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 설립자 윌리엄 M. 베어드
( William Martyne,Baird, 배위량(裵偉良 1862.6.16-1931.11.29)
양화진에는 둘째아들과 세째아들의 묘가 있으며 윌리엄 베어드와 첫 부인의 기념비가 있다
. 미국 인디애나(찰스턴)에서 출생하였고, 1885년 하노버대학을 졸업하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888)했으며,
하노버 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학위를 받았다.
윌리엄 M. 베어드(Baird)는 1891년부터 1931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1년 2월 1일년까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인천에 도착한 그 해 9월부터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부산 초량교회를 세웠으며 1985년 대구로 옮겨 대구지역 최초의 선교사로 대구 제일교회와 계성학당을 설립하였다
1897년에 평양으로 선교지를 옮긴 후에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당을 열었다.
3년 후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베어드는 초대 교장이 되어 1906년 9월에 감리교와 연합하여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an College)으로 발전하였다
숭실학교는 베어드 교장의 엄격한 학칙 준수와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성경 공부와 주일 예배는 엄격한 규율 아래 철저히 지켜졌는데,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출석부에 도장을 찍어서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음을 확인하도록 했다고 한다.
근로와 자조 정신을 교육 목표로 삼았으며, 네비어스(Neveus) 방법을 한국 실정에 맞게
자립(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자족(Self-Support)에 기초한 선교 정책을 입안하였다.
숭실 대학장을 사임(1916. 3. 31)한 뒤에는 교재 발간등 문서 선교에 치중하였다.
1931년 11월 29일 장티푸스로 평양에서 별세하여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에는 가족들에 의하여 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첫 아내 .베어드 A. 아담스 (Annie Laurie Adams.Baird.安愛梨(1864.9.16-1916.6.19)
1883년 웨스턴 여자대학을 졸업하고 하노버 대학(1884)과 워시번 대학(1885)을 졸업하였다.
1890년 11월 18일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여 다섯자녀를 낳고 현모양처로 살면서
1891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부산 대구지방에서 남편의 선교 활동을 도왔다.
육영사업에 헌신하였다.
베어드 부인은 한글로 물리학, 동식물학 교과서를 번역하고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안타깝게도 암으로 1916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찬송가 "440장(멀리 멀리 갔더니)" 창작을 비롯하여
한국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양화진에는 기념비가 있다
둘째 아내. 평양 성경 학교장 베어드, R.피터롤프 (Rose May Fetterolf,Baird. 裵路使 1881-1946)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하여 브룸스버그대학을 졸업하고, 1918년 8월 7일 시카고에서 윌리엄 M. 베어드와 결혼하고
같은 해 선교사로 내한하여 성서 출판위원과 성서번역에 공헌하였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평양 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었다.
1946년 11월 13일 일리노이에서 소천하였다.
2세 베어드 2세 (William M. Jr.Baird, 裵偉林.1897.2.7-1987.8.5)
윌리엄 M. 베어드와 첫 부인 아담스의 아들로 1897년 2월 7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4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1929년 라이스트(Reist Anna L.)와 결혼하고, 1939년 건강문제로 평양에 이주하여 1940년 11월 귀국하였다.
1987년 8월 5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라 기록되어 있다.
강계 성경 학교장 리처드 H. 베어드 ichard Hamilton Baird . 裵偉就 1898-1995)
1898년 9월 1일 평양에서 윌리엄 M. 베어드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23년 9월 8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부인(Golden Stockton)과 함께 내한하여 강계지방에서 순회 전도하였고,
강계 성경 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전도인 양성에 헌신하였다.
1941년 일시귀국 후 1957년 다시 내한하여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부 총무로 봉직하다가 1960년 귀국하였다.
오클랜드에 거주하면서도 한국 유학생 생활과 신앙을 지도하였다.
1995년 1월 1일 별세하여 가족들이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묘역에는 잔디 대신 맥문동이라고 약초로 쓰이는 초화가 심어져 있다.
앤더스 크리스 젠센( Anders Kristian, 全善,일명 Kris,)가의 묘역
Anders Kristian.Jensen선교사 (1897.3.14~1956.11.20)
마우드 K 젠센(Maud Keister Jensen 1904.9.27~1998.10.12)
클레어 L. 젠센(Jensen, Clair Lee,1929.10.11-1996.2.26)
이 영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全善, 별명: Kris1897.3.14~1956.11.20))
젠센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었다.
1897년 덴마크 네스보그(Naesborg)에서 태어나 1914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하여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코넬대학과 보스톤대학 신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감리교 국내선교부에서 일하다가 1926년 5월부터 미국 감리교의 한국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마우드 키스터(Maud Keister)와 1928년 7월 결혼했다.
젠센 선교사 부부는 결혼 1년 후인 1929년 8월 한국에 들어와 인천, 수원, 이천 등 서울 근교 경기도 지역과 강원도 원주와
동해안의 도시들, 그리고 서해의 섬 지역을 오가는 순회선교사로 일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내한 초기 인천에서 7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34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 1년 후 다시 돌아와 수원 인천 원주 서울 등지의 순회 선교사로 시무했다. 1940년 일제의 추방령으로 출국되었다.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하던 1950년 6월 개성 출장 중에 6·25 전쟁을 만난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그날, 젠센 선교사는 개성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당시 젠센 선교사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쟁 발발 하루 전날 개성으로 출장을 갔다가 붙잡힌 것이다.
젠센 선교사는 이후 3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포로교환 협정에 의해 풀려나 1953년 5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오랜 포로 생활과 압록강을 건너 모스크바를 거쳐 미국까지 오는 죽음의 행렬을 겪으면서 심신이 매우 약해졌다.
가족과 재회한 후 젠센은 허약해진 몸을 추스른 다음 미국 전역을 돌며 간증여행을 했으며,
1954년 10월에는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사역을 재개했다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재건하려는 교회에 도움을 주면서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진력했다.
1955년 연세대학 재단이사로 활동하고, 1956년 11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고문단’ 일행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가 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
한국에서도 그는 전국을 돌며 간증과 설교를 하는 등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56년 11월 심장마비로 하나님을 부름을 받아
11월 23일 감리회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마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젠센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었다.
묘비에는 요한복음 15장 13절 첫 부분(Greater love hath no man...)을 기록하고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기록되었다.
매드 K 젠센(Maud Keister Jensen 1904.9.27~1998.10.12)
젠센의 부인인 매드 목사는 1904년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하여 1926년 5월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28년 7월 13일 A. K. 젠센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딸(Clair Lee)과 아들 필립(Philip,)을 낳았다
후에 아들은 성장하여 미국에서 교수와 감리교 목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
내한 초기에는 인천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감리회 초기 여성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드루(Drew)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선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한국에 남아 1969년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녀는 젠센 선교사의 헌신적인 선교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전역의 교회를 돌며
선교 헌금을 모아 서울 정동교회 내에 젠센 기념관을 지어 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정동제일교회에 헌증하였다
젠센 기념관은 교육관으로 학생들을 위한 활동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특별집회나 부인회 등의 모임장소로 제공되었다
선교사직을 정년 퇴임하고 뉴저지 주 매디슨(Madison)에 살다가 1998년 10월 12일 소천하였다
유해는 양화진에 남편 젠센 선교사 옆에 묻혔다.
.
젠센 부부의 딸 클레어 L. 젠센(Jensen, Clair Lee,1929.10.11-1996.2.26).
1929년 10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미국 뉴저지에서 사회봉사 사업가로 복지와 장애인을 위해 일했다..
1996년 2월 26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유해는 양화진 부모 곁에 안장되었다.
브록크만 가(家) 3대의 묘지(B14-16)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6.10 巴樂萬)
어머니 (Mrs. Brockman, W. A. 1840.2.20-1915.3.7)
딸 바바라 브록크만(Brockman, Barbara, 1914-1922))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6.10 巴樂萬)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1902년 조지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내한하여 1906년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하나의 새로운 전문직 창출(創出)을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산업 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으며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로 못 배우고 가난한 소외계층들이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상류층의 청년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크만은 YMCA를 통해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국의 청년들에게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준 인물이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기 수련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하령회로 인하여 YMCA는 105인 사건과 연루되었고 브룩크만 역시도
.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謀事) 했다는 것이다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 지식인과 YMCA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의 조작극이었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저다인(L. L. Gerdine) 회장은 강제 사면되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16년부터 YMCA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는데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소천하여
프린스턴 신학교 장(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왔다.
묘비에는 '24년 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친구
(For twenty four years in Korea, Seer Builder, Peace Maker, Friend)'라 기록되었다.
.
그의 형 플렛쳐 S. 브록크만(Brockman, Fletcher Sims, 1874-1939)은 중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1903년 한국 YMCA 창설 자문위원회 특별 강사로 내한하여
1903년 10월 28일 황성 기독 청년회 창설공로자이다.
1905년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 파송도 주선하였고 가끔 YMCA 초빙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에 입국하여 지도자 훈련 등에 참여했다.
어머니 (Mrs. Brockman, W. A. 1840.2.26-1915.3.7)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별세했다
어머니(Mrs. Brockman, W. A.)는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소천하여 양화진 아들의 곁에 안장되었다.
딸 바바라 브로크만(Brockman, Barbara, 1914-1922)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2년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브로크만은 1912년 35세의 늦은 나이에 제시 윌리스 Jessie Willis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두었으나 >
첫딸 바바라 Barbara를 잃고 말았다.
윌리엄 E. 쇼(서위렴, William Earl, Shaw1890.8.22~1967.10.5),가족 묘 F 20
부인 아데린 H. 쇼(Adeline Hamilton,Shaw,1895.7.2-1971.5.
외아들, 윌리엄 H. 쇼(William Hamilton.Shaw,1922.6.5~-1950.9.22)
부부와 아들이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윌리엄 E. 쇼(서위렴, Shaw, William Earl.1890.8.22~1967.10.5),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7.2-1971.5.8)부부 묘비
윌리엄 쇼 선교사는 우리나라 군목제도 창설에 기여했으며, 군 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윌리엄 쇼는 1890년 8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 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대원을 졸업(1927)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 선교사를 자원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
그들은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감리회 평양 선교부에 배속되어,
쇼 선교사는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하였다
1938년 무어(J. Z. Moore)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아내 아델린 선교사는 숭덕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쇼 선교사는 평안도 지방은 물론 황해도와 만주에서도 선교 활동을 펼쳤고,
평양에 요한 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도 힘을 썼다.
쇼 선교사 부부는 약 20년 동안 선교 사역을 감당했으나 일제의 강제 추방 조치로 인해 1941년 우리나라를 떠났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쇼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1947년 다시 들어왔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함)
1954년부터는 대전신학교(현 목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전력하는 한편
.외아들 쇼 해밀턴이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자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하였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천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 대전 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40여년의 선교사역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는 1961년 40년에 걸친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여 미국에서 여생을 살다가 1967년 소천했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1971)선교사는 1895년 7월에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외아들, 윌리엄.H 쇼 ( William Hamilton.Shaw,1922.6.5~1950.9.22)묘비
윌리엄 해밀튼 쇼(Shaw, William Hamilton)는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노르망디 싱륙작전에 참가했으며,
해방된 우리나라에 미 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내한하여 국군 해안 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해군에서 제대 후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 공부 중에 6·25가 발발하자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고, 서울 수복 진두 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당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아버지 쇼 선교사에 의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새겨져 있다.
최근 이 감동적인 비문을 제목으로 묘비 탁본과 함께 선교사들의 숭고한 생애를 담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는 책을 발간하였다(홍성사) 적극 추천!!!
2001년 10월 20일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하여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졌다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 어린이공원'에는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옮겨 놓았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 서화순)는 1943년 해밀턴 쇼와 결혼하였으며
남편이 전사한 6년 후 1956년 감리사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10여 년 동안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 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하였다.
서울 외국인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마우드 S. 그린필드( Maud Saxe,Greenfield, 1874-1910.19) A 29
1874년 미국 뉴욕주 왈덴(Walden)에서 출생했다.
1907년 9월 15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Greenfield, M. Willis)과 함께 내한하였으며,
1909년 정신 여학교 제 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제5대 교장이며 에드워드 H. 밀러(密義斗)의 부인 헨리 밀러(Miller, M. Henry)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9년 9월 한국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시신의 매장 준비(Preparation of the body for burial)"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는 정신 여학교 교장 재임 중인 1910년 1월 5일 아들 그린필드(Greenfield, Willis Saxe)를 낳았지만,
산후 후유증으로 1910년 1월 29일, 출산한지 3주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여성 선교사로서 한 아내와 어머니로 헌신한 그린필드를 사랑 가운데 기억하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Rom. 8:30)"라는 기록이 쓰여있다.
남편 M. W. 그린필드 선교사 (M. Willis,Greenfield, 權弼斗,權日斗:1881~1917)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소년 시절 캐나다로 이주하여
시라큐스 대학과 어번 신학교(Auburn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1907년 5월 마우드 그린필드는(Maud E. Saxe Greenfield)와 결혼하고,
그해 9월 15일 부인(Maud Saxe)과 함께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경신 학교 교장과 경상북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180여일 동안 시골 마을과 산길을 6 천리 이상
걸어다니며 경북 북부와 동해안 일대의 넓고 개발되지 못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음을 전한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이처럼 몸을 돌보지 않는 전도여행 탓에 그는 건강을 잃어 1914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경상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밀즈 선교사와 재혼하고
다시 한국에 와 복음을 전하려는 소망을 품었지만 1917. 12월 소천함으로써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1909년부터 1914년 사이에 교육과 전도에 관한 주제로 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 중에 1913년 10월 선교잡지(The Korea Mission Field)에
게재한 '대구지역 선교사업의 의의와 전망'에 관한 논문에서,
"지나간 세월에 어둠 속에서 지내던 한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손길을 통하여.
선교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국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 도움이 계속 될 것이다."라는 어록(語錄)을 남겼다.
그 후 1916년 6월 5일 장로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양화진에는 그의 첫부인 M. S. 그린필드(Greenfield, Mad Saxe) 여성 선교사가 안장되어 있다.
그 옆자리에는 남편인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선교사의 묘지로 마련되어 있지만, 아직 비어있다
에케르트.F (Eckert, Franz : 埃巨多1852.4.5~1916.8.6) A 8
한국 최초의 군악대 창설자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실레시아 프러시안 지방의 도시인
누로드에서 태어나 브레스라우와 드레스덴의ㅡ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나이세에서 군사음악을 전공했다.
그는 빌헬름스하펜에서 왕립 해군 군악대의 밴드 마스터로 일하던 중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고문으로 초청받아 1879년 3월 일본에 왔으며 이후 20동안 활동했다.
에케르트는 1899년 건강상 문제와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2세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1900년에 그는 조선정부로부터 궁정악단을 조직하고 대원들에게 서양악기 연주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한국 최초의 궁정 군악대를 조직하여 궁정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매주 목요일에는 탑골 공원에서 대중을 위한 연주회도 열었다
고종 임금 제50회 탄신 기념일인 1901년 7월 25일(양력 9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서양 음악으로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는 한 번 연주되고 정식 채용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으로부터 3품의 작위를 받았다.(태극장 3등)
이 군악대는 1907년 우리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되었다
.
에케르트는 이때 일자리를 빼앗겼으나 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6일 자택에서 인후암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카톨릭 신자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작곡자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그의 부인은 그가 별세한지 5년 후 1920년 독일로 돌아가서 1934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한국에서 출가하였다.
맏딸(아마리 에케르트)은 프랑스 외교관 마르델(Martel, Emile)과 결혼하였으며,
그는 한국에서 불어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한국에서 55년(1894-1949) 동안 장기간 활동하다가 사위 마르텔도 양화진에 묻혔다.
2세 비비안 S.게일(Vivian Scarth Gale1916.2.14-1917.8.7) C21-22
3세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1914-1914) 묘역
비비안은 James S. 게일 선교사와 그 두 번째 부인 아다 루이스 (Ada Louise Sale)사이에서 출생한 2세이다
그들 부부에게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비비안 게일은 둘째 아들로 태어난지 1년 6개월만에 죽어 양화진에 묻었다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은 J. S. 게일의 조카 에손 게일(Esson Gale)과,
헤론-해티의 장녀 사라(Sarah Anne Heron Gale)사이에서 출생한 게일 가문의 3세이다.
출생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바로 앞자리에는 제임스 M. 게일의 외 조부모(外祖父母) 즉 존 헤론과 해티의 묘소가 연계되어 있다.
족보가 좀 복잡하다 ㅎㅎㅎㅎ
J. S. 게일 (James Scarth,Gale, 한국명: 奇一.1863.2.19-1937.1.31)
제임스 S.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 알마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 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 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 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총각으로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성서공회 전임(專任) 번역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주로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요한1서 등을 번역했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신·구약)전서를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 신보로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안식년에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898년 4월 다시 내한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 여학교와 경신 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 성교 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 기독 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 노회장으로 두 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 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 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1922)하여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첫 남편 헤론의 옆에 안장되었다.
게일은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Gale, 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정년 은퇴(1928)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서 중심이었다." 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하였다.
로테 위더스폰( Lottie Ingram Witherspoon Bell(1867.5.13~1901.4.12)A 49
유진 벨의 아내 로테 위더스픈 벨 묘지
미국 남장로회 부부 선교사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867년 미국 켄터키주(Louisville)에서 신학대학장의 딸로 출생하여. 아우크스투스 여자신학교를 1889년에 졸업했다
1884년 유진 벨과 결혼했고,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로 1893년 임명되었다.
남편 유진 벨과 함께 1895년 4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1895년 4월~1898년 2월까지 서울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웠고 1898년 3월~1901년 4월 12일까지
선교 지역이 목포로 변경됨에 따라 우선 마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살림과 사역에 어려움이 컸다.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의 여동생에게 1899년 2월 보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에 자신이 없지만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는 심장병을 얻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년이 넘도록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그와 한집에 기거하던 의료 선교사 오웬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천했다
이때에도 남편 E. 벨은 전주(全州) 전도 여행 중에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르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Eugene,Bell, 裴裕祉, 1868.411-1925.9.28)
로티의 남편으로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하여 1891년 루이스빌 센트럴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캔터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부인 로티와 1895,4.9일에 한국에 왔다
그러나 첫 부인 로티가 한국에 온지 6년만에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떠나자 벨 선교사는
우선 아이들을 미국의 누이에게 맡겨두고 다시 돌아와서
1904년 마가렛 불(Margaret Bull, 1873~1919.3)과 재혼하고 본격적인 사역에 돌입한다.
마가렛은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윌리암 F. B.의 여동생으로 버지니아 놀포크 출신이었다
미 남장로회는 전라도 다른 선교사들과의 중복 사역을 피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에 사역을 시작하도록 한다
1908년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시작한 광주 수피아여고를 비롯하여 숭일학교.
목포의 영흥학교 ,광주 기독병원등을 설립하며 목포와 광주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 중심의 선교 사역을 펼쳐나간다
;유진 벨은 광주 제일 교회.양림동 교회등 1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전라도 지역에 기독교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재혼한 아내 마가렛트(Bell Margarlet W.)가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 진상 조사 후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자동차 충돌사고로 1919년 3월 57세로 소천하므로 두번이나 아내를 잃는 슬픔을 겪는다
그는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다가 1925년 광주에서 소천하는데 그의 묘지는 광주 선교사 묘지에 잠들어 있다
딸. 샬롯 벨(Charlotte.I.witherspoon Bell 인사래1899.1.6-1974)
유진 벨과 첫 아내 로티 사이에서 난 샬롯은 어릴때 어머니를 잃고 미국으로 보내져 성장기를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고, 선교를 위해 군산에 도착했던 윌리엄 린튼을 만난나 결혼한다
전주 기전여고 전주 신흥고등 미 남장로교가 세운 학교에 교장으로 봉직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40여년간 헌신적으로 선교시역을 감당한다
사위, 윌리암 린턴(William.A.Linton 인돈 1891.2.8-1960.8.13)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 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2세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샬롯과 결혼한 후 부부가 함께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 신흥 학교와 기전 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하였다.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였으며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왔다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6년 대전 기독 학관을 설립했고
19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8월 숨졌다.
이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3대 휴 린튼(Hugh M. Linton,인휴 1926-1984)
윌리엄 린튼과 샬롯 벨 사이의 세째 아들로
미국서 대학졸업후 한국에 돌이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쳣다
고흥 간척 사업 도중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휴의 부인 베티(인애자)도 순천에서 결핵 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이상 결핵 퇴치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 훈장과 호암상을 받았고 지금은 노스 캐롤리나에 머물고 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으며,
4대 스티븐 린튼((Stephen W. Linton 인세빈)
휴 린튼과 로이스 린턴의 둘째 아들이자 유진 벨의 외증손자로 현재 유진벨 재단의 이사장이다
1995년 외증조부 유진벨의 한국 선교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막내 동생 존 린턴(인요한)과 함께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였다.
유진 벨로 부터 시작되어 윌리엄 린튼 가문으로 이어진 한국 선교 사역은 윌리엄 린튼과 샬롯 린턴의
휴 린튼이 이어 받았으며 휴 린튼과 로이스린튼 사이에 난 둘째 아들 스티브 린튼으로 4대째 이어져 내려왔다
킬브론가 4세 캐슬린.A 킬보른(Kathleen Ann Kilbourne 1950~1950.5.8) D13
E.A 킬보른의 증손녀이자 에드윈의 딸로 단 하루 살고 양화진에 묻혀있다
묘비에는'In his arms'라고 쓰여 있다
킬보른 가(家)의 계보와 선교사로서의 활동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국 성결교회 설립 주역 킬보른 1세
E.A. 킬보른(Ernest .Albert. Kilbourne 길보륜(1865.3.13~1928.4.15)
어네스트.A 킬보른은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독실한 감리교 인으로 성장했다.
시카고에서 전신 기술자로 일하다가 무디 성서 학원을 졸업(1899)하고 목사(1902)가 되었다.
쥴리아(Julia Pittinger)와 결혼하여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902년 8월 직장 동료이자 킬보른을 신앙의 길로 입문케 하여 1902년 감리교 목사 안수까지 받게 한
카우만(C. E. Cawman)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도 사업과 함께
자기들이 시카코에서 공부한 무디 성경 학교를 본받아 성서 학원을 운영하게 된다
1904년 11월 전도관(교회)과 성서학원을 한데 묶어 동경에서
‘동양 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로 약칭)를 창설하였다.
이 때 이 선교회의 목적은 ‘동양 모든 나라에 순복음(Full Gospel)을 전하고자 함이라’ 천명하였다
킬보른은 1905년 동양 선교회 창설자이자 부총재로 일하게 되고 후에 동양 선교회는 성결교단의 모체가 된다
1907년 5월 카우만, 김상준, 정빈과 한국에 2주간 머물면서 서울에 '동양 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했으며
1910년 12월 동양 선교회 지부를 서울에 세우고 ‘만국 사도 성경연합’ 명의로 파송된
영국인 존 토마스(J. Thomas) 목사가 초대 감독으로 내한하였는데 부인이 병들어 얼마 안있어 귀국하였다.
1921년 동양 선교회 제2대 감독으로 킬보른이 내한하면서 한국 성결교회의 조직을 강화시켰다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교파 의식 없이 전도하였으나, 추종자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1년 전도관을 교회로 전환하면서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기관지 '활천'을 창간하여(1922)초대 사장을 맡아 교육과 문서 선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4년에는 카우만 초대총리가 서거하자 그를 이어 2 대 OMS 총재로 활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뒤 5 년만인 1928 년 64 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수백 만금의 돈을 출납하였으나,
나의 소유는 송곳 한 개 박을 땅이 없고, 집도 없고, 화려한 가구도 없고, 생활비로 쓰다가 남은 돈 60$ 밖에 없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다" 라는 마지막 일기로 그의 검소한 생활 기록을 남겼다.
킬보른 2세, E. L.( Ernest Lawson.Kilboune 일명 Bud1891~1980)
E.A. 킬보른의 외아들 로슨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헌신했다
1922년 내한하여 서울 성서학원 교수,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고문으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일제 치하 당시에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 일제의 강압으로 OMS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했다가 1949년 다시 입국하면서
지방순회와 신학교 교수, 그리고 전도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젤(Hazel Williams)과 결혼하여 장남 에드윈 W.과, 쌍둥이로 J. 엘머와. 어네스트 등 3형제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서울과 중국의 미국인 학교와 미국 켄터키 애즈버리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모두 OMS 선교사가 되었다.
3세 에드윈 W. 킬보른(Edwin W.Kilbourne,1917~2015.8.19)
E. A. 길보른의 손자이며 E. L. 길보른의 아들로 1917년 일본에서 태어나서 1920년부터 한국에 와서 살았다.
당시 동양 선교회는 선교 본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겼다.
할아버지 E. A. 길보른은 한국 감독이었으며, 아버지 로슨도 한국에서 선교 활동 하고 있었다
1925년 동양선교회 총재였던 카우만이 세상을 떠나면서 E. A. 길보른은 총재가 되어 미국으로 갔고,
한국 사역은 그의 아들인 버드가 (로슨)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동양 선교회는 카우만의 유언에 따라서 중국 선교에 집중하게 되어,
버드 길보른은 상하이로 갔고, 에드윈과 그의 형제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에드윈 길보른은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애즈베리대학을 졸업하였다
1949년 내한하여 한국에서 서울 신학 대학 교수와 제2대 학장, OMS 부총재 등으로 1973년까지 활동했다.
'세기를 가로지른 다리’(Bridge Across the Century)라는 저서를 남겨
일본, 한국, 중국에서 활동한 동양 선교회의 선교 역사를 정리했다
에드윈의 부인 애드나( Adna 애칭,나누)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수였던 스탠리 마틴(Stanley Martin)의
딸로서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했고, 애즈베리 대학에서 에드윈을 만나서 결혼했다.
에드나의 아버지 스탠리 하비랜드 마틴(S. H. Martin)은 세브란스 의대 내과교수(1927-1940)로
결핵 환자의 조기 진단과 치료를 장려하며 봉사하다가 은퇴하였다.
나누의 오빠인 제랄드 마틴은 한국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언니 마가렛 마틴은 감리교 선교사로서 이화여고의 교사로 남편은 제임스 H. 무어(Moore, James H.)
목사로 감리교 지도자와 서울 유니온교회 목사로 활동하다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에드윈과 나누는 1950년에 한국에서 딸을 낳았는데 하루만에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힌 캐더린이다
3세 엘머 킬보른(Kilbourne, J. Elmer 1920-2017.5.3)
엘마 길보른은 OMS 선교사로 1956년부터 1986년까지
세계구호위원회 한국대표로 사역했으며, 1973년~1986년까지 OMS선교회 한국대표를 맡아 수고했다.
서울신학대학교 기획처장으로도 1973년~1986년까지 재직한 바 있다
1949년 내한하여 서울에서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한국 성결교단 최대의 재정 지원자였다
.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인도로 떠났으며 인도와 태국 선교 개척에 공헌하였다
2017년 5월 플로리다에서 97세로 소천 하였다
그의 묘지는 양화진 제1묘역(가-1)에 예정되어 있다. 엘라 롯(Ella Ruth)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어네스트 킬보른(Ernest): 일본과 중국에서 OMS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3세 어니 킬보른(Erniest Kilbourne·1920~1917.11.10)
엘머의 쌍둥이 동생으로 어릴때 한국서 지내다가 오래동안 일본 선교사로 일했다
릴리안 E.비드 앤더슨(安義理 1892.8.15~1934.11)F39
릴리안은 1892년 8월 네브래스카 주 새드론(Shadron)의 퀘이커교도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1915년 오키덴털 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오키덴탈 대학(Occidental college) 재학 시절 켈로그(H. W. Kellogg) 교수가 인도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한국 선교사로 결정된 앤더슨과 1917년 8월 결혼함으로써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다.
1917년 9월에 한국에 와서 서울에서 남편과 함께 1934년 11월까지 전도, 교육, 계몽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남편 W.J .앤더슨 (Wallaoe J. Anderson·1890∼1960)과 함께 안동에서 1917년부터 1922년까지 헌신했다.
그녀는 안동 여성 성경 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의 가장 주요한 사역은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기 위해 청년 면려회 운동을 주창하여
1921년 2월, 경북 안동 교회에서 전국 최초로 청년 면려회를 조직했다
안대선은 교회마다 순회하면서 이 운동을 조직화하고 종래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부터 허가를 받아
1924년 12월 피어선 성서학원 강당에서 각 지방 청년 대표자들을 모아 만국 조선 기독 청년면려회(C.E)를 조직하였다.
그 후 C.E운동은 예장 통합 측에서는 남 선교회 전국 연합회로 개명을 하고
북한 선교에 힘을 기울이던 중 2008년 9월에 평양 봉수교회를 50억을 지원하여 헌당식을 가졌다
릴리안은 1934년 11월 세 자녀를 남겨둔채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그가 오실 때 까지(Till He Comes)”라고 기록되었다
그녀의 남편 안대선 선교사는 1941년 일제의 강제 추방으로 부인을 조선땅에 남기고
세 자녀와 함께 일본을 거쳐 고향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0년 삶을 마감하였다.
앤더스 크리스 젠센( Anders Kristian, 全善,일명 Kris,)가의 묘역
Anders Kristian.Jensen선교사 (1897.3.14~1956.11.20)
마우드 K 젠센(Maud Keister Jensen 1904.9.27~1998.10.12)
클레어 L. 젠센(Jensen, Clair Lee,1929.10.11-1996.2.26)
이 영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앤더스 크리스 젠센(Jensen, Anders Kristian, 全善, 별명: Kris1897.3.14~1956.11.20))
젠센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었다.
1897년 덴마크 네스보그(Naesborg)에서 태어나 1914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하여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코넬대학과 보스톤대학 신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감리교 국내선교부에서 일하다가 1926년 5월부터 미국 감리교의
한국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마우드 키스터(Maud Keister)와 1928년 7월 결혼했다.
젠센 선교사 부부는 결혼 1년 후인 1929년 8월 한국에 들어와
인천, 수원, 이천 등 서울 근교 경기도 지역과 강원도 원주와
동해안의 도시들, 그리고 서해의 섬 지역을 오가는 순회선교사로 일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내한 초기 인천에서 7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34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
. 1년 후 다시 돌아와 수원 인천 원주 서울 등지의 순회 선교사로 시무했다. 1940년 일제의 추방령으로 출국되었다.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하던 1950년 6월 개성 출장 중에 6·25 전쟁을 만난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그날, 젠센 선교사는 개성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당시 젠센 선교사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쟁 발발 하루 전날 개성으로 출장을 갔다가 붙잡힌 것이다.
젠센 선교사는 이후 3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포로교환 협정에 의해 풀려나 1953년 5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오랜 포로 생활과 압록강을 건너 모스크바를 거쳐 미국까지 오는 죽음의 행렬을 겪으면서 심신이 매우 약해졌다.
가족과 재회한 후 젠센은 허약해진 몸을 추스른 다음 미국 전역을 돌며 간증여행을 했으며,
1954년 10월에는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사역을 재개했다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재건하려는 교회에 도움을 주면서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진력했다.
1955년 연세대학 재단이사로 활동하고, 1956년 11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고문단’ 일행과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회담을 마치고 귀가 중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
한국에서도 그는 전국을 돌며 간증과 설교를 하는 등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56년 11월 심장마비로 하나님을 부름을 받아
11월 23일 감리회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마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젠센 선교사는 우리 민족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은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나누었다.
묘비에는 요한복음 15장 13절 첫 부분(Greater love hath no man...)을 기록하고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기록되었다.
매드 K 젠센(Maud Keister Jensen 1904.9.27~1998.10.12)
젠센의 부인인 매드 목사는 1904년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하여 1926년 5월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1928년 7월 13일 A. K. 젠센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딸(Clair Lee)과 아들 필립(Philip,)을 낳았다
후에 아들은 성장하여 미국에서 교수와 감리교 목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
내한 초기에는 인천지방에서 선교하다가 감리회 초기 여성 목사로 안수 받았으며
드루(Drew)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 선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한국에 남아 1969년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녀는 젠센 선교사의 헌신적인 선교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전역의 교회를 돌며
선교 헌금을 모아 서울 정동교회 내에 젠센 기념관을 지어 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정동제일교회에 헌증하였다
젠센 기념관은 교육관으로 학생들을 위한 활동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특별집회나 부인회 등의 모임장소로 제공되었다
선교사직을 정년 퇴임하고 뉴저지 주 매디슨(Madison)에 살다가 1998년 10월 12일 소천하였다
유해는 양화진에 남편 젠센 선교사 옆에 묻혔다.
.
젠센 부부의 딸 클레어 L. 젠센(Jensen, Clair Lee,1929.10.11-1996.2.26).
1929년 10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서울 외국인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미국 뉴저지에서 사회봉사 사업가로 복지와 장애인을 위해 일했다..
1996년 2월 26일 미국에서 별세하여 유해는 양화진 부모 곁에 안장되었다.
브록크만 가(家) 3대의 묘지(B14-16)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6.10 巴樂萬)
어머니 (Mrs. Brockman, W. A. 1840.2.20-1915.3.7)
딸 바바라 브록크만(Brockman, Barbara, 1914-1922))
프랭크 M. 브록크만(Brockman, Frank Marion,1878-1929.6.10 巴樂萬)
1878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였으며, 1902년 조지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네브래스카 오마하(Omaha) YMCA 학생부 간사로 활동했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내한하여 1906년 한국 YMCA 부총무로 봉직하면서 직업교육을 주도했다.)
이 무렵 직업교육은 하나의 새로운 전문직 창출(創出)을 위한 교육이었다.
특히 강연회와 토론회는 산업 교육의 필요성, 과학교육의 필요성, 산업의 기능과 국가 발전,
기업과 사회 발전, 복지사회의 건설” 등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으며 청년들의 사회 참여를 유도했다
1908년 황성기독청년회에서 공동총무로 활동했으며 1914년, 조선중앙 YMCA와 9개 학생 YMCA 등을 포함하여
조선 YMCA연합회(현, 한국 YMCA연맹)를 조직하여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함께 상류 지식층 청년들을 상대로 YMCA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의 초대교회는 주로 못 배우고 가난한 소외계층들이 구성원들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상류층의 청년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크만은 YMCA를 통해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국의 청년들에게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준 인물이다.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전국 21개 학교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회 하기 수련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이 하령회로 인하여 YMCA는 105인 사건과 연루되었고 브룩크만 역시도
.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사(謀事) 했다는 것이다
.105인 사건은 1911년 11월 11일 선천 신성학교 학생과 선생을 검거하여 서울로 압송한 사건 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 지식인과 YMCA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의 조작극이었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인하여 저다인(L. L. Gerdine) 회장은 강제 사면되고,
질레트 총무는 국외 추방되었으며, 이승만 박사는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16년부터 YMCA 협동 총무로서 1922년까지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1919년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23년, 신흥우 총무와 농촌운동을 시작했는데 미국 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1925년부터 10명의 농촌 기술자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파송 받고, 재정 원조도 약속 받기로 하는 등 성공적인 과업을 이룩했다.
그가 주도한 지도자협의회는 농촌운동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다.
1927년, 과로로 인한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했다. 1929년 6월 10일 미국에서 소천하여
프린스턴 신학교 장(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양화진으로 돌아왔다.
묘비에는 '24년 간 한국의 증인 일꾼, 평화의 친구
(For twenty four years in Korea, Seer Builder, Peace Maker, Friend)'라 기록되었다.
.
그의 형 플렛쳐 S. 브록크만(Brockman, Fletcher Sims, 1874-1939)은 중국 YMCA 총무로 활동하면서
1903년 한국 YMCA 창설 자문위원회 특별 강사로 내한하여
1903년 10월 28일 황성 기독 청년회 창설공로자이다.
1905년 동생 브록크만의 한국 파송도 주선하였고 가끔 YMCA 초빙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에 입국하여 지도자 훈련 등에 참여했다.
어머니 (Mrs. Brockman, W. A. 1840.2.26-1915.3.7)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별세했다
어머니(Mrs. Brockman, W. A.)는 1840년 2월 26일 미국에서 출생하여 1915년 3월 7일
한국에서 소천하여 양화진 아들의 곁에 안장되었다.
딸 바바라 브로크만(Brockman, Barbara, 1914-1922)
191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2년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브로크만은 1912년 35세의 늦은 나이에 제시 윌리스 Jessie Willis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두었으나 >
첫딸 바바라 Barbara를 잃고 말았다.
윌리엄 E. 쇼(서위렴, William Earl, Shaw1890.8.22~1967.10.5),가족 묘 F 20
부인 아데린 H. 쇼(Adeline Hamilton,Shaw,1895.7.2-1971.5.
외아들, 윌리엄 H. 쇼(William Hamilton.Shaw,1922.6.5~-1950.9.22)
부부와 아들이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윌리엄 E. 쇼(서위렴, Shaw, William Earl.1890.8.22~1967.10.5),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7.2-1971.5.8)부부 묘비
윌리엄 쇼 선교사는 우리나라 군목제도 창설에 기여했으며, 군 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윌리엄 쇼는 1890년 8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 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대원을 졸업(1927)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 선교사를 자원하여 우리나라에 왔다
.
그들은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감리회 평양 선교부에 배속되어,
쇼 선교사는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하였다
1938년 무어(J. Z. Moore)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하였다
아내 아델린 선교사는 숭덕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쇼 선교사는 평안도 지방은 물론 황해도와 만주에서도 선교 활동을 펼쳤고,
평양에 요한 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도 힘을 썼다.
쇼 선교사 부부는 약 20년 동안 선교 사역을 감당했으나 일제의 강제 추방 조치로 인해 1941년 우리나라를 떠났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쇼 선교사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1947년 다시 들어왔다.
1950년 6·25 한국 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함)
1954년부터는 대전신학교(현 목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전력하는 한편
.외아들 쇼 해밀턴이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자 5,925명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하였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천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 관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 대전 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하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40여년의 선교사역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는 1961년 40년에 걸친 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은퇴하여 미국에서 여생을 살다가 1967년 소천했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1971)선교사는
1895년 7월체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하였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
외아들, 윌리엄.H 쇼 ( William Hamilton.Shaw,1922.6.5~1950.9.22)묘비
윌리엄 해밀튼 쇼(Shaw, William Hamilton)는 1922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진격 해군 장교로 참전 노르망디 싱륙작전에 참가했으며,
해방된 우리나라에 미 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내한하여 국군 해안 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해군에서 제대 후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 공부 중에 6·25가 발발하자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고 한국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다시 입대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에 참전하고, 서울 수복 진두 지휘 중 1950년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당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고 있던 아버지 쇼 선교사에 의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새겨져 있다.
최근 이 감동적인 비문을 제목으로 묘비 탁본과 함께 선교사들의 숭고한 생애를 담은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는 책을 발간하였다(홍성사) 적극 추천!!!
2001년 10월 20일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하여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이 추가로 놓여졌다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 어린이공원'에는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옮겨 놓았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 서화순)는 1943년 해밀턴 쇼와 결혼하였으며
남편이 전사한 6년 후 1956년 감리사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10여 년 동안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 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하였다.
서울 외국인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마우드 S. 그린필드( Maud Saxe,Greenfield, 1874-1910.19) A 29
1874년 미국 뉴욕주 왈덴(Walden)에서 출생했다.
1907년 9월 15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Greenfield, M. Willis)과 함께 내한하였으며,
1909년 정신 여학교 제 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제5대 교장이며 에드워드 H. 밀러(密義斗)의 부인 헨리 밀러(Miller, M. Henry)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9년 9월 한국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시신의 매장 준비(Preparation of the body for burial)"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는 정신 여학교 교장 재임 중인 1910년 1월 5일 아들 그린필드(Greenfield, Willis Saxe)를 낳았지만,
산후 후유증으로 1910년 1월 29일, 출산한지 3주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여성 선교사로서 한 아내와 어머니로 헌신한 그린필드를 사랑 가운데 기억하며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
(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Rom. 8:30)"라는 기록이 쓰여있다.
남편 M. W. 그린필드 선교사 (M. Willis,Greenfield, 權弼斗,權日斗:1881~1917)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소년 시절 캐나다로 이주하여
시라큐스 대학과 어번 신학교(Auburn Seminary)를 졸업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1907년 5월 마우드 그린필드는(Maud E. Saxe Greenfield)와 결혼하고,
그해 9월 15일 부인(Maud Saxe)과 함께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경신 학교 교장과 경상북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180여일 동안 시골 마을과 산길을 6 천리 이상
걸어다니며 경북 북부와 동해안 일대의 넓고 개발되지 못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음을 전한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이처럼 몸을 돌보지 않는 전도여행 탓에 그는 건강을 잃어 1914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경상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밀즈 선교사와 재혼하고
다시 한국에 와 복음을 전하려는 소망을 품었지만 1917. 12월 소천함으로써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1909년부터 1914년 사이에 교육과 전도에 관한 주제로 8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 중에 1913년 10월 선교잡지(The Korea Mission Field)에 게재한
'대구지역 선교사업의 의의와 전망'에 관한 논문에서,
"지나간 세월에 어둠 속에서 지내던 한국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손길을 통하여.
선교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한국인에게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기독교 국가가 이를 때까지 하나님 도움이 계속 될 것이다."라는 어록(語錄)을 남겼다.
그 후 1916년 6월 5일 장로회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양화진에는 그의 첫부인 M. S. 그린필드(Greenfield, Mad Saxe) 여성 선교사가 안장되어 있다.
그 옆자리에는 남편인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선교사의 묘지로 마련되어 있지만, 아직 비어있다
에케르트.F (Eckert, Franz : 埃巨多1852.4.5~1916.8.6) A 8
한국 최초의 군악대 창설자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실레시아 프러시안 지방의 도시인
누로드에서 태어나 브레스라우와 드레스덴의ㅡ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나이세에서 군사음악을 전공했다.
그는 빌헬름스하펜에서 왕립 해군 군악대의 밴드 마스터로 일하던 중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고문으로 초청받아 1879년 3월 일본에 왔으며 이후 20동안 활동했다.
에케르트는 1899년 건강상 문제와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2세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1900년에 그는 조선정부로부터 궁정악단을 조직하고 대원들에게 서양악기 연주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한국 최초의 궁정 군악대를 조직하여 궁정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매주 목요일에는 탑골 공원에서 대중을 위한 연주회도 열었다
고종 임금 제50회 탄신 기념일인 1901년 7월 25일(양력 9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서양 음악으로 연주하여 큰 찬사를 받았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는 한 번 연주되고 정식 채용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으로부터 3품의 작위를 받았다.(태극장 3등)
이 군악대는 1907년 우리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될 때 함께 해산되었다
.
에케르트는 이때 일자리를 빼앗겼으나 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후진 양성에 진력했다.
그리고 1916년 8월 6일 자택에서 인후암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카톨릭 신자로 명동 천주교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였다.
일본국가 기미가요(君代)의 작곡자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그의 부인은 그가 별세한지 5년 후 1920년 독일로 돌아가서 1934년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3남 3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들은 한국에서 출가하였다.
맏딸(아마리 에케르트)은 프랑스 외교관 마르델(Martel, Emile)과 결혼하였으며,
그는 한국에서 불어학교를 설립하고 프랑스어 교육에 힘썼다.
그녀는 한국에서 55년(1894-1949) 동안 장기간 활동하다가 사위 마르텔도 양화진에 묻혔다.
2세 비비안 S.게일(Vivian Scarth Gale1916.2.14-1917.8.7) C21-22
3세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1914-1914) 묘역
비비안은 James S. 게일 선교사와 그 두 번째 부인 아다 루이스 (Ada Louise Sale)사이에서 출생한 2세이다
그들 부부에게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비비안 게일은 둘째 아들로 태어난지 1년 6개월만에 죽어 양화진에 묻었다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은 J. S. 게일의 조카 에손 게일(Esson Gale)과,
헤론-해티의 장녀 사라(Sarah Anne Heron Gale)사이에서 출생한 게일 가문의 3세이다.
출생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바로 앞자리에는 제임스 M. 게일의 외 조부모(外祖父母) 즉 존 헤론과 해티의 묘소가 연계되어 있다.
족보가 좀 복잡하다 ㅎㅎㅎㅎ
J. S. 게일 (James Scarth,Gale, 한국명: 奇一.1863.2.19-1937.1.31)
제임스 S.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 알마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 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 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 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총각으로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성서공회 전임(專任) 번역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주로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요한1서 등을 번역했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신·구약)전서를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 신보로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하였다.
안식년에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898년 4월 다시 내한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 여학교와 경신 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 성교 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 기독 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독 노회장으로 두 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 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 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1922)하여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첫 남편 헤론의 옆에 안장되었다.
게일은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Gale, 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정년 은퇴(1928)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서 중심이었다." 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하였다.
로테 위더스폰( Lottie Ingram Witherspoon Bell(1867.5.13~1901.4.12)A 49
유진 벨의 아내 로테 위더스픈 벨 묘지
미국 남장로회 부부 선교사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1867년 미국 켄터키주(Louisville)에서 신학대학장의 딸로 출생하여. 아우크스투스 여자신학교를 1889년에 졸업했다
1884년 유진 벨과 결혼했고,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로 1893년 임명되었다.
남편 유진 벨과 함께 1895년 4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1895년 4월~1898년 2월까지 서울에서 한국의 풍습과 한국어를 배웠고 1898년 3월~1901년 4월 12일까지
선교 지역이 목포로 변경됨에 따라 우선 마을의 소녀들을 대상으로 가정학교를 시작했지만,
주부 선교사로서 살림과 사역에 어려움이 컸다.익숙하지 못한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겪는 어려움 등이었다.
당시 처했던 상황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의 여동생에게 1899년 2월 보낸 편지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남편이 선교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가사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힘쓰고 있다. 남편을 위하여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나의 선교사역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어려운 일에 자신이 없지만 해야만 한다.
나는 언제나 향수에 젖지만 한국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믿는다.”
결국 그는 심장병을 얻어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일년이 넘도록 외롭게 고생하며 지내다가
그와 한집에 기거하던 의료 선교사 오웬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천했다
이때에도 남편 E. 벨은 전주(全州) 전도 여행 중에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을 치르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유진 벨(Eugene,Bell, 裴裕祉, 1868.411-1925.9.28)
로티의 남편으로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하여 1891년 루이스빌 센트럴 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캔터키 신학대학을 졸업했다.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1895년 4월 9일 부인 로티와 1895,4.9일에 한국에 왔다
그러나 첫 부인 로티가 한국에 온지 6년만에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떠나자 벨 선교사는
우선 아이들을 미국의 누이에게 맡겨두고 다시 돌아와서
1904년 마가렛 불(Margaret Bull, 1873~1919.3)과 재혼하고 본격적인 사역에 돌입한다.
마가렛은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윌리암 F. B.의 여동생으로 버지니아 놀포크 출신이었다
미 남장로회는 전라도 다른 선교사들과의 중복 사역을 피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에 사역을 시작하도록 한다
1908년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시작한 광주 수피아여고를 비롯하여 숭일학교.
목포의 영흥학교 ,광주 기독병원등을 설립하며 목포와 광주를 중심으로 의료와 교육 중심의 선교 사역을 펼쳐나간다
;유진 벨은 광주 제일 교회.양림동 교회등 1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전라도 지역에 기독교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재혼한 아내 마가렛트(Bell Margarlet W.)가 제암리 교회 학살 현장 진상 조사 후 광주로 귀향하다가
병점 건널목에서 열차와 자동차 충돌사고로 1919년 3월 57세로 소천하므로 두번이나 아내를 잃는 슬픔을 겪는다
그는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다가 1925년 광주에서 소천하는데 그의 묘지는 광주 선교사 묘지에 잠들어 있다
딸. 샬롯 벨(Charlotte.I.witherspoon Bell 인사래1899.1.6-1974)
유진 벨과 첫 아내 로티 사이에서 난 샬롯은 어릴때 어머니를 잃고 미국으로 보내져 성장기를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 한국을 방문했고, 선교를 위해 군산에 도착했던 윌리엄 린튼을 만난나 결혼한다
전주 기전여고 전주 신흥고등 미 남장로교가 세운 학교에 교장으로 봉직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40여년간 헌신적으로 선교시역을 감당한다
사위, 윌리암 린턴(William.A.Linton 인돈 1891.2.8-1960.8.13)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 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2세때 한국에 와서 48년간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샬롯과 결혼한 후 부부가 함께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 신흥 학교와 기전 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후 한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전대학을 설립하였다.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였으며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왔다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6년 대전 기독 학관을 설립했고
19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8월 숨졌다.
이런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3대 휴 린튼(Hugh M. Linton,인휴 1926-1984)
윌리엄 린튼과 샬롯 벨 사이의 세째 아들로
미국서 대학졸업후 한국에 돌이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쳣다
고흥 간척 사업 도중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휴의 부인 베티(인애자)도 순천에서 결핵 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이상 결핵 퇴치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 훈장과 호암상을 받았고 지금은 노스 캐롤리나에 머물고 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으며,
4대 스티븐 린튼((Stephen W. Linton 인세빈)
휴 린튼과 로이스 린턴의 둘째 아들이자 유진 벨의 외증손자로 현재 유진벨 재단의 이사장이다
1995년 외증조부 유진벨의 한국 선교사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막내 동생 존 린턴(인요한)과 함께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였다.
유진 벨로 부터 시작되어 윌리엄 린튼 가문으로 이어진 한국 선교 사역은 윌리엄 린튼과 샬롯 린턴의
휴 린튼이 이어 받았으며 휴 린튼과 로이스린튼 사이에 난 둘째 아들 스티브 린튼으로 4대째 이어져 내려왔다
킬브론가 4세 캐슬린.A 킬보른(Kathleen Ann Kilbourne 1950~1950.5.8) D13
E.A 킬보른의 증손녀이자 에드윈의 딸로 단 하루 살고 양화진에 묻혀있다
묘비에는'In his arms'라고 쓰여 있다
킬보른 가(家)의 계보와 선교사로서의 활동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국 성결교회 설립 주역 킬보른 1세
E.A. 킬보른(Ernest .Albert. Kilbourne 길보륜(1865.3.13~1928.4.15)
어네스트.A 킬보른은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독실한 감리교 인으로 성장했다.
시카고에서 전신 기술자로 일하다가 무디 성서 학원을 졸업(1899)하고 목사(1902)가 되었다.
쥴리아(Julia Pittinger)와 결혼하여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902년 8월 직장 동료이자 킬보른을 신앙의 길로 입문케 하여 1902년 감리교 목사 안수까지 받게 한
카우만(C. E. Cawman)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도 사업과 함께
자기들이 시카코에서 공부한 무디 성경 학교를 본받아 성서 학원을 운영하게 된다
1904년 11월 전도관(교회)과 성서학원을 한데 묶어 동경에서
‘동양 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로 약칭)를 창설하였다.
이 때 이 선교회의 목적은 ‘동양 모든 나라에 순복음(Full Gospel)을 전하고자 함이라’ 천명하였다
킬보른은 1905년 동양 선교회 창설자이자 부총재로 일하게 되고 후에 동양 선교회는 성결교단의 모체가 된다
1907년 5월 카우만, 김상준, 정빈과 한국에 2주간 머물면서 서울에 '동양 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했으며
1910년 12월 동양 선교회 지부를 서울에 세우고 ‘만국 사도 성경연합’ 명의로 파송된
영국인 존 토마스(J. Thomas) 목사가 초대 감독으로 내한하였는데 부인이 병들어 얼마 안있어 귀국하였다.
1921년 동양 선교회 제2대 감독으로 킬보른이 내한하면서 한국 성결교회의 조직을 강화시켰다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교파 의식 없이 전도하였으나, 추종자들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1년 전도관을 교회로 전환하면서 ‘조선 예수교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기관지 '활천'을 창간하여(1922)초대 사장을 맡아 교육과 문서 선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4년에는 카우만 초대총리가 서거하자 그를 이어 2 대 OMS 총재로 활동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뒤 5 년만인 1928 년 64 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수백 만금의 돈을 출납하였으나,
나의 소유는 송곳 한 개 박을 땅이 없고, 집도 없고, 화려한 가구도 없고, 생활비로 쓰다가 남은 돈 60$ 밖에 없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다" 라는 마지막 일기로 그의 검소한 생활 기록을 남겼다.
킬보른 2세, E. L.( Ernest Lawson.Kilboune 일명 Bud1891~1980)
E.A. 킬보른의 외아들 로슨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로 헌신했다
1922년 내한하여 서울 성서학원 교수,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고문으로 활동하는 것은 물론
일제 치하 당시에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사참배 강요를 반대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940년 일제의 강압으로 OMS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했다가 1949년 다시 입국하면서
지방순회와 신학교 교수, 그리고 전도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젤(Hazel Williams)과 결혼하여 장남 에드윈 W.과, 쌍둥이로 J. 엘머와. 어네스트 등 3형제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서울과 중국의 미국인 학교와 미국 켄터키 애즈버리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모두 OMS 선교사가 되었다.
3세 에드윈 W. 킬보른(Edwin W.Kilbourne,1917~2015.8.19)
E. A. 길보른의 손자이며 E. L. 길보른의 아들로 1917년 일본에서 태어나서 1920년부터 한국에 와서 살았다.
당시 동양 선교회는 선교 본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겼다.
할아버지 E. A. 길보른은 한국 감독이었으며, 아버지 로슨도 한국에서 선교 활동 하고 있었다
1925년 동양선교회 총재였던 카우만이 세상을 떠나면서 E. A. 길보른은 총재가 되어 미국으로 갔고,
한국 사역은 그의 아들인 버드가 (로슨)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동양 선교회는 카우만의 유언에 따라서 중국 선교에 집중하게 되어,
버드 길보른은 상하이로 갔고, 에드윈과 그의 형제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중국에 가게 되었다.
에드윈 길보른은 상하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애즈베리대학을 졸업하였다
1949년 내한하여 한국에서 서울 신학 대학 교수와 제2대 학장, OMS 부총재 등으로 1973년까지 활동했다.
'세기를 가로지른 다리’(Bridge Across the Century)라는 저서를 남겨
일본, 한국, 중국에서 활동한 동양 선교회의 선교 역사를 정리했다
에드윈의 부인 애드나( Adna 애칭,나누)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수였던 스탠리 마틴(Stanley Martin)의
딸로서 평양 외국인 학교를 졸업했고, 애즈베리 대학에서 에드윈을 만나서 결혼했다.
에드나의 아버지 스탠리 하비랜드 마틴(S. H. Martin)은 세브란스 의대 내과교수(1927-1940)로
결핵 환자의 조기 진단과 치료를 장려하며 봉사하다가 은퇴하였다.
나누의 오빠인 제랄드 마틴은 한국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언니 마가렛 마틴은 감리교 선교사로서 이화여고의 교사로 남편은 제임스 H. 무어(Moore, James H.)
목사로 감리교 지도자와 서울 유니온교회 목사로 활동하다가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에드윈과 나누는 1950년에 한국에서 딸을 낳았는데 하루만에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힌 캐더린이다
3세 엘머 킬보른(Kilbourne, J. Elmer 1920-2017.5.3)
엘마 길보른은 OMS 선교사로 1956년부터 1986년까지
세계구호위원회 한국대표로 사역했으며, 1973년~1986년까지 OMS선교회 한국대표를 맡아 수고했다.
서울신학대학교 기획처장으로도 1973년~1986년까지 재직한 바 있다
1949년 내한하여 서울에서 동양 선교회 성결교회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한국 성결교단 최대의 재정 지원자였다
.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인도로 떠났으며 인도와 태국 선교 개척에 공헌하였다
2017년 5월 플로리다에서 97세로 소천 하였다
그의 묘지는 양화진 제1묘역(가-1)에 예정되어 있다. 엘라 롯(Ella Ruth)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어네스트 킬보른(Ernest): 일본과 중국에서 OMS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3세 어니 킬보른(Erniest Kilbourne·1920~1917.11.10)
엘머의 쌍둥이 동생으로 어릴때 한국서 지내다가 오래동안 일본 선교사로 일했다
릴리안 E.비드 앤더슨(安義理 1892.8.15~1934.11)F39
릴리안은 1892년 8월 네브래스카 주 새드론(Shadron)의 퀘이커교도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했다
1915년 오키덴털 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오키덴탈 대학(Occidental college) 재학 시절 켈로그(H. W. Kellogg) 교수가 인도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한국 선교사로 결정된 앤더슨과 1917년 8월 결혼함으로써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다.
1917년 9월에 한국에 와서 서울에서 남편과 함께 1934년 11월까지 전도, 교육, 계몽 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녀는 남편 W.J .앤더슨 (Wallaoe J. Anderson·1890∼1960)과 함께 안동에서 1917년부터 1922년까지 헌신했다.
그녀는 안동 여성 성경 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사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절대 화내지 않는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의 가장 주요한 사역은 농촌과 산촌을 방문하며 3.1운동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던 청년들에게
복음과 희망을 전하기 위해 청년 면려회 운동을 주창하여
1921년 2월, 경북 안동 교회에서 전국 최초로 청년 면려회를 조직했다
안대선은 교회마다 순회하면서 이 운동을 조직화하고 종래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부터 허가를 받아
1924년 12월 피어선 성서학원 강당에서 각 지방 청년 대표자들을 모아 만국 조선 기독 청년면려회(C.E)를 조직하였다.
그 후 C.E운동은 예장 통합 측에서는 남 선교회 전국 연합회로 개명을 하고
북한 선교에 힘을 기울이던 중 2008년 9월에 평양 봉수교회를 50억을 지원하여 헌당식을 가졌다
릴리안은 1934년 11월 세 자녀를 남겨둔채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그가 오실 때 까지(Till He Comes)”라고 기록되었다
그녀의 남편 안대선 선교사는 1941년 일제의 강제 추방으로 부인을 조선땅에 남기고 세 자녀와 함께
일본을 거쳐 고향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0년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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