사관학교 사택에서 빈혈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디었다

라일리 사후, 남편 선교사는 재혼하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세 살 되던 해에 사망하여

첫 부인  라일리 사관 옆에 안장되었다.

 터너( Arthur Beresford,Tuner 端雅德, 1862.8.29-1910.10.28)

 

터너 주교는 1862년 8월 영국 솔즈베리에서 출생하여 1885년 옥스퍼드(Oxford). 키블(Keble)대학을 졸업했다.

터너는 1887년 옥스퍼드 교구에서 성공회 부제로 서품되었고, 1888년에 사제로 서품받은지 8년만인

1896년 12월 2일에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했다

한국 성공회는 코르프Charles John Corfe, 고요한)에 의해 1890년에 시작되었는데

1905년 1월 25일 초대 코르프를 이어 제 2대 주교가 된 후

주로 인천과 강화도에 집중되어 있던 성공회의 선교 영역을 수원과 충북 진천까지 확대하였다

그는 또 여성 교육에도 힘썼는데 1908년 5월 25일 강화 온수리에 성모 마리아 여학교가 그 효시이다.

 

터너 주교의 한국 선교 활동 시기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였다.

1904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은 실제적으로 한국을 점령하였다.

 1907년에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위하여 경비 절감이라는 명목으로 한국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한국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서울을 비롯한 각처에서 항쟁이 계속되었다

1906년에는 게일의 후임으로 황성 기독 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터너는 1907년에서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어려운 시기에 YMCA 회장을 맡으면서

이상재, 윤치호 등의 항일 운동을 뒷받침하였고.YMCA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는데

터너는 미국 백화점왕 워너메이커의 후원으로 YMCA의 새 건물을 신축하는 일도 추진하였으며,

상동교회 출신의 전덕기와 YMCA의 이상재, 이승만, 김규식 등을 규합하여서 기독교 연합 세력을 만드는 일에도 힘썼다.

 

터너는 신자들에게 다음의 신앙 원리를 가르치고 직접 실천하였다.

첫째,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둘째, 성공회 신자들은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절대로 동참해서는 안 되고 불의와 싸우는 항일 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기복적인 신앙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순수한 동기로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가 교회를 직접 경영하면서 모든 경비를 전담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므로

한국교인들에 의한 자치와 자립을 추구하였는데.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로는 강화 온수리교회와 진천교회 등이 있다.

강화 온수리 교회 뜰 안에는 그의 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비롯하여 고아원과 학교 기관도 자립시켰다.

교회마다 부설 학교를 설립하여 실업(實業)교육을 실시하고

교회 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한국에 축구를 도입 발전시킨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이며 공로자이기도 하다. 

1908년부터 “宗古聖敎會月報”라는 월간지를 발행 보급하며 투철한 신앙을 키워 나갔다.

그는 1896년 내한하여 가장 활발했던 교회 발전과 교회의 체제를 정비하고

1910년 10월 28일 오후 4시 인천 성 누가병원에서 신병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게일(Gale, J. S.) 선교사는 추도사를 통해

“터너 주교의 죽음으로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14년간 그는 우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똑같은 아주 친절한 주인이며,

기쁨을 주는 손님이었고, 확고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모든 친구들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찰스 구드윈 (具斗仁 Charles Goodwin具斗仁 1913.5.5~1997.6.28)

 묘비에는 “The faithful missionary of Anglican Church. Dedicated professor of Yonsei Uni.

and Sungkonghoe university. Devoted father of homeless children"

(성공회 선교사로 충성하며, 성공회 대학과 연세 대학에서 헌신하였으며, 고아들에게 헌신 봉사했다.)

 

찰스 구드윈은 1913년 5월 5일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의 법률가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931년 콩코드 성 바올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학자의 성품을 지니고 자랐던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36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밸리올 대학에 2년간 유학하였다.

성공회 성직자가 될 꿈을 안고 1939년 미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공회 신학원에 입학하여

3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성공회의 성직자(사제)가되었다

그가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는 집안의 권유도 있었지만 세계 2차대전 말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그의 결단의 결과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1939년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성서 원전과 신약을 전공하여 1960년 6월 철학(신학전공)박사 학위를 받고

고전어의 대가가 되었다. 그의 학위 논문은 “The Mind of the Fourth Evangelist"이고

당시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한다.

평화를 사랑하던 그는 1960년 9월 전쟁의 상처를 입고 아직도 분단의 고통 중에 있던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그의 주된 선교사 활동은 대한 성공회 서울관구 소속으로 봉직하면서

성공회 ‘성 미가엘 신학원’에서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과 특히 고전학의 권위자로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한편 연세대 신과 대학에서 1961년부터 1978년까지 신약성서 전공 교수로 성경 원전과 고전어를 강의했다.

그의 논문에는 "희랍어와 한국어의 발음 비교" "살아계신 예수님의 숨어있는 말씀"등이 있다.

1974년 연세대 신학과에서는 구드윈 박사 회갑 기념 논문집(신학논단 12집)을 출판하였다.

 

그는 특히 성경 원어와 한국어의 비교 연구와 한국어의 우수성을 입증하고자 문법적인 구사에도 노력하였다. .

1978년 정년으로 은퇴한 뒤 부산으로 내려가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부산대학교에서 고전어를 강의하기도 했다.

1994년 5월 성공회 대학교 명예교수로 위촉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와 라틴어 희랍어 고전어와 신학 강의를 계속했다.

서울 외국인교회 객원 설교자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38년간의 생활은 끊임없는 학문의 연구 결과로 한국인에게 도움을 준 선교사였다.

 

그는 교회 음악 분야에도 관심이 있어1991년 ‘성공회 성가’ 발간에 기여 하였다.

 그의 위트와 유머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는 신학자로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데도 큰 힘을 쏟았다

구두인 신부가 한국 교육발전과 사회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하여 1997년 6월에 국민 훈장 동백장에 추서되었다

.아더 E. 차드웰(Arthur Earnest Chadwell 차애덕1892.8.1~1967.11.21 ) 주교 

묘비에는“May His Wounds both wound and heal me, He enkindle, cleanse, anneal me.
Be his Cross my strength and stay"
'(주님의 상처는 나를 상하게 하여 고치며, 불 붙여 깨끗이 하여 단련하고.
주님의 십자가는 내 힘과 의지가 되어지이다.”)

 

아더 E. 차드웰은 1892년 8월 1일 영국 햄스테드(Hampstead)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런던대학과 처선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에 부제, 1923년 사제로 서품 되었다.

1926년 내한하여 1928년까지 충북 진천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까지는 북한의 배천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부터 1941년까지는 평양에서 성공회 사제로 봉직하였다

 

그가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영국 선교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일본이 일으킨 중국 침략 전쟁을 강력한 항의 성명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 첫 번째 피해자인 차드웰은 1940년 7월 24일 외환 관리법 위반과 단파 라디오를
소지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

 차드웰은 1941년에야 석방되어 강제 추방되었고 그 후 스리랑카와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8·15 광복이 되어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청주에서 선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0년 6·25 전쟁 기간에 간첩 혐의로 쿠퍼(Alfred Cecil Cooper, 具世實) 주교가 납북(拉北)되자 그를 대신하여 

성공회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 1951년 11월 30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주교 승품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성직자의 확보가 1차적 과제라고 생각하고
긴급히 독신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선교비 절감을 위하여 독신 선교사와 적어도 10년간 봉사할 수 있는 젊은 사제를 파송해 주기를 바랬다. 

그 후 교회(성공회)들은 차드웰의 목회 지도아래 전쟁의 상처를 씻으며 건실하게 성장해 갔다.

 

1955년 차드웬은 주일복음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선교 활동에서 출판물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은퇴 후에도 인천 성당에서 1년간 봉직하였다

차드웰 선교사는 1967년 11월 21일 부산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성공회 구역에 안장되었다.

웹스터(Elizabeth Webster1856-1898) 간호수녀

노라 (Sister Nora1849~1919) 간호수녀

로이스 Lois   Lay(1854~1899)간호 수녀

 

양화진의 성공회 묘역에는 세 명의 간호선교사, 웹스터, 로이스, 노라 선교사가 묻혀 있다.

이들은 모두 1892년 11월 영국 성 베드로수녀회가 조선으로 파송한 6인 선교단의 일원으로 내한했다.

서양 의료 공식 간호사로는 첫번째로 영국 성공회가  파송한 히스코트(Gertrude Heathcote)에 이어

두 번째로 공식 간호사로 한국에 온 이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의료를 통한 복음 전도에 헌신하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과로와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웹스터 선교사는 협동 수녀로서 우리나라 간호 교육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웹스터 선교사는 성공회가 서울 낙동에 세운 마태병원의 수술실과 입원실에서 헌신하다

1898년 42세의 나이로 함께 온 6인의 동료 중 처음으로 사망했다.

 

로이스 선교사는 봉사 수녀로서 영국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고 내한했다.

서울 낙동에 있던 성 마테병원에서 간호사 및 보육 선교사로 헌신하다가

1899년 45세로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함께 온 간호선교사 6명중 웹스터에 이어 두번째 순직이다

 

노라 선교사는 영국에서 태어나 조선에 오기 전 1866년 종신서약을 마친 수녀 선교사다

함께 온 6명의 수년 중 가장 연장자였으며  성 베드로 병원의 진료실과 입원실에서 헌신하면서

소녀들을 위한 기숙사와 고아원을 돌보았으며, 미혼 여성을 위한 재봉학교도 운영했다.

그녀는 1919년 70세로  암으로 사망했다.

 

묘비명은 "주님의 긍휼을 원하나이다"

 

세 선교사와 함께 내한한 일행 중 알마(Alma) 선교사는 강화도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안장되어

함께 온 6명의 선교사 중 고향으로 돌아간 이는 단 두 명뿐이다.

묘지에 관한 글은 6회로 끝내려 한다

많은 부분 미흡하고 또한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 중에 빠진 분들도 많이 있으나 제가 잘 알지 못하고

또한 일일히 자료를 구하기도 어럽고 하여 이것으로 묘원 소개는 마감을 하려한다

글을 쓰는 저도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읽눈 분들은 더울 힘들고 지루했으리라 생각하며

양화진 홍보관 양화진 홀을 소개하고 절두산을 소개하고 양화진에 대한 순례는 마감하려 한다"

'국내 성지 순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절두산 성지(1)  (0) 2022.10.20
7.양화진 홀  (0) 2022.10.20
5.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5)  (0) 2022.10.19
4.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4)  (0) 2022.10.19
3.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3)  (0) 2022.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