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8.절두산 성지(1)

bonitahuh 2022. 10. 20. 04:56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양화진 홀을 둘러보고 곧바로 절두산 성지로 향했다

절두산과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양화진 공원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절두산은 천주교의 성지이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기독교의 성지인것으로만 알지만

둘다 복음으로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선조들과 외국인들이기에 우린 똑 같은 성지로

소중히 가꾸고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점심때가 지나 배가 조금 고팠지만 나갔다가 또 들어오기도 시간이 너무 걸릴 듯 하고 하여

조금 무리하여  양화진 공원을 천천히 걸어 가며 절두산으로 향했다

공원안에 양화진의 옛 터의 일부를 장대석으로 구획해 놓았다

멀리 한강이 보이는 절경에다 잘 가꾸어진 숲길은 충분한 휴식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묵상하기 좋은 길이다

가는 길마다 조각상이 서 있어 더욱 그 의미를 새기면서 걸어가기 좋은 길이다

날이 너무 덥고 시간이 바쁜지라 묵상은 커녕 허덕거리며 바쁘게 걸어가느라 너무 아쉽고도

이렇게 경건한 성지들을 찬찬히 음미하지 못하고 성의없이 가는거 같아 준비없이 나선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ㅠㅠㅠ

절두산 순교 성지는 생명을 바쳐 믿음을 증거한 한국 천주교회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이 살아 숨쉬는

뜻 깊은 곳으로 사적 39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붙여진 잠두봉 또는 용두봉이라 불리워지던 곳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곳이 언제부터인가 머리를 자른다는 절두산이란 험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병인 박해로 이어지고 이로인해 무수한 천주교도들의 목이 잘리는 참사로 이어졌다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나루터로 정하고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무자비한 칼부림에 먼저 목 부터  잘려 양화진 강물에 던져졌다

절두산 절벽위에 세워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 박물관과 성당

순교자들의 절절한 숨결이 밴 절두산에 지금의 순교 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1967년의 일이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절두산 치명터를 확보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하며 

각계 각층의 협조와 관심으로 1956년 마침내 절두산 순교터를 매입하고 62년 순교 기념탑을 세운 데 이어

1966년 순교 박물관과 성당을 착공, 1967년에 축복식을 가졌다

순교관에 걸려 있는 "절두산의 대학살" 작품(조창원 작, 73 x 60.5cm, 2008년)

목을 치던 칼 모양의 조형물. 섬찟하다.

.신원이 확인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순교자의 정확한 수는 알수 없으나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 따르면 병인 박해 때 천주교 신자 8000명 이상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래서 이 아름다웠던 잠두봉은 머리를 자른 봉우리란 뜻으로 절두산이란 험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로 부터 시작된 병인 박해는 1866년 초부터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으며,

한국 천주교가 겪은 최대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과 한강변이라는 자연적 배경과 조화를 이뤄 건립된 순교 박물관은

본관(3층, 325평)과 성당(99평) 그리고 종탑(25평)으로 이뤄졌다.

 

옛 초가집 지붕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미끄러져 내린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의 성당,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상징하는 구멍뚫린 수직 벽 등 건물을 구성하는 하나하나가

순례객들에게 옛 정취와 의미를  불러일으키면서 포근한 정감에 젖어들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특히 성당은 제단에서 성찬과 말씀이 반사되어 바깥 세계로 퍼져나가는 부챗살 형태로,

다른 성당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순교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이 자리에 지울 순교 기념관과 성당을 공모했으며,

그 결과 국립 극장과 혜화동 성당을 설계한 이희태 (1925~1981) 건축가의 설계로 지어졌다

세계 건축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기도 한 순교 박물관은 순교 정신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 고유의 전통미를 한껏 살렸다는 극찬을 받으면서

현대 교회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걸작이라는게 관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또한 순교 박물관은  당대 성 미술 거장들의 역량이 총 결집된 교회 미술의 보고(寶庫)나 마찬가지다.

교회 미술에 관한 한 절두산 순교 박물관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들어가보지 못하였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인터넷으로 대충 훑어보았다

.성당과 순교기념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순교자상 오른쪽에 자바라식 문이 보인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마당

왼쪽 켠에 철망으로 조형된 투명 예수님 상이 보인다

안에는 시간 상 못 들어갔지만 별로 궁굼하지는 않다 ?

.순교자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계단 아래 왼쪽에 있는 순교자의 조각상

(1972년 작. 최종태 교수 작품. 좌대 1.7m, 본상 2.2m)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 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 놓은 모습으로

참혹한 순교자의 모습을 떠올리니 처연한 숙연함으로 마음이 아파온다

성당 입구에 있는 이 자바라식 대문의 조각은 순교자 28명을 상징한단다.

이들은 신장 크기와 모양새가 각기 다름을 나타내며 형틀에 묶여 있는 모습을 상징.

성당 마당에 설치된 순교자 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순교 박물 기념관 정문에서 바라다 본 잘 가꾸어진 김대건 신부 정원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 선열 조상 건립 위원회‘ 가  홍익대 전뢰진 명예 교수에 의뢰하여 제작되었다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김대건(본명:Andreas,1821.8.21~1846 9.16)신부의 조각상

김대건 신부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때부터 이어져 온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아버지는 순교한 순교자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16세때 마카오로 유학가서 신학 공부를 하고 그 후로도 게속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1845년 싱해에서 페리올 주교로 부터 사제품을 받아 조선 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하던지 조선에 전교하려 애썼는데 조선은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쨋던 한국 에서 성인 시성을 받은 분들이 무려 103위나 된다니 놀랍다,

가톨릭교회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뛰어난 덕행으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 된 이들을 ‘복자’라 칭하고 ,

또 이미 시복된 ‘복자’에 대해 그 이상의 기적이 확인되면, 시성 절차를 거쳐 ‘성인’으로 추대한다,

복자와 성인의 차이점은 성인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적으로 공경을 드릴 수 있는 데 반해,

복자는 그 공경의 범위가 어떤 지역교회나 단체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헌데 우리의 수호자도. 공경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지 않나?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나를 지켜 주시며 인도하시며 공경과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다!!!

공경이 아니라 존경이라는 단어를 쓰면 좋으련만.....,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 (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오성(五聖)바위’는 병인박해(1866) 때의 다섯 성인

(다블뤼 주교님, 오메트르 신부님, 위앵 신부님,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함께 묶여 온양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던 길에 한 번, 그리고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보령의 처형장(지금의 갈매못성지)으로 끌려가던 중에 또 한 번 앉아 쉬어갔다고 전해지는 바위다,

이 다섯 분은 함께 묶여 온양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던 중 둔포길로 4km쯤의 거리에 있는,

동천리 느티나무 밑 큰 바위에서 쉬어갔는데, 서울 의금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다시 보령의 처형장으로 되돌아오던 중,,

공교롭게도 상경길에 들른 느티나무 밑 큰 바위에서 다시 쉬었다 가게 된다.,

결국 다섯 순교자들은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었다,

.

시성 전에는 ‘복자福者바위’라고 불리었으나 성인으로 추대되신 분들과 관련된 바위이니,

당시 절두산 순교성지 주임이던 박희봉 신부님이 ‘오성(五聖)바위’라고 고쳐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오성바위’는 충청남도 아산군 동천리에서 1973년 4월 12일(당시 주임 : 박희봉 신부님)에 이전해 왔다,

.

바위 옆에 놓인 높이 48㎝, 둘레 118㎝의 돌은 다블뤼 안주교가 1845년 성인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이래 ,

합덕 신리에서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던 문지방돌이다.

두께 1m, 지름 4m, 둘레 11m, 16톤 무게의 이 바위는 미군 제 83병기 대대의 협조로 이전 작업에 착수하여,

1973년 4월 12일에 바위를 절두산 성지쪽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 1830-1911)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너비 70cm, 높이 2m.)

1979.9.26일에 제막되었는데 검은 대리석으로 전후 좌우에 16위의 공적 및 순교내용과 순교일지

직계 후손가계 제막 경위 등을 소상히 새겨넣어 후대에 길이 남도록했다.

박순집 일가족 16명은 1866년 병인년 대박 해를 시작으로 70년 경오년까지 4년동안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증거하며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박순집의 아버지 바오로는1839년 기해년 대 박해 때 순교한 범 주교 나 신부 정 신부등 세 성직자의 시신을

죽기를 무릅쓰고 노고산에 암매장한 후 4년뒤 관악산 옆 박씨가문의 선산인

삼성산에 안장하고 자신은 1868년 절두산에서 순교했다

뿐만 아니라 고모 박 막달레나와 큰조카 바오로가 병인년 양화진에서

형 요왕과 형수 손 발바라가 무진년에 각각 순교하는 등

70년 경오년까지 20세의 조카에서 70세의 큰삼촌까지 모두 16명의 일가족이 당당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과 일가족 1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치명자

그리고 베르뇌 장 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새남터에서 찾아

와고개(現용산우체국뒤) 에 안장, 오직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그 일생을 바쳤다.

1911년 82세로 선종한 박순집의 유해는 71년 인천 용현동(독쟁이)에서 절두산으로 이장、안장됐다

한국 순교 성인 시성 기념 교육관으로 성지 사무실, 박물관 학예실, 성물 판매소, 부활의 집이 있다

한국 순교 성인 시성 기념 교육관 로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과 요한 바오르 이세의 조형물이 있다

로비 에 걸려 있는 피의 절벽 헌시

성지 서쪽에 위치한 꾸료실로 교육관이다

왼쪽은 성 바오로 상인데 오른쪽에 강변의 성모상이 있는데 사진에는 안 나왔다

꾸료실로는 평신도 단기 신앙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도 '트레스디아'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데 3일간 숙식을 같이 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또 나가서 그 사랑을 전하라는 경건훈련이라 할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려니고 하니 입구에 꾸로실로 교육을 마친 사람만 입장할 수 있다고 쓰여있어

우리 부부 모두 이미 뜨레스디아스를 경험했지만 구태어 들어가 볼 필요가 없어 그만 두었다

아무튼 이런 교육관 까지 있어 평신도 신앙 훈련장으로 쓰고 있다니 부럽기도 하다.

꾸로실로 교육관 오른쪽에서 있는 강변의 성모상이다

병인 박해 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으로 충청북도 연풍 공소에서 발굴되어 1974년에 이전해 왔다.

이 형구돌은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면서 땅 속에 묻혔던 것을 발굴 해 낸 것으로,

앞 구멍에 머리를 대고 목에 밧줄을 건 뒤에 뒷구멍에서 잡아당겨 질식시키는 교수형 집행 기구였다.

그밖에 순교자들을 고문했던 형구들은 성당 앞 형구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둘레 3m, 두께 30cm, 앞 구멍 지름 30cm, 뒷구멍지름 6cm.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미련한 대원군의 쇄국정책 바람에 우리나라가 한 100년은 후퇴했을 것이다

진품은 국립 박물관에 있으며 절두산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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