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A. 벙커(Bunker, Dalziel A.Bunker, 房巨.1853.8.10~1932.11.28)가의 묘역 A-22
D. A. 벙커(Bunker, Dalziel A., 房巨)는 미국에서 출생하여,
오하이오 주 오벌린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이 무렵이 한ㆍ미조약(1882)이 체결된 후여서 구 한말 조선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필요한 교사를 미국에 요청했다
유니온 신학교는 이에 졸업반인 벙커와 길모어(G.W. Gilmore), 재학생인 헐버트(H.B. Hulbert) 등 세 명을 추천하였다.
이들 세 명의 교사는 미국 북 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 했다.
일행 중에는 엘러스(A. Ellers 나중에 벙커의 부인이 됨.)와 길모어 부인이 포함되어 일행은 5명이었다)
D. A. 벙커는 육영 공원에서 고관 자제들과 관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육영공원이 폐쇄 될 때(1894)까지 8년간 교사로 봉직하였고 그 후 배재학당으로 옮겨 미 감리회 소속 선교사로 활동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1902) 후 배재학교의 학당장이 되어 1911년까지 교육 발전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후임자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인계했다.
그는 종래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 방법을 개선하여 근대 교육을 실시하는 동시에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로운 교육과정을 도입했다.
1892년 3월에는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올랐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그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이 거행될 때 윤치호가 작사한 국가(國歌)를
스코틀랜드 민요 ‘로렐라이’에 맞춰 학생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는 등 한국 최초의 애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옥중(矯導所) 전도를 통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민족 지도자들을 개종시켰다.
1902-1904년 독립협회 지도자 이상재, 남궁억 ,등과 이승만, 신흥우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
이때 정부의 허가를 받아 감옥을 출입하면서 그들의 석방 운동과 인권운동을 펴는 한편,
수감자들을 매주 만나 위로하고 신앙 상담과 예배를 드렸다.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과 과학, 철학, 역사 등 서적을 감옥에 넣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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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옥중 전도와 연계하여 감옥 안에 학교가 개설된 사례도 있었다.
그 당시 투옥되었던 신흥우의 아버지(申冕休)는 아들 흥우가 옥에 갇혀 마땅히 징역을 치를 것이지만 힘에 겨운
일을 시키지 아니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책을 읽게 하고 글도 쓰게 했다”는 ‘獄中開學顚末’이 전해지고 있다.
벙커는 1890년 6월 한국 성교 서회(The Korean Tract Society) 창립 위원으로 활동했고,
그는 초대 서기 겸 회계 및 찬송가 편찬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자신의 선교사역을 계속하면서 성서 보급을 위하여 미국 성서 공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1896년 이후에는 동대문 교회에서 목회 활동도 했다.
1905년 9월 11일에는 교파를 초월한 기구로 “한국 복음주의 선교단체 연합 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를 조직하여 하나의 한국 교회 연합을 지향하는 역사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하여 시해되고 고종 황제는 극도의 불안 상태에 있을 때,
벙커, 게일, 언더우드, 에비슨 선교사가 번갈아 왕실에 들어가 고종 황제를 호위하며
왕의 신변 보호에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그 후 1926년 7월 4일 73세의 노령으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1930년 한국에 잠시 방문하였으며, 1932년 11월 28일 80세로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별세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여 그 부인은 남편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1933년 4월 8일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
날이 새이고 흑암이 물러갈 때까지"'라는 어구가 기록되어 있다
애니 엘러스(Bunker, Annie Ellers, 房巨夫人1860.8.31~1938.10.8)
미국 미시건주 버오크에서 1860년 8월 31일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출생하였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으로 와 달라는 알렌(H. N. Allen, 安連)의 요청과 한국 정부의 초청에 의하여
미국 북 장로회 의료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다음 해(1887년, 27세 때) 미국에서 함께 내한한 육영공원 교사 D. A.벙커와 결혼했다.
한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봉직하면서 제중원 의사, 명성황후 시의(侍醫), 정신여학교 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은퇴하여 귀국했다가 그 후 다시 내한하였다. 1938년 10월 8일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애니 엘러스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제중원 의사로 열심히 봉직하여, 왕실과 고관들의 환영을 받았다.
여성 환자 치료와 간호에 주력하고, 고종 황제의 어의로 활동하던 알렌 의사와 협력하며 황후의 옥체를 진료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는 정3품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계 통정대부(堂上階 通政大夫)의 높은 품계에 올랐다,
그의 글인 ‘閔妃와 西醫’라는 제목에서는 “나는 1888년 3월부터 여관(女官)의 직임을 띠고 나의 본직인 의사로서
황후의 옥체를 시위(侍衛)하게 된 것을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라 하였다.
그는 왕비에게는 손을 대고 진맥(診脈)도 못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황후의 가슴을 헤치고 진찰했다.
이 같은 과정은 1895년 한국학연구지 에 ‘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제목의 글에 자세히 발표되었다.
엘러스는 정신(貞信)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儆新)학교와 더불어
한국 장로교단 최초의 남매 학교이다.
그는 정신여학교 기틀을 마련하고 초대 교장으로 1888년 9월까지 봉직했다.
그 후 남편 벙커가 배재학당으로 옮기게 되어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한국 YWCA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창설에 협력하여 5천엔의 창립기금을 헌금하기도 했다.
1926년, 40년간의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안고 재차 내한했다.
1937년 다시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다가 1938년 10월 8일 서울 정동 그레이트 하우스에서 별세하여
10월 12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경성 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은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라는 정신 학교의 교육 이념이 새겨져 있다.
마리 위더슨 부인( Mary Ann Widdowson 1898,4.4~1956.5.10) A 31
마리 위더슨은 1898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요하네스버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영문 담임사관으로 일했다.
이때 크리스 위더슨을 만나 1926년 약혼하였다.
1927년 가을 한국에 먼저 나간 약혼자 크리스 위더슨과 결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먼 길을 외롭게 떠나
1927년 가을 부산을 경유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결혼했다.
남편(Chris)을 내조하며 선교사로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1934년까지 7년간 한국에 살았으며 이때 첫 아들을 낳았다.
. 고아들과 어울려 자란 아들은 위생이 불결한 상황에서 항상 전염병의 감염과 위협을 면할 수 없었다.
아들과 마리는 발진티푸스로 앓아눕게 되어 그녀는 헛소리를 하며 며칠간을 앓은 적도 있디.
그러함에도 그녀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안고 아이들을 잘 보살폈다
부부는 한국서 7년 봉사하고 1934년 2월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에서 7년간 고아들을 위해 봉직하였다.
어느날 "너희는 이제 전과 같이 젊지 않다. 만약 내가 다시 한국으로 가라하면 어찌하려느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6.25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1953년 1월 19일 부부는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부산으로 다시 돌아 왔다.
6∙25전쟁으로 폐허화된 상황 속에서 구세군을 다시 조직하고 부흥시켰다.( (1927-1934, 1953-1956)
남편 크리스 위더슨은 구세군 사령관으로, 위더슨 부인은 고아원 원장 겸 가정단 총재로 봉직하였다
부부는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헌신하였다.
. 위더슨 부인은 위암으로 투병하며 죽음이 임박했을때 사령관 남편에게
“나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어도 서러워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나는 한국 땅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압니다.”라고 유언 했다.
1956년 5월 10일 서울에서 소천하여. 장례식 때에 이승만 대통령과 김태선 서울시장 등
주요인사 90여명의 조객록이 작성되었다.
남편은 양화진에 묻힌 부인 묘에 두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은 뒤 1957년 한국을 떠났다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은 1865년 영국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 4. 10일 ~ 1912. 8. 20)
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한 기독교의 한 교파이다
성직자를 사관. 신학교를 사관학교. 교인을 병사 혹은 군우라고 부른다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를 함께 실천한다
*자선냄비(Christmas Kettle, Red Kettle)
우리에게 친숙한 자선냄비 모금 운동은 1891년 구세군 사관 죠셉 맥피(Joseph McFee)에 의해 시작되었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던 미국 샌푸란시스코에서 도시 빈민들과 갑자기 당한 잰나으로 인하여 슬픈 성탄절을 맞이하는
천여명의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그는 부두로 나가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거리에 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서 붙였다
"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솥에는 불우한 이웃에게 따듯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기금이 모아졋다
이렇게 시작된 자선 냄비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펴저나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세계 100여개국의 거리에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단 박준섭 (죠셉 바아) 사관이
서울 명동에 자선냄비를 처음 내걸고 불우 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기 시작햇다
구세군 한국 선교는 1908년 호가드 대령부부의 파송으로 시작되었다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구세군 사령관
크리스 위더슨(Chris W. Widdowson, 魏道善)은 1926년 11월 내한하였다.
한국 구세군 사령부에서 중위로 8년간 봉직하다가 1934년 2월에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케냐에서 총무 서기관으로 일하다가 구세군 한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한하여 사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해군 장교 구락부에서
한국 기독교 연합회와 한국사령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주요 업적으로는 첫째 54명의 사관을 배출하고 13개소의 전장부를 신설하거나 재건하였다.
둘째 19개소의 건물을 신축하거나 개수하고, 7개소의 사회사업소를 개설하였다.
셋째, 서울(아현, 마포, 돈암, 영등포 등), 부평, 춘천, 대구, 부산 등지에 급식소를 신설하여
월 평균 5천명에게 음식을 나눴다.
이밖에 245,673명에게 일반구제 사업을 펼쳤으며 영동병원을 통하여 입원 및 외래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한국에서 사별하고 1957년 8월 1일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돌아갔다
윌리암.D. Reynolds 선교사 아들의 묘역 A 46
한국서 태어나 열흘민에 죽은 (1893) 맏아들 (J.W .reynolds)과
76세로 미국서 죽은 둘째 아들 존 볼링 레이놀즈(Reynolds, John Bolling, 李保璘1894.9.20~) 가 묻혀있다
윌리암 데이빗 레이놀즈(William Davis,Reynolds 李訥瑞,1867.12.11-1951)
1867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하여 햄덴 시드니 대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에서도 수학했다.
특히 어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외국 선교를 꿈꾸며 라틴어 희랍어 불어 독어에 통달하고,
1892년 5월에 (Patsy Bolling)과 결혼하고 같은 해 11월 3일 부부가 함께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레이놀즈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미국에서 열린 해외 선교 신학교 연맹 대회에서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온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에 대한 연설을 듣고 그 곳에 있던
레이놀즈와 몇 사람의 신학생들은 크게 감동을 받아 한국 선교를 자원하게 된다
. 하지만 이들이 소속된 남 장로회 선교부와 교회 어디에서도 한국 선교에 관심이 없어서 선교 후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더우드의 친형과 언더우드가 남 장로회에 이들의 선교비 명목으로 3천 달러를 헌금해서
이들은 마침내 1892년 한국으로 7인의 선교사와 함께 들어올 수 있었다.
이들은 레이놀즈 부부를 비롯한 테이트(崔馬太)와 그의 여동생 매티 데이트,
전킨(全緯廉)과 부인 리번, 데이비스 양 등 7인의 남 장로회 개척 선교사들이다.
이듬해 열린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남장로회는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레이놀즈는 전라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레이놀즈는 한국에 도착하여 첫 활동으로 미 남장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893년 1월 북 장로회와 연합하여 공의회를 조직, 초대 의장에 당선됐다.
이 때 공의회의 선교정책은 선교지의 중복과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 구역의 예양 협정(禮讓協定)을 체결하고,
전도 대상자는 부녀자. 청소년을 우선하였으며 성경과 모든 문서는 한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선교지는 호남 지방을 배정 받아 1894년 3월, 전주, 군산, 목포, 순천 등 5대 도시를 순회 전도하였다.
1895년부터 ‘성서 번역 위원회’ 남장로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고, 1896년 전주에 선교 본부를 설치하였다.
1887년 여름 전주에서 다섯 사람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고 교회도 건립하여 호남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895년 성경 번역 위원회 남 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한다.
성경 번역은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 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 성경 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 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이 컸다
레이놀즈는 언어 학자와 성서 번역가로서 게일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1895~1938) 성서 번역에 종사하면서
1900년 신약성서 완역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1910년 구약성서 완역에 독보적 구실을 했다.
레이놀즈는 1011년 독 노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 장로회 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다.
신학 지남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 신학 연구지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 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 교회의 신학 이해와
신앙 영위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목사들의 신학 연구와 위대한 목회자, 설교자가 되도록 도와주었다
이 연구지는 현재까지도 장로회 신학 대학측의 <교회와 신학>, 총신 대학측의 <신학지남>으로 계속 간행되고 있다
1937년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아내 팻시 보링(Patsy Bolling1868.9.28~)
1868년 미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악 애호가로 미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한국적 현모양처로서 대외 활동보다 가정에 충실했으며 남편을 위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손님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존 볼링 레이놀즈(Reynolds, John Bolling, 李保璘 1894.9.20~1970.3.20)
레이놀즈와 팻시 보링의 둘째 아들로 1894년 9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공부한 뒤 1920년 남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내한하여 순천 광주와 전주 신흥학교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시립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70년 3월 20일 테네시에서 75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평소에도 “미국은 제 2고향이고, 한국이 제 1고향”이라고 하면서 한국을 많이 사랑했다.
평생 김치를 좋아했고, 애국가를 매일아침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죽음이 가까워지자 한국에 묻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화장한 유해를 그의 부인이 연로하여 한국에 올 수 없어 소포로 보내졌다.
우체국 검열 과정에서 유해가 ‘화공 약품’으로 오해받아 함부로 취급되고, 유골이 흩어지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 하관식에는 원일한(언더우드 3세) 장로 부부 등 몇 분이 참석하였다
레이놀즈 부부는 두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다
빅터 D. 채핀( Victor D.Chaffin, 蔡彼得, 1881.8.11-1916.6.5)가의 묘역 A 20
빅터 D. 채핀(蔡彼得) 선교사와, 그 부인 안나 B. 채핀(蔡富仁) 선교사
. 안나의 친동생으로 언니와 함께 여성 목사로 사회사업에 헌신한 로사 B. 베어(裵義禮)묘가 있다.
빅터 D. 채핀( Victor D.Chaffin, 蔡彼得, 1881-1916)
채핀은 1881년 미국 인대아나 뉴 하모니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6월 안나 채핀과 결혼하여, 1913년 4월 23일 부인(안나 채핀)과 딸, 그리고 처제(로사 베어)와 함께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1914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소속을 바꾸어 활동했다
1914년 12월 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기,충청노회의 허락을 받아
서울 서부지역과 경기도의 고양, 김포지역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동사목사(同使牧使)로 활동했다.
새문안교회, 양평동교회 등 여러 교회를 순회 시무(관리)하였으며 노회의 총대로 활동했다.
선교 활동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5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했다.
안나 B. 채핀 Anna Bair.Chaffin蔡富仁 1883.9.26-1977 )
빅터 .D 채핀의 부인이자 한국 최초의 감리교 여성 목사로 1883년 미국 아이오와주 매닝에서 출생했다
1906년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1년 간 공부하고 워싱턴 존 플래처 대학 피아노과를 졸업(1911)했다.
빅터 채핀과 결혼하여 딸 모텔을 낳았으며 1913년 딸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1916년 남편과 사별하고 감리회 부인 성경학원 교사가 되었으며 1918년 앨벗슨(Albertson)의 후임으로 원장이 되었다.
안식년(제1차)때 뉴욕 성서 학원에서 신학을 공부(1919-1920)했다.
1920년 한국에 돌아와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안식년(제2차) 에는 콜럼비아대학에서 종교 교육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 《우리 집》선교 잡지 편집인과, 《절제, The Tempreance News》발행인으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1931년 6월 14일 양주삼 총리사 집례로 개성에서 한국 최초 여성 목사가 되었다.
협성 여자 신학교와 협성 신학교가 통합되면서 부교장으로 여성 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만주 신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38년 경기, 충청 지역 여성 선교회와 사회 복지 사업을 관장했다.
그는 “한국 선교 35주년기념 및 회갑연” 과정에서
“내 평생 사업이 여성 교역자 양성에 있으므로, 일생을 바쳐 일한 은퇴 여전도사 안식관 설립”이 소원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1948년 10월 5일 “채부인 기념 여 전도인 안식관”이 개관되었다.
그는 은퇴(1952) 한 뒤에도 감리교 해외 구제 위원회 사업 국장으로 봉직하고,
이화 유지 재단(有夏學園)이사장을 역임(1954-1958)했다.
일평생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오직 선교와 여성 교역자 양성에 헌신했다
1962년 미국으로 돌아가 1977년 소천하여 유해는 양화진 남편 곁에 안장하였다
로사 B. 베어(Blanche Rosa, Bair, 裵義禮 1888~1938.3.10)A-21
로사 B. 베어(Blanche Rosa, Bair, 裵義禮)선교사는 1888년 미국 디모인에서 출생했다.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1913년 감리회 선교사로 언니 안나 B. 채핀을 따라 내한했다
해주, 공주, 인천지역에서 전도 및 여성 사회사업에 종사했다.
YMCA 영어학교 교사로 봉직(1929)했으며 1930년 태화 여자관 관장으로 여성 사회사업을 했다.
그의 언니 안나 채핀과 같은 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천안 지방에서 여성 사회 사업을 위하여 활동(1934-1938)했다.
1938년 3월 10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암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엘리자베스.H. 밀러 (Elizbeth.H.Miller 1840~1919)
환갑이 지난 나이에 아들인 에드워드.밀러와 내한하여 아들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
자신도 연희 전문학교와 서교동 교회에서 교사와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9년 79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아들 부부의 이름도 묘비에 있으나 아들 부부가 죽을때까지 한국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듯
소천하는 해는 기록하지 못하고 그냥 있다
에드워드 H. 밀러(Edward Hughes Miller 密義斗 1873.7.18~1966.6.6)
엘리자베스의 아들 에드워드 H. 밀러는 1873년 미국 펜실베니아 루스벌에서 출생했다.
로스앤젤러스에서 옥시덴탈 대학을 졸업(1898)하고 1901년 9월 10일 어머니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미 북장로회 여성 선교사 헨리(Miller, Mattie Henry)와 결혼(1902)했다.
경신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을 위한 학생교육에 진력(1905-1913)하였으며,
연희전문(연세대)에서 화학 교수와 이사로 활동(1918-1942)했다.
한편 1927년 12~ 1939년 12월까지 12년간에 걸쳐 서교동 장로교회 제3대 교역자(당회장)로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 전도부인 급여를 자비로 지원했으며, 응암교회를 설립하는 등 전도사업을 활성화했다.
교인들을 지도할 영수(領袖)와 서리집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선거를 통하여 임기제로 교인들 스스로 선임하게 했다.
교회를 치리함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격하여 성찬참여나 세례에 철저한 교육이 부족한 자는 참여 시키지 안했다
교인들이 보다 열심히 신앙 훈련을 쌓으면서 한글을 깨우치고 더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행주 교회와 도내리교회 당회장으로도 겸직한 기록(老會錄)이 있다
.
또한 제1회(1911년) 노회부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산하의 경충노회와 경기노회에서
서울을 포함한 경기남부, 청주 동편, 경기 중앙시찰 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공천위원, 목사장립 예식위원, 정사위원 등으로 폭 넓은 노회 활동을 했다.
이 밖에 기독교서회 이사(1934), YMCA 이사 등으로 문서 선교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같은 그의 폭 넓은 선교활동은 일본 당국자들에게 곱지 않게 보여 간첩 염의로 투옥(1941.12.27-1942.5.26)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강제 추방되어 194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저서로는 '천로지남(1914)'과 '예수께서 구원하심'(1938) 등이 있다>
.
그는 귀국한 뒤에도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서 미국에서 한국인을 위한 한국어 방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1966년 6월 6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헨리 밀러 ( Mattie Henry.Miller,1873-1966)선교사
M.헨리 밀러 선교사는 1873년 미국 아이오아에서 출생했다.
1897년 훼어필드 파존스 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까지 무디 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01년 5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어, 1902년 밀러(밀의두) 목사와 결혼했다.
정신 여학교 제5대(1905-1909)와 제8대(1910-1912)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념했다
.
1905년에 찬송가 수 십 곡을 번역하고, 정신학교 교가(校歌)도 작사 작곡했다.
(주: 그후 정신교가는 아담스에 의해 곡이 바뀌고, 박목월에 의해 작사됨
특히 M. 헨리 선교사는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우면서
초학지지,산수 교과서, 등을 편찬하는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의 교육선교 분야에 공헌했다.
1943년 남편과 함께 귀국했다
참고 : 밀러(Miller)라는 이름(姓)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여러 사람이 있다.
첫 번째,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민로아(閔老雅))선교사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 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두번째 휴 밀러(Hugh Miller민휴(閔休))선교사는 1899년 영국에서 내한하여 성서공회에서
성서의 편찬과 반포사업을 주도하면서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양화진 묘역에는 프레드릭 S. 밀러의 부인 "안나 S. 밀러(Anna R. Miller1892.11.15~1903.6.17)와 r
이들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Miller, Fred S., 18980∼1899)가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만에 사망
또한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Miller, Frank, 1902∼1902)도 출생한지 하루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더글러스 B. 에비슨(Avison,Douglas Bray1893.7.22~1952.8.4) (F 46-49)
그 아내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
연세대 의료원에서 세운 에비슨 가족 기념비가 있다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Avison 어비신(魚丕信)1860년 6.30~1956년 8.29)
.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출생하여 6살 때 캐나다 왼스턴에 이주하였으며, 캐나다의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서 교수로 있다가 언더우드의 권유로 조선에서의 선교사역을 결심했다
1893년 한국에 와서 제중원의 4대 원장으로 단순히 선교를 넘어 연희전문학교와 황성 기독교 청년회 등을 통해
1893년 9월 백정 박성춘을 치료해 준 계기로 신분 차별 철폐운동의 효시가 됐을 뿐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도 에비슨 선교사의 헌신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병원과 학교설립 정신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됐다.
한국 의사와 간호사 양성을 위해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하였다( 활동기간 1893. 6~1935.11)
세브란스 초대 병원장을 비롯하여 연합 의학교 초대교장과 연희전문 교장 등
한국의 의료 개척 선교사(1893-1934)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900년에는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한국 의료 선교의 확장을 제창하였다.
이때 오하이오 출신의 석유회사 중역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를 만나 그의 후원금 만 달러를 가지고
제중원을 구리개(銅峴)에서 남대문 밖으로 이전하여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에비슨은 한국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의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서
1899년 제중원 의학교를 개설하였다
이때 제중원에 있던 남대문 교회도 함께 이전하였으며 그는 교회를 열성으로 섬겼다
제중원을 "세브란스"로 개칭하고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1913년부터 세브란스 의전(醫專)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 교장까지 겸직하였다.
1934년 3월 세브란스 의전과 연희전문학교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두 학교 즉 "연세"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32세에 한국에 와서 65세까지 43년동안(1893~1935.11) 선교사로 일하고 1965년 은퇴하고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6년 8월 29일 플로리다 피터스버그에서 96세로 별세하였다.
제자들은 에비슨의 동상을 건립(1928)하였다.
*제니 바네스 에비슨(Avison, Jennie Barnes,1862-1936.9.15)
남편 올리버 에비슨과 아이 셋을 데리고 내한하여 부산 베어드 선교사 집에서 네 번째 아이 더글러스 에비슨을 낳았다.
O. R. 에비슨 부부는 모두 10남매를 낳아 일곱을 키웠다.
.제니 바네스는 1862년 2월 23일 온타리오에서출생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열성으로 조력하였다.
언제나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매력 있고 상냥한 표정으로 손님을 접대하였다고 한다.
1936년 9월 15일 74세로 별세하였다.
더글러스 B. 에비슨(Avison, Douglas Bray1893.7.22-1952.8.4)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의 넷째 아들로 부산에서 출생하여 캐나다에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선천 지방에서 활동(1920-1923)하고 서울로 전임하여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에서 소아과 교수,
부학장 및 병원장 등으로 1947년까지 헌신하였다.
1952년 8월 4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임시 안장하였다가 생존시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1954년 유해를 화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장례하고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묘역에는 제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이 건립되어 있다.
"더글러스 B. 에비슨 선생은 우리 나라에 나시고 일하시고 여기에 무치셨다.
20년 동안 우리 학교에서 몸바쳐 일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셨다.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후학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환자를 대하셨다.
높은 덕 넓은 은혜를 마음에 색이면서 그 유언을 따라 유해를 모신 이 자리에 이 비를 세워 선생을 추모한다.
1953년 8월 4일 세브란스 의과 대학 동창회 세움"
아내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1898.8.10-1985.8.6)
.
<더글러스 B. 에비슨의 부인 캐들은 1898년 8월 10일 캐나다(Claremont)에서 출생하여
남편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자녀로 다섯 딸이 있으며 1985년 8월 6일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양화진 남편 곁에 합장하였다.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Bethell, Ernest Thomas, 裵說 1872.11.3~)묘 A-2
그는 영국 브리스톨(Bristol)에서 출생하여, 머천트 벤처러스 학교 현재 West of England)에서 수학했다.
1904년 3월 4일 영국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지의 특별 통신원으로 임명되어 .
같은 해 3월 10일 러. 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왔다.
그는 1904년 4월 16일자 신문에 경운궁(慶運宮) 화재를 일제의 방화로 다룬
“大韓帝國 宮中의 廢墟化, Korean Emperor's Palace in Ruins)" 제호의 기사를 처음이며 마지막 특종 기사로 실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부동항을 얻는 것이 주목적)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동맹을 체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베델의 일본을 비판하는 기사는 영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1904년 4월 16일 해임되었다
.
해임 사유에 대하여 베델은
당시 한반도의 사정을 직접보고 나니 신문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신원 직책에 사의를 표하였고 크로니클은 나를 해고했다.
그 후 특파원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이를 거절하였다”(베델선생 서거 95주년 기념대회 자료)
그 후 1904년 7월 14일, 대한 매일 신보 창설자 및 사장으로 취임하여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더불어 대한 매일의 한글판과 영자지 창간호를 냈다.
언론인이었던 베델은 '대한 매일 신보'와 영자지인 'Korea Daily News'를 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폭로했다
베델은 양기택,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 지사들을 신문의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에 베델의 '대한 매일 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 보상 운동'의 지원금 총합소로 그 명성이 자자 했다.
더욱이 1908년 4월 17일자 '대한 매일 신보'에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사건을 보도 하였다.
베델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 온갖 간계를 짜내었고,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되어 영국 영사관 고등 법원에서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서 3주간 금고형에 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08년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선동과 일본에 대하여 적대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두 차례 재판에 회부되었다.
상해로 끌려가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지고 6개월의 근신과 4,000만환의 벌금형을 받았다.
이 벌금은 한국인들이 대납했다.
그 후 계속되는 언론 탄압과 영국 정부의 압력, 신문사 간부들의 구속과 경영난 등으로
1908년 5월 27일 신문사에서 물러났다.
이러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심장병)되어 1909년 5월 1일 서울에서 37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1909년 5월 2일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이다.(My fight for Korea is heaven ordained.)"라고 했다.
베델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 매일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고 유언했다
고종황제는 그의 죽음에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天下 薄情之 如斯乎)"라고 탄식했다.
양기탁(梁起鐸)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영국의 남자가 한국에 와서, 한 신문으로 깜깜한 밤중을 밝게 비추었네.
온 것도 우연이 아니건만 어찌도 급히 빼앗아 갔나, 하늘에 이 뜻을 묻고자 하노라
(大英男子 大韓衷, 一紙光明 黑夜中, 來不偶然 何遽奪, 欲將此意 問蒼窮)”이라는 한시를 썼다.
일본의 침략 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인의 의기를 돋우는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1910년 양화진 베델의 묘에 장지연이 지은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일제는 칼로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버렸다
해방 후 20년이 지난 1964년이 되어서야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서 장지연이 지은
원래의 비문을 새긴 작은 새로운 비를 묘지 옆에 세웠는데 지금 양화진에 있는 비문이 이다
비문에는" 드높도다 그 기개여,귀하도다 그 마음씨여“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리고 쓰여 있다
한국정부는 1968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베델의 부인 마리 모드는 신문사가 자금 난에 허덕일 때 사재를 헌납하고 남편이 별세한 뒤에는
모든 재산을 그대로 두고 오직 관을 덮었던 태극기와 영국기,
그토록 사랑하던 한국인들이 전국에서 보내온 만사(輓詞)와 조문(弔文),
남들은 휴지라고 하는 빛 바랜 남편 발행 신문만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외아들과 손자에게 베델의 항일 투쟁사를 가르치며 평생을 ‘한국사랑’으로 살다가
1965년 7월 2일 90세로 별세했다. 양화진에 베델 부부가 합장되기를 희망해 본다.
경건한 장소라 가급적 우리 사진 찍는건 조심했는데 해설하시던 분이
멀리서 오셨다고 굳이 사진을 찍어 주시겠다하여 한장 컷!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4,1-1920.11.12)
27세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두 자녀마저 얼마 있지않아 죽게 된다
간호 양성학교에 들어가며 해외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캠벨 선교사는 그 후 미국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부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1897년 10월 9일 그녀 나이 44세 되던 해에 중국인 양녀 여도라(Dora Yui, 余小姐)와 함께 한국에 온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그녀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 지금의 내자동)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는데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고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캠벨 선교사는 배화학당의 초대 교장으로 1898~1912년까지 봉직했다
미국인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의 기부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정기적인 예배가 드려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종교교회로, 또 다른 모임은 자하교 근처에서 자교교회로 발전하였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 교회와 자교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조세핀 P. 캠벨 선교사 기념비 (배화학원, 종교교회, 자교교회)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span>
1920년 11월 15일 배화 학당장으로 거행되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다
알렉산더 A. 피터스(Pieters, Alexander Albert, 彼得)가족 묘지A-33
첫 부인 엘리자베스 C. 피터스와 재혼한 에바 필드 피터스 선교사 묘가 있다
미국 LA 패사디나 외곽의 ‘마운틴 뷰’ 공용 묘지에 있는 알렉산더 피터즈 목사 묘지.
오른쪽 잘 관리된 묘비 사진은 아르메니안 성경을 번역한 선교사 묘지이고
왼쪽 초라한 돌비만 있는 모습이 피터즈 목사 묘이다.
지난해 (1917년)예 이곳을 애써 찾은 박준서 연세대 명예 교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가 누구입니까? 한국인이 구약 성경을 읽게 해 준 은인이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분을 잊어버리고. 이 분의 묘지도 방치한 채 살고 있어요.
한국 교회가 이렇게 은인을 대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개탄했다 .
박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뒤 제자들과 함께 이달 초 ‘피터스 목사 기념 사업회’를 만들었다.
.
박 교수는 “현지 묘역에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담은 기념비를 세워주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현재 양화진 묘역에 안장돼있는 퍼터즈 목사의 부인인 캠벨 여사와 에바 필드 여사 묘역에도
피터스 목사의 업적을 알리는 피터스 목사 기념 강좌 등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부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가슴에 영언히 기억되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알렉산더 A. 피터스 선교사(Pieters, Alexander Albert, 彼得,1871.12.30-1958.6.29)
1871년 12월 30일 러시아(Ecoternoslav)에서 유태인으로 출생하여 인문고를 졸업했다.
1895년 4월 일본(나가 사키)에서 피터스 목사의 전도와 세례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피터즈로 개명했다.
1895년 5월 16일 미국 성서공회 한국 책임자로 내한했다.
1895년 9월부터 1898년 6월까지 3년 간 ABS 권서 겸 한국 부총무로 활동하면서 빠른 시일에 한국어를 익혔다.
"시편 촬요"라는 제목으로 한국 최초의 구약성서를 발행했다
1900년, 미국 매코믹 신학교에서 신학을 시작하고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04년 9월 미 북장로회 소속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구약 성서번역위원(1906)과 성서개역위원회 임원(1911) 등으로 활동했다.
1913년 황해도 재령으로 옮겼다가 1921년 평북 선천으로 이동했다.
1927년 서울로 돌아와 성서 개역에 참여하고 1937년 구약성서 완성에 공헌했다
.
알렉산더 A. 피터스 선교사는 구약 가운데 <시편>을 최초로 번역하고 구약을 개역(改譯)한 선교사로
미국성서공회(ABS), 영국성서공회(BFBS), 미국북장로회(NP) 선교사로 폭 넓게 활동하면서
특히 성서 번역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은인 선교사이다
1941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8년 6월 29일 캘리포니아에서
소천하여 LA 근교 패사디나 마운틴 뷰 공동묘지에 있다
엘리자베스 C. 피터스(Pieters, Elizabeth Campbell,1872 -1906.1.4)여성 선교사
엘리자베스 피터즈 선교사는 1872년 시카고에서 태어나 노드웨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그녀는 학창 시절부터 해외선교의 꿈을 갖고 있었으며, 1902년 가을,
신학공부를 위해 미국에 온 피터즈 선교사와 결혼했다.
그들은 결혼 후 2년 동안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후 피터즈 선교사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1904년 9월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선교사업을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필리핀에서 얻은 병으로 건강이 악되어 1906년 1월 4일 34세로 사망했다.
그의 남편 A. 피터스는 1930년 “엘리자베스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하고,
크리스마스 실 운동을 전개했다.
에바 필드 피터스 (Pieters, Eva Field, 1868.11-1932.7.20) 여성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 선교사는 1868년 11월 미국 동부지역에서 태어났으나 아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자랐다.
에바 필드는 일찍부터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부기를 배우고 그 일을 경험했으며, 피아노를 공부한 뮤지션이었으며 성경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마지막으로 노스웨스턴대학 여성의학부를 1896년에 졸업했다
1897년 10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여성 독신 의료 선교사로 실드(Shields, Esther)와 함께 내한하여
에비슨 박사의 제중원 에서 여성 환자 진료를 도우며 일했다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1908년 첫 부인과 사별한
A. 피터스와 결혼한후 20여년간 전적으로 복음사역에 헌신했다.
리차드(Richard)와 루벤(Reuben) 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은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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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정신 여학교에서 교사로 한편 서울의 어린이를 보호하는 일에 매우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재령에서는 학생들을 위해 수학 교과서를 집필했고, 수년간 찬송가 편집과 출판 업무에도 종사하는 등
가정과 학교와 교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모든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그녀는 1913년까지는 서울에서, 이후에는 재령과 선천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마지막으로 1927년부터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임상의로 일했다.
그러나 그녀도 불치의 암으로 인하여 그가 봉직했던 세브란스 병원에서
1932년 7월 20일 64세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그의 남편 A. 피터스는 1932년 “에바 필드 추모사업”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치과 수술실을 마련했다.
비문에는 “예수 안에 잠들다.(A sleep in Jesus)”라고 기록되었다.
Marion Boyd Sokes(도마련 1882.12.2~1968.7.7 )가의 묘역
아내 폴린 스톡스(Pauliine David Stokes1876~1953)
아들 Dr. Charles D. Stokes 도익서 1915~1997)
며느리 아레네 A. 스톡스(Stokes, Arlene Amstutz, 한국명: 都愛蓮) 1916.11.19~1968.3.12)
M. B. 스톡스(Stokes, Marion Boyd, 都瑪蓮1882.12.12-1968.7.7)
그는 1882년 12월 12일 미국 남 캐롤라이나 콜럼비아에서 출생하여, 워포드대학을 졸업(1903)하였다.
에모리 대학에서 석사(1923)학위를 취득하고, 에즈베리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1933) 학위를 받았다.
1907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개성에서 대부흥운동에 참여했다.
전도활동을 전개하면서 서울로 확대하는 등 적극적인 전도를 했다.
1919년에는 춘천지방에서 선교하면서 월간지 “世光”을 발행하였다.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다.
1925년 9월, 서울에 상설 중앙전도관을 설치하고 관장으로 취임하여 조직적인 전도와 부흥 운동에 진력했다.
조선주일학교 연합회장에 선임(1934)되었으며, 1935년 1월에는 초교파적인 신앙 잡지
“聖火”의 창간 및 발행인으로 일했다.
일제에의해 강제 출국되어 6·25 한국 전쟁 때 미군의 한국어 통역으로 종군했다.
1968년 7월 7일 미국 북 캐롤라이나 주에서 소천하였다
도마련의 맏아들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파이퍼 대학교 총장이고,
둘째 아들은 교회의 담임목사와 감리사를 역임한 후 감리교 기관지의 편집장을 지냈다.
셋째 아들 맥 스톡스는 저자의 은사로, 에모리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였고 후에는 감독을 지냈다
넷째 아들은 목원대학교 설립자 찰스 D. 스톡스.(도익서 선교사)이다
찰스 D. 스톡스 (Charles D,Stokes, 도익서 1915년 5.11~1997.1.10).
미국 캐롤라이나에서 M. B. 스톡스의 4남으로 출생했다.
에즈배리대학을 졸업(1936)하고, 예일대에서 “한국 감리교회 역사,
”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in Korea(1885-1930)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1947)를 받았다.
이 논문은 한국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행적 등에 관한 중요한 감리교 역사 자료가 되었다.
1940년 부인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바 있으나 얼마후 일제의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47년 11월 미 연합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였다.
한국의 주요 활동 상황은 6·25 전쟁 때에 피난민 구호사업에 힘썼으며,
11952년에는 충북 음성에서 전쟁 고아 구제를 위한 고아원을 설립, 운영했다
.
1954년 대전에서 농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1955년 목원대학을 설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했다.
호수돈여학교 이사로도 활동했다. 1966년 부인과 사별하여 테리(Terry Marlyn)와 재혼했다.
그는 1983까지 40여년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목원대 교수 겸 이사장으로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감리교 교역자를 많이 배출하는 공적을 남기고 은퇴하였다.
박사님은 한국땅에서 잉태되어 고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선교사로 일생을 사시다가 1997년 1월 10일 낮12시
82세에 애틀란타에서 소천 하셨다. 2000년 10월 24일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으셨다
아레네 A. 스톡스(Stokes, Arlene Amstutz, 都愛蓮 1916.11.19~1966.3.12)도익서 선교사의 아내이지 미 감리교 선교사이다
1916년 미국 1940년 6월 대전 목원대학교 설립자(Stokes, Charles D.)와 결혼하고
1940년 7,12일 한국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추방령에 얼마 있지도 못하고 쫒겨갔다가
해방후 1947. 11월 남편과 함께 미 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일본에 잠시 체류하다가, 11월 한국으로 돌아와 피난민 구호사업에 전력하며
대전에서 1966년까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1
966년 3월 12일 저녁 11시 심장 암으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26년간 선교 활동하면서 남편의 선교사업을 내조하고, 구제사업 등에 공헌하였다.
*J. W. 허스트( Hirst, Jesse Watson (許時泰 1864.12.24~1952.4.28)가의 묘역 A43~44
아내 할보 새디 허스트(Hirst, Harbaugh Sadie, 1875-1928)와
허스트 부부의 딸 캐롤(Carol1920.11.15~1924)의 스크롤로 조각된 묘비가 있다
이밖에 허스트 부부의 자녀로서 1907년11월 6일 서울에서 사망한 아미(Hirst, Amy)와
1908년 8월 2일 사망한 조엘(Hirst, Joel)이 양화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J.W.허스트( Jessie Watson.Hirst, Jessie 1864.12.24~1952.4.28)A 43-44
1864년 12월 24일 미국 마사추세스주에서 출생하여 1890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1893년 필라델피아 제퍼슨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0년부터 4년간 제퍼슨 대학에서 조직학, 산부인과 진단학을 강의했다.
1904년 9월 13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같은 해 9월 23일 세브란스(Severance)병원의
새 건물이 신축된 때부터 에비슨과 함께 전담 의사로 봉직 했다.
왕과 고관의 건강을 보살피는 시의(侍醫)와 군의(軍醫)로도 활동했다
1906년 세브란스 간호사 양성학교 설립 때 실즈(Shields)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1907년 9월 9일 ‘한국의료선교사 협회’가 창립될 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의학교육의 전문화 과정에서 산부인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진료사업의 입원실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세브란스 병원장(1925-1927)으로 의과대학 교수로서 의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1934년 3월 30일 많은 공적을 남기고 퇴임했다.
연세대학 교직원과 동창들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허스트 흉상’을 헌정”했다.
그는 남대문교회에서 에비슨 부부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교인들을 지도했다.
귀국 후 북 캐롤라이나주(Durham)에서 거주하였으며, 1952년 4월 28일 플로리다 주에서 별세했다.
그는 남대문교회에서 에비슨 부부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교인들을 지도했다.
할보 S. 허스트( Harbaugh Sadie,Hirst,활보 1875-1928)
J. W. 허스트의 부인으로 미국 일리노이주 록포드(Rockford)에서 출생했다.
1901년 3월 4일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J. W. 허스트보다 앞서 내한하였다.
개성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송도학교 창설에 기여했다
1907년 3월 11일 J. W. 허스트와 서울에서 결혼한 뒤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바꾸고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등 남편의 의료 선교에 협력했다.
1928년 2월 19일 서울에서 53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 바탕의 돌에 대리석을 붙여 꽃병 모양으로 조각된 묘비에는
“일하고, 사랑하고, 고난 받으며, 승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Having labored, loved and suffered she entered into glory triumphantly)”,
“자녀들은 축복의 소산(Her children rise up and call her blessed)"이라 쓰여 있다. "
한편 그 옆 자리에는 허스트 부부의 딸 캐롤(Carol)의 스크롤로 조각된 묘비가 있다.
그는 1920년 11월 15일 4살의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선교사 찰스.A.클라크(Charles.A.Clark) 2세의 묘역 B22-23
맏아들. 버튼 W. 클라크(Clark, Burton winthrop, 1903.4.3-1904.12.21)
둘째 아들. 고든 N. 클라크(Clark, Gordon Neil, 1905.4.6-1905.10.29)
찰스. A. 클라크( Charles A .Clark, 곽안련 1878.11.17-1961.5,26)
미국 미네소타에서 태어나 미네소타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1902)하고,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2년 9월 22일,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뉴욕 출신의 부인(Mabel Craft)과 함께 내한했다
클리크 선교사는 서울에서 승동교회 제2대 교역자(제 1대 S.F.무어)로 봉직하였다((1906~1924)
.
청년 면려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계급 관념과 남녀의 차별 제도를 개선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 무렵 어린 세 자녀를 잃게되어 양화진 등에 안장했다.
그 후 평양 신학교 교수(1916)로 활동하며 실천 신학을 강의하고, 한국 교계의 목회자를 양성했다.
1939년에는 평양 신학교 교장서리를 밑아 신사참배에 저항하다가 폐교당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의 회계(1916), 부회장(1917), 경충 노회장 등으로 봉직했다.
1930년 1월부터 기독교 교육과 아동을 위한《종교 교육》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욥기, 시편의 주석을 편찬하고, 잠언, 전도서, 아가서,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 갈라디아서로
계속 성경의 주석서를 발행했다..
그는 뛰어난 저술가로 1918~1940년까지 신학지남의 발행인과 편집인을 역임했고 50여권의 신학서적을 저술했다
한편 경기 양평의 고읍, 상십리, 묘곡, 고송, 용문동, 마배교회(1913-1915)와,
광주의 신사리교회(1912) 등에서 동사목사로 시무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일제에 의하여 세계 평화 기도문 사건(1941)으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40년 동안 젊음과 인생의 황금기를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힘써 일한 고마운 선교사이다..
1961년 5월26일 오클라호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동료 선교사들은 그를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한국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클라크 박사만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공헌을 성취하는 특권을 누린 사람은 없다"
이처럼 그는 선교사. 목회자, 신학자, 성경주석가. 저술가로 다양을 활동으로
초기 한국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 후 부인 마벨은 1946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곽안련의 두 아들 버튼(Burton)과 고든(Gordon) 은 홍역과 장티푸스로 두살과 한살때 일찍 중어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Clack곽안련 선교사 가족의 기념비
알렌 D. 클라크(Clark, Allen D.곽안전 1908.11.6~1990)
클라크(郭安連)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1908년 11월 6일 출생했다.
미국에서 미네소타 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1933)하고, 1933년 8월 2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인 유지니아(Eugenia Roberts, 전 평양외국인학교 동창생)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1936년 청주로 옮겨 1940년까지 농촌 선교에 몰두하였다.
일제에 의해 1941년 강제 추방되었다가 1953년 11월에 다시 내한하여 1978년까지 모두 35년간 선교사로 헌신했다.
장신대 교수(1954-1965)와 피어선 성경학교 교장과 대한 성서 공회 번역위원 등으로 헌신하였으며, 1990 년 소천하였다.
저서로는《A History of the Church in Korea. 1972》가 있다.
이들 부부의 자녀로서 로버트(Robert)는 평양에서, 도로시(Dorothy)와 캐더린(Kathleen)은 청주에서,
넷째 도날드(Donald N. Clark)는 콜럼비아에서 출생했다..
특히 도날드는 부인 린다(Linda)와 함께 평화 봉사단으로 한국에서 봉사했다.
그리고 텍사스의 트리니티(Trinity) 대학에서 역사 교수로서 한국 교회 역사에 관한 연구와
양화진 묘역에 관한 저서(1984, 1997)를 발간하였다.
C. A. 클라크의 딸 캐더린 (Clark, Katherine Edith, 郭佳全1919~20~)
1947년 10월 28일 북장로회 여선교사로 내한하여 경북 안동에서 의류 구제품 배급을 담당했으며,
한국전쟁으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가 1953년 대구 선교 지부로 전임하여 대구 계명대학 설립에 참여하였다.
1954년 계명 기독 학원 초대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68년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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