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권세열 (1904.1.13~1992.9 )B32-33
아내 도로시 W. 킨슬러(Dorothy Woodruff .Kinsler 1907.1.20~2001.3.14) 부부 묘역
부부의 비문에는 '라고 쓰여 있다“Served Korea for Christ 1928-1970”라고 쓰여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국을 섬겼다 1928~1970"
성경 구락부와 군목제도 창설에 공헌한 킨슬러 선교사
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권세열 1904.1.13~1992.9 )
F. 킨슬러는 190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여, 1925년 메리 빌 대학과 1928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8년 10월 4일, 24세의 나이에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대한제국에 파송되어.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숭실대학 교수와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1970년까지 신약학 교수로 강의하였다
그의 신약사상은 복음적이면서 극에 치우치지 아니하는 중용의 학자였으며,
또 신앙을 생활화하여 실천에 옮기는 진실한 선교사로 전해지고 있다.
킨슬러 선교사는 신학교 시절 만난 킨슬러 아내 도로시와 1930년 평양에서 결혼했다.
1929년 평양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아 6명을 모아 시작한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한편 복음까지 전하기 위한 모임이 후에
대한 청소년 성경 구락부 운동으로 발전하여 사회 선교 기관이 되었다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가 광복후 1949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청소년 "성경구락부(Children's Bible of Korea)" 운동을 재개하여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확산되었다.
6.25 전쟁 이후에도 전쟁 고아, 피난민 자녀 등 수많은 불우 청소년을 대상으로 초,중,고등부 교육에 주력하며
1954년에는 전국 671개 성경 구락부에서 7만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1992년 소천하기 전까지 60여년간 전쟁 고아와 불우청소년등 100만명의 학생들에게
교육과 복음을 전하여 이것이 한국 교육과 복지의 시초가 되었고,한국땅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다.
킨슬러 선교사는 1970년 선교사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한인 이민교회를 도우며 지내다가 1992년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01년 9월 아내의 유해와 함께 양화진으로 옮겨졌다.
아내: 도로시 킨슬러(Dorothy Woodruff Kinsler.1907.6.20-2001.3.14) 선교사 .
도로시 W. 킨슬러(권도희)는 1907년 6월 20일 미국 뉴저지(Trenton)에서 출생하였다.
윌슨 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9월 12일 여성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 선교부에 배속되어 선교 활동을 하다가
프란시스 킨슬러와 1930년 9월 8일 평양에서 결혼하였다.
장로회 신학 대학에서 영어 교사로 1970년까지 활동하였고
남편의 성경구락부 사업을 도우면서 고아 자선 사업과 장애인 수양 부모로서 공헌하였다.
2001년 3월 14일 미국 캘리포니아(Pasadena)에서 별세하여 먼저 소천한 남편의 유해와 함께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들 부부의 자녀로는 헬렌, 아더(Arthur W. Kinsler, 권오덕), 로스 등 3남매가 있다.
자녀들 역시도 대을 이어 장남 아서 킨슬러(권오덕) 부부와 딸 헬렌 킨슬러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2세 장남 아서 킨슬러(Arthur W. Kinsler 권오덕 19234~)와 며느리 신영순 선교사 부부
권오덕 목사는 1928년 아버지 프란시스 킨슬러와 어머니 도로시 킨슬러 사이에서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나 6살까지 한국에서 살았고 미국에서 프린스턴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준비 하던중에 교회에서 신영순 사모를 만나 1968년 결혼하였다
권오덕 목사는 신영순 사모와 미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35년간 베트남 전 군목 장교,
이태원 미국 군인 봉사선교, 순천 산업단지 산업선교 등 국내 선교사역에 전념을 다했다.
한국인 부인 신영순 사모와 함께 부모의 대를 이어 1998년부터 북한의 식량난과
특별히 몸이 불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 민족의 책임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남과 북의 끊어진 역사가 이어지고 미래 통일 민족의 복지균형이 이루어진다는 사명감으로
민족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1998년 처음 북한을 방문한 후 지금까지 80여 회가 넘도록 정기적으로 방문해
고아원, 국수공장, 빵공장, 콩우유 공장을 지원하고 2005년부터는 북한의 장애인 관련 사업을 총괄하는
조선 장애자 보호연맹과 협력하면서.2007년에는 평양에 장애인 직업 재활편의시설을 개관했다.
현재 북한 전역에 있는 장애인시설 및 어린이시설, 보건의료시설 등 약 20여 곳을 수시로 방문해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3만여 명의 북한 어린이들에게 급식이 제공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장애인 사역의 동기는 막내딸이 어릴때 뇌막염으로 정신지체 장애인이 되었는데 아픔과 고통속에서
지체 장애인들을 우리집에서 전도도 하고 직업 알선도 하면서 91년도 장애인 직업재활을 하는 복지관을 시작하고
7년동안 원장을 하다 98년부터 북한에 갔기에 북한의 장애인들에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 권세열 목사가 남긴 1억 1천만원 정도를 갖고 2004년 5월 등대복지회를 창설하여
본격적으로 북한 도우미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정치를 떠나 굶는 아이들과 노인 장애인을 돌보는 건 같은 민족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우린 주님의 제자 아닙니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린 염소도 양처럼 대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서 킨슬러 부부는 1960년대부터 42년 동안 선교사로 헌신한 후 2011년 은퇴했으며,
그 후에도 북한 장애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E. C. 파올링 선교사 가족 묘지 A 58
파올링의 아들 고던 파올링(Pauling, Gordon 1895.12.20~1899.1.11)이 안장되어 있다
한국 최초 침례교회 설립자 에드워드 C. 파올링(Edward Pauling)선교사
파올링(E. C. Pauling)선교사는 침례교 선교사인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과 함께
1894년 목사 안수를 받고 1895년 미국 침례교회 선교단체인 엘라 딩 기념 선교단에서
침례교 선교사 제1진으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중 한 분이다.
엘라 딩 선교단(Ella Thing Memorial Mission, ETTM)은 미국 보스턴에 있는
클라렌돈 침례교회 교인(실업가), 딩(S. B. Thing) 씨가 그의 외동딸 엘라 딩을 기념하여 만든 선교단체다
이 선교회는 1895년 파올링 부부와 가데린(A. G. Gardeline)양을 한국에 파송했으며,
다음해 두 번째로 스테드맨(F.W.Steadman)과 에클스 및 엘머 선교사 등을 파송했다
.
침례교단 계통에서 제1차로 내한한 파올링 선교사 부부는 처음에 노방 전도를 시작하였으나 선교 실적은 부진했다.
그러나 지병석이라는 분을 전도하여 침례하게 되어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 침례교회를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는 1896년 2월 9일 파올링 부부와 가데린(A. Gardeline) 선교사, 지병석부부 등 5명이
예배를 드렸던 논산시 강경읍 북옥동 137번지에 세운 강경 침례교회이다.
한편 침례교 전국 총회(1998)는 '북옥동 137번지'를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했다.
이곳은 '강경산' 또는 '옥녀봉'으로 불리며, 금강과 논산 벌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경치가 좋은 명소다
파울링 선교사는 1899년에 자신의 사역을 스테드만 (F. W. Steadman) 선교사에게 위임했고,
스테드만 선교사는 2년 뒤 1901년에 그 동안 모든 사역을 원산에 있던 펜윅 선교사에게 맡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강경에서 자란 그의 아들 고던 파울링이 불과 4살의 어린 나이에 풍토병으로 사망하자
아들을 양화진에 묻고 재정적 문제와 전도의 미진 등으로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크게 사역하지는 못하였으나 한국 최초의 침레교단 설립자라는 큰 의미가 있다
캔뮤어 선교사 아들 고던 켄뮤어( Gordon Kenmure,.1896.9.10~1897.1.1)의 묘
묘비에는 “켄뮤어 선교사 부부의 어린 아들 (Infant Son of A. and A. H. Kenmure)”이라 기록되어 있다
알렉산더 캔뮤어(Alexander Gordon.Kenmure(1856~1910)
알렉산더 켄뮤어(Kenmure, Alexander)는 1856년 영국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학에서 해외 선교를 위해 공부했으며, 영국 성서 공회의 중국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1886년 1월부터 약 10년 동안 성경 반포 사업을 담당했다.
청일 전쟁을 계기로 중국에 종속되었던 조선의 성경반포 사업의 독립이 결정되자
켄뮤어 선교사가 그 일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1893년 5월, 조선을 방문해 한글 성경 번역 논의과정에 참여했고,
1895년 10월에는 영국 성서 공회의 한국 담당 총무로 부임했다.
이를 위해 평안도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전국을 돌며 성경 보급을 위한 조직을 구축했으며,
권서사업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그는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해 개방적이고 전통에 대한 자만심이 적어 복음 전도에 매우 희망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00년부터 성서 번역 위원회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여 신약성경 완역에 기여했다
켄뮤어는 1904년 초,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성서공회가 연합한 성서공회 공동총무로 선임되었으나,
구약 번역 업무의 과로로 인해 건강을 잃어 총무에서 물러났으며, 1904년 5월 요양을 위해 귀국했다
그는 1901년 안식년 휴가에 앞서 6년 간의 한국 활동을 1차 마무리하면서
“권서 사업은 하나님의 왕국을 앞당기는데 가장 귀중한 도구이다.
성령 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쇄된 말씀을 풍성히 사용하고 계신다.”고 했다
켄뮤어 선교사는 한글 성서의 새로운 번역과 반포를 통하여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핵심적인 선교 사역을 담당한 고마운 분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다니엘 L. 기포드(Gifford, Daniel Lyman, 奇普, 1861,1.9~1900.4.10)
부인 헤이든 M. 기퍼드(1857.8.23-1900.5.5)의 묘
다니엘 L. 기포드는 1888년 10월 27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에서 새문안교회 교역자와
경신학교 교장으로 목회와 교육분야에서 폭 넓은 활동을 하였다.
1890년에 북 장로회 선교사로서 정동 여학당(정신여학교)의 2대 당장이던 메리 헤이든과결혼하였으며
1892년부터 발행된 선교잡지 에 많은 기고를 했다.
1892년 우리나라 최초의 왕립학교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죠션 셩교서회' 창립위원으로 일을 했다.
기퍼드는 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하였는데. 특히 그의 저서 "조선의 풍속과 선교"에서는
자신이 선교를 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담담하면서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1898년 뉴욕에서 '조선의 매일 생활(Every Day Life in Korea)'이라는 책을 발간,
우리 나라의 풍속을 세계에 알리고 선교사들이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00년 4월 10일 남부지방을 순회하던 중 이질에 걸려서 소천 하였다,
기포드의 부인 .헤이든 기포드(Mary Hayden Gifford, 奇普夫人, 1857.8.23~1900.5.5)
최초의 공인 찬송가집 발간한 정신학교 교장
미국에서 출생하여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888년 9월 29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신 여학당장과 여성 선교 사역으로 경기 지방과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서울에서 다니엘과 결혼 후에도 가냘픈 여성이지만 선교 활동과 전도에 최선을 다햇다
헤이든은 1895년, 54곡의 찬송가집을 처음 출판하고, 1898년에는 83곡을,
1900년에는 87곡의 제3판을, G. 리와 공동 출판하였다.
장로회 선교 본부로부터 최초의 공인 찬송으로 채택되어 장로 교단 모두가 사용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와 함께 지금의 서교동 교회를 설립하였고.같은 해 새문안교회에서 여성 사역을 담당하면서
성전신축 담당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그녀도 기포드가 죽은 지 채 한달이 안되어 소천하였다
2002년 4월 10일 서교동교회가 세운 비문에는
"풍요로운 고국을 버리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1년 간 활동하였다.
기포드 부부의 숭고한 선교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감사하며 제102주기를 맞아 추모사업으로 이 비를 세운다"고 하였다
O. R. 에비슨 박사는 양화진 묘역에서 거행된 추모사(追慕辭)에서
"헤이든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한국에 왔고, 결혼한 후에도 어떠한 선교 활동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포드는 서울 남쪽 지방을 순회하는 동안 이질에 걸렸으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이곳에 장례하였습니다"라 하였다.
기포드 어머니는 1898년 8월, 60세가 넘은 나이에 이 땅에 들어와
아들 다니엘과, 며느리 헤이든이 별세한 뒤에도 조선의 가난하고 병든자를 구제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죠지 H. 루(Rue, George Henry, 劉濟漢, 1889.6.27-1993.11.18)
죠지 루 박사와 첫 부인 메이 벨 루 여사가 안장되어 있다
죠지 루 박사는 1889년 미국 캘리포니아 오크랜드에서 출생하고 1924년 로마린다 의대를 졸업했다
워싱턴주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다가 1929년 5월 7일 안식교 선교사로 부인(May Belle Ames)과 함께 내한했다
암울했던 일제 시대에 순안병원(평남) 의료 선교사로 시작하여,
1931년 6월 서울(소공동)에 2층집 두 칸을 세로 얻어 진료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11월 인사동으로 이전하여 경성 요양 의원을 개원하였다.
1933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29번지 일대 약 3만 9669.42㎡[1만 2000평]의 병원 부지를 마련하여
1936년 2월 15일 35병상 규모의 경성요양 병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서울 위생병원 (현 삼육의료원 서울병원)의 전신이다
또한 4월에는 경성 요양 병원 부속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삼육 보건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첫 부인이었던 마벨이 경성 요양 병원을 설립하던 1936년 12월에 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다.
이처럼 유제한에 의해 서울 위생 병원과 삼육 보건 대학교의 초석이 다져졌다.
1941년 신사 참배 강요 등 일제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추방되면서 병원 사업은 중단되었다.
조선에서 추방된 후 1946년 미국에서 산과 간호사로 일하던 젤다 그레이스 레아(Zelda Grace Lea, Mrs. Rue유은혜)와
재혼하고 1947년 부인 그레이스와 함께 다시 한국에 왔다
경성 요양 병원 병원장으로 재 취임하면서 병원 이름을 서울 위생 병원이라고 바꾸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주치의로 위촉을 받았으며,
그해 가을부터는 미국 대사관 직원과 재한 외국인 건강 관리 의사로 위촉을 받았다.
유제한과 함께 온 둘째 부인 유은혜는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과 입양 사업, 간호 학교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병원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유제한은 서울 수복 후 병원 복구 사업과 부상병 치료에 전념하였다.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와서 서구 부용동에 20병상 규모의
UNCAC(유엔 원조처) 경남 연합 임시 산원을 개설하였고.
또한 같은 달 맥아더 사령부에 요청하여 L.S.T(수송선)를 배치 받아 부산에서 환자 등 수천 명을 태우고
제주도 성산포에 도착하여 임시 병원을 열어 환자 구호에 나섰다.
.
유제한은 1953년 3월 부산 서구 서대신동 2가 382번지에 병원 부지를 매입하여 이듬해 병원 신축 공사를 완공하고
서울 위생 병원 부산 분원인 현 부산 위생 병원을 설립하였다.
32년간의 의료 선교사의 직무를 마치고 1967년 8월 3일 명예 퇴임한 유제한은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1968년 이후 6차례나 왕래하며 병원 사업에 협력하였따
워싱턴 주 북단에 위치한 멜로우 스톤 섬의 작은 마을 노드랜드(Nordland)에서 거주하다가
1993년 11월 18일 오후 8시 47분에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한국으로 와서 양화진 첫부인 곁에 안장되었다.
.
양화진에 있는 그의 비문에는
"나는 한국에 구경 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려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로서가 아니라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온 온 선교사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를 치료할때나 시골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대한민국 문화훈장(1954), 중앙대 명예박사(1963), 서울시 명예시민증(1965)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부인 메이 벨 루(Rue, May Belle Ames,1900-.10..30~1936.12.18)
미국에서 아버지(J. J. Ames, 장로)와 어머니(전도부인)에게서 1900년 10월 30일 태어났다.
태평양 유니온 대학 재학 중 루(George Henry, Rue)를 만나 1921년 6월 19일 결혼했다.
그들은 1923년 큰딸 베티(Betty, 주:한국에서 수년간 간호사로 봉사함. 그 남편 밋첼은 삼육대학을 건축함.)와
1925년 아들 죠지(George H Rue) 남매를 낳았다.
1928년 11월, 남편과 함께 안식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6년 4월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하는 등 많은 활동과
남편의 선교사업을 성실히 내조하고, 전도와 의료선교사로 공헌했다.
1936년 12월 16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안식교 선교사 최초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948년 12월 18일 서울에 “메이 벨 기념교회”가 남편에 의하여 헌당되었다
엘렌 P. 홉스( Beatrice Ellen Pugh,Hobbs, 1880.8.24-1934.4.8)
토마스 홉스의 부인으로 성서공회 외국인 선교사로는 양화진에 첫 안장자다
엘렌 P. 홉스 선교사는 1880년 영국에서 출생하고.
토마스 홉스와 결혼하였으며 1910년 9월 16일 남편과 함께 구세군 간호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남편의 성서 공회 사업 등 선교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기독교 부인 절제 연합회 회계(외국인부서)로 봉사하고,
사경회 강사로도 활동했으며. 동물 학대 방지협회 등에서 사회활동도 하였다.
진명여학교 등 2개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고 열정을 가진 헌신적인 선교사로 전해진다. .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1932년 1월 30일 남편과 함께 서울을 떠나 영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1933년 2월 7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34년 4월 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남편 홉스를 내조하면서 22년간 봉사했던 성서공회와 한국교회의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영국 성서 공회 총무 토마스 홉스( Thomas Hobbs : 許曄 )1880-? )선교사
1880년 영국에서 출생하여 영국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9월 16일 구세군 선교사(사관)로 부인(엘렌 P. 홉스)과 함께 내한했다.
1911년 구세군 한국 본영에서 활동하고 개성 지방관으로 전임하였다.
원당 사평 장단 등 지방 군영을 개설하거나 관리와 순회 전도를 하였다.
문맹 퇴치와 사회 계몽 활동에도 힘썼다.
1913년 1월, 저다인(J. L. Gerdine)선교사와 밀러(Miller, Hugh 閔休) 총무의 추천에 의하여
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 부총무로 선임되었다.
그가 선임된 배경에는 '구세군 사관(정위)으로 2년간 근무한 32세의 기혼자이며, 한국어를 잘하는 동시에
이미 한국인 권서와 함께 전도를 해오고 있고, 권서 사업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으며
그 부인도 권서인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공회 사업을 관장하면서 특히 권서인(勸書人)의 조직과 관리를 주관하였다,
그의 권서 방식은 '모든 가정, 모든 사람(Every home, and Every man)'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호별 방문 형식의 권서 보급 운동을 장려하여 많은 성경을 보급하였다.
1921년에는 권서인을 위한 잡지 를 편집, 발간하였다.
밀러의 안식년 때(1916.7-1917.8)에는 대리 총무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자 지원 입대 한 후 제대하여 1919년 9월 3일 서울로 돌아왔다.
1937년 10월 제2대 밀러 총무가 정년으로 은퇴하게되어 후임으로 제3대 영국 성서 공회 총무가 되었다
. 부총무로 25년간 경륜을 쌓은 뒤 57세의 나이로 총무직을 맞게 되었으므로
이미 성서 사업에 노련한 전문가로서 한국에서 높은 명망을 얻고 있었다.
밀러 총무가 추진하던 개역성경 번역작업을 성실하게 마무리하고
신ㆍ구약을 합본하여 <성경 개역>으로 출간하는 등 성서 출판과 보급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8년 '영국 성서 공회'(BFBS)의 명칭을 '조선 성서 공회'로 바꾸는 등 대한 성서 공회 발전에도 기초를 확립하였다.
1941년 3월, BFBS에 속했던 모든 성경 재고와 조성된 자금을 조선 성서 공회에 기부했다.
그는 1934년 엘렌 부인과 사별한 뒤, 1935년 9월 11일 이화여전 교수 밴플리트(Van Fleet, Edna Marie)와 재혼하였다.
1941년 5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미국 성서 공회 임시 총무로 활동하면서
한국 성서 사업의 계속 수행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제임스 A. 웨이드(James Adam Wade 1930.1.5~1983.8.1).
리 맥클린톡 웨이드(Lee.M.Wade1936~1973) 부부의 묘.
제임스 A. 웨이드 (James Adam Wade 1930.1.5-1983.8.1).
웨이드는 1930년 미국 일리노이 주 그래니트에서 출생하여 1947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1952년에 시카코 음악대학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였다.
그는 1954년에 미 육군(UN군)으로 처음 한국에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작곡 부문 석사학위에 이어(1962)
세인트 루이스의 워싱콘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에 아내와 함께 다시 와 부부 모두 평생을 한국에서 살았다
웨이드는 한국에서 살면서 음악가, 언론인 및 잡지 편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연세대 음악 대학 교수, 한미 재단 문화 담당관, 한국 해외 정보처 고문.한국 관광 공사.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청와대 자문위원.코리아 타임즈 교열 편집자 등으로 일하며 기업과 정부 기관의 해외 활동을 지원했다.
웨이드의 오페라 "순교자(The Martyred)"는1964년 미국에서 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김은국씨의 동명 소설을
김기팔이 각색한 극본을 토대로 작곡한 것으로 '제임즈·웨이드'씨가 작곡, 영문으로 대사를 붙인 작품이다 .
오페라가 나오기 전에'순교자'는 영화와 연극으로 이미 관객에게 선을 보였는데 이번 오페라 역시
작곡자'웨이드'씨가 지난65년 국립 극단이 공연한 김기팔 극본·허규 연출의 연극을 보고 감동,
그것을 압축하여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신앙인이 겪은 삶과 죽음, 신에 대한 믿음의 의미 등을 표현한 대작이다.
그는 오페라"순교자"는 1970년 4월 8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처음 공연하여 한국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한국 음악가 협회 명예회원과"The Society" 회장을 역임하였다
부인 맥클린 톡 웨이드(Lee Mc Clintock.Wade 1936~1973)의 묘
.리 맥클린톡 웨이드는 1936년 미국 세인트루이에서 출생하였다.
제임스 웨이드와 결혼하여 1960년 남편과 함께 내한 하였다.
용산 미군 도서관 사서로 1973년까지 활동 하였다.
그녀는 평소 한국음식을 좋아하여 조리법을 정리해 두었는데,
그녀가 죽은 후 리 웨이드의 요리책(Lee Wade's Cookbook)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으며,인세는 전주 예수병원의 암 연구기금으로 기증했다
1973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J. L. 저다인의 아들 조셉(Gerdine, Joseph Lumpkin Jr.1915.11.19~1915.11.20)의 묘
J. L. 저다인(Gerdine, Joseph Lumpkin전요섭)선교사의 아들로 단 하루를 살고 죽어 양화진에 묻었다
J. L. 저다인(Gerdine, Joseph Lumpkin전요섭(1870-1950.7.13~.3.13 )
부흥 운동과 성서 공회 회장 등으로 활동한 저다인 선교사
J. L. 저다인(Gerdine, Joseph Lumpkin, 全堯燮)은 1870년 7 미국 앨라배마주 픽켄스에서 출생하였다
조지아 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조지아주 엡윗청년회 회장으로 평신도 운동을 하였으며
1902년 조지아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2년 11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3년-1906년 까지 원산과 개성에서 하디와 함께
부흥 운동의 중심인물로 사역하면서 성도들에게 성령을 체험하게 했다.
한국 교회에 부흥의 불씨를 일으켜 1907년 평양 대 부흥 운동으로 확산 시킨 선교사이다
그는 조용하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설교했는데. 그의 설교는 성경의 직접적인 인용이 많았다
.
저다인은 세계적인 부흥 운동에 대하여 선교 잡지(The Korea Mission Field, 1905.4월)에
“영국의 웨일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놀라운 역사는 호주에서도 나타났고,
미국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대 각성(覺性)운동이 같은 시대에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도 부흥사경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집회에서 성경을 읽고
공의와 절제와 심판, 그리고 죄의 무서움과 뉘우침의 필요성을 전했다.
1908년에는 서울로 옮겨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105인 사건)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변호를 자청하여 무고하게 억압 받은 피의자들의 조속 석방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
1909년에는 ‘남 감리회 한국선교회’ 제13대(1909.9.2) 연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10년-1913까지 서울 YMCA 제3대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11년 6월에는 교육 조사국(Educational Information Bureau) 설립에 언더우드선교사와 함께 참여하여
전국의 선교사들을 돕고 모든 종류의 학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교육 공지사항을 번역하고 배포하는 등
교육 선교 사업의 임원(회계)으로 활동했다
.
1911년 7월 5일 성서회관 정초식(定礎式)이 거행될 때 성서위원회 위원장으로 사회를 담당하고,
같은 해 9월 26일에는 한국 성서 위원회 가을 정기회의를 주관하였다
1912년 봄, 무교동 전도관(중앙교회) 헌당식과, 그해 가을 경성 성서 학원 개강 집회에서도 말씀을 전했다.
서울 YMCA 특별 집회에서도 설교하였으며, 미 남장로회 선교사 프레스톤(Preston)의 초청을 받아
목포에서도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등 폭 넓은 말씀으로 놀라운 결과를 이룩했다.
그 후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대한 성서 공회(기독교서회)회장으로 봉직하였고,
개성에서 1922년부터 3년간 전도활동을 계속하였다
.
1926년 미국 남 감리회와 북 감리회를 통합하기 위한 ‘남ㆍ북감리회연합 기성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부터 1936년까지 10년간 감리교 신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1937년 귀국하여 1939년 은퇴하고 조지아 주에서 거주하다가, 1950년 3월 13일 플로리다 주 크레센트에서 별세했다.
소피아 프릭(Frick, Jenny Sofia,1886.9.16-1912.4.29)
묘비에는 “1886년 8월 10일 출생하여 1912년 4월 29일 승천”이라 기록되었다
한국에 파견된 구세군 선교사중 최초로 양화진에 묻혔다
프릭 사관은 1886년 8월 스웨덴 텔례북에서 출생하여 스톡홀름 구세군 성경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1년 11월 20일 참위 직분을 받았으며 곧바로 한국 구세군 선교사로 선임되어 1911년 12월 24일 내한하였다.
스웨덴에서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구세군 선교사 제1진인 프릭(Frick, Sofia), 코흘러(Kohler, Magda),
우을선(Olsson, Verna) 등 세 람중 한명이었다
스웨덴의 연대장 뷔버는 프릭을 한국에 파송하면서,'프릭은 성령이 충만한 젊은 여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을 위하여 좋은 사업을 크게 이룩할 수 있는 선교사로 여기기 때문에 기쁘다.”라고 하였다
그는 쪽 복음과 '구세신문'을 나누어주며 문서 전도와 노방 전도에 힘썼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기도와 성경 공부를 한 뒤, 7시에는 뒷산에 올라가
한국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한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프릭이 1912년 4월 18일 급성 뇌염으로 앓아눕게 되었다.
의사의 극진한 진료와 호가드 사령관 부인 등 여러 사관들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1912년 4월 29일 순직하였다.
그녀가 한국에 온지 불과 넉달 남짓 정도 였다
제임스 토프트(James Toft, 한국명: 두영서 1865-.7.4~1928.6.15)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다.
부인 힐다랄손은 농아(聾啞)사업의 공로로 창립자 훈장을 받았다.
그는 도착하자 곧바로 지방 순회에 나갔는데 일정은 1926년 9월 4일, 고산지방을 시작으로
충북 영동의 심천 주곡과, 대구, 영덕,의성.충남. 홍성,개성, 전주, 해주 듣지를 두루 순회하면서 사관회의를 주재 하였다
1926년 11월 4일에는 세계 구세군을 통괄하는 브람웰 부우드(Bramwell Booth) 대장 일행이 방한하였다.
부우드는 서울에 도착하여 자동차 위에서 “구세군은 인종, 계급 상하를 불구하고 ,
흑암 중의 죄인을 구원하고 죄, 욕심, 술, 도박보다 큰 힘을 준다.”고 연설했다.
그런데 부우드 대장의 한국 방문기간 중 ‘구세군 분규 사건’이 발생하였다.
생활비 인상 요청 등이었고 부우드는 유감을 표시하고 분규 행동은 비 복음적, 비 구세군적이라 지적하고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과중한 정신적 부담이 되어
토프트 사관은 큰 충격과 책임으로 병을얻었고
세브란스 병원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1928년 6월 15일 새벽 3시 소천하였다.
그는 구세군 사령관 재임 기간 중 정동 사관학교, 대구군영, 해주군영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을 확장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쿠퍼(Harold Cooper, 한국명: 具佑保) 참모 정위는
"그가 우리 지방(해주)에 여러 영문을 방문하여 주신 것을 심히 기뻐하며 전하신바 복음과, 끼치신바 모범과,
감동과 감화는 우리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지방 영문을 순회할 때에 태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처지에서도 피곤한 내색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주를 위하여 기쁨으로 하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편벽됨이 없이 곧고 바르게 하셨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차드(Robert Chard) 서기장관의 인도로 거행되고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He is with Christ"라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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