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소천으로 급히 한국에 왔고 다시는 한국에 나올 일이 쉽지 않을 듯 하여 한달 여 여유를 두고
악 소리 절로 나는 무더위였지만 국내 성지 순례를 시작하기로 했다
백 십년만의 더위라는 불볕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국내 성지 순레를 마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굳이 이렇게 성지 순례기를 올리는 것은 우리의 고국에 누구나 한번 쯤은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므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성지 순례를 하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관심을 가져주시고 적극 권유하고자 함이다
저 자신도 그러했듯이 그냥 필요한 일을 보거나 친지를 만나고 관광들이나 다니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성지 순례를 하면서 느낀것은 좀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은혜와 감동이 있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눈물과 헌신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 지금의 교회 부흥과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새삼 깨달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감사했다
이제 저와 함께 국내 성지들을 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한다
자료를 준비하고 사진을 정리하고 하느라고 많이 애썼으나 미비한 점이 많은 점 이해해 주시고
주 2회 30회 정도 걸쳐 쓰고자 에상하는데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어 주시기를 바한다.
국내 성지 순례 첫 코스로 도심에 있어 가기 쉬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가기로 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합정역에 내려 조금 가니 묘원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도와 묘원에 안장된 주요 인물 소개와 묘원 지도 그리고 묘원의 역사가 새겨진 판이 있다
총 면적 13,224㎡(약 4,000평), 안장자는 15개국 총 417명 중에
6개국 선교사 90명 그 가족 55명 충 145명이 이 안장되어 있으며 기타 직업인 242명, 미 확인 신원은 30기다.
최초의 외국인 안장자는 J.W.헤론이다
총 15개국 안장자 중에 선교사는 국가별로 남아공, 미국, 스웨덴, 영국, 캐나다, 호주등 6개국이다
안장자를 교단별로 보면 장로교 54명, 감리교 49명, 구세군 15명, 성공회 8명, 기타 교단 및 미확인 19명이다.
양화진 묘원에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128명이 묻혀 있다. 그중 선교사 자녀가 47명이다.
성인들의 경우도 여 선교사가 남 선교사보다 많은데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는 조선 땅에서
선교 사역이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현재는 한국 기독교 백주년 기념 재단의 소유로 관리는 한국 선교 백주년 기념교회에서 맡고 있다
양화진(楊花津)은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송파진과 함께 ‘서울의 5진’으로 불리던 주요 나루터다.
인천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해상 통로의 전진 기지로서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으며
외침과 민란에 대비해 상비군이 주둔하던 주요 군사 기지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출입국 경로는 일본과 인천을 연결하는 해운 항로를 이용하였으나
그들은 인천에서 다시 배를 타고 양화나루까지 거슬러 올라와 육로로 서울 도심으로 들어왔다
선교사들이 선교여행을 할때도 경기, 황해, 평안과 충정.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양화진은 수륙교통의 길목이었다
원래 양화진은 인접한 한강 연안과 잠두봉으로 경치가 아름다워 적벽이나 다름없는 절승지였고
풍류객들이 자주 머물던 곳이었다
구 한말에 이르러 대원군의 병인박해로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자르는 '절두산'이라는 험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중에 절도산 성지에서 자세히 쓰려고 준비 중이다
1890년 7월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이자 고종의 시의, 광혜원 2대 원장으로 있던 존 헤론(1856∼1890)이 사망했다.
헤론은 조선 초기 의료 선교사로 열심으로 환자를 돌보면서 전염병 예방에 힘쓰던 중에
이질로 34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미국 공사관은 조영 수호통상 조약을 근거로 한양 인근에 묘지를 제공해 달라고 조선 정부에 요구했다.
조영 수호 통상조약에는 ‘외국인이 통상지역 안에서 사망할 경우 조선정부는 적당한 장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 관리를 외국인 단체에 맡긴다는 조항이 있었다.
당시에는 도성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는데 그렇다고 무더운 여름철에
인천 제물포항 해안 언덕에 있는 외국인 묘지까지 시신을 운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찾은 곳이 양화진 근방의 빈터로 이때부터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시작되었다
오른쪽에 백주년 기념 선교관과 왼쪽에 양화진 홀 홍보실이 보인다
백주년 기념교회 옆을 지나 올라가니 먼저 봉사관으로 안내한다
다행스럽게도 무작정 갔으나 안내 시간에 맞추어 가서 먼저 봉사관에 들려 영상으로 양화진 묘원에 대한 설명과
주요 안장자들에 대한 그들의 생애와 업적을 약 15여분 영상을 보고 들은 후 안내원을 따라 묘원으로 향하였다
난 남편과 단 둘이 개인적으로 갔으나 고맙게도 안내 시간에 때 맞춰가서 교회에서 단체로 온 듯 스무명 남짓한 인원과
어린 학생들이 열명 정도라 두 팀으로 나누어 묘원 언덕길을 따라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서서히 둘러 보았다
양화진 묘지는 1890년 7월 헤론의 죽음으로 조선 정부의 토지제공으로 외국인들을 위해 조성되어
그 관리권은 국제간의 조약에 따라 외국기관(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한 5개국 공사)이
묘지 위원회를 조직하여 체제를 구축하고 연차적으로 돌아가며 관리하였다
7월 조선 총독부 토지 대장에 과세를 위하여 '경성 미인 묘지회' 라고 등록되어 있으나
경성구 미인 묘지회가 국가로 부터 매입이나 양도받은 근거는 없다
1961년 외국인 토지법 제정으로 외국인은 토지를 소유할수 없게 되었고
1968년 7월 3일에 등록된 그 법적 효력이 소멸되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현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간단히 소개하면 초창기에는 단순한 외국인 묘지로서
1890~1945년 까지는 묘지 조성기와 유지기로 일제 강점기 시기였다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1985년까지 묘원안에 있는 외국인 교회인 유니온 교회에서 관리해 왔으나
여전 방치된 상태였다가 1985년 6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사업 협의회에서
경성구 미인 묘지회로 부터 묘지 소유권을 증여받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재단을 묘지 소유권자로 등기하였다
1986년 10월 10일에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관을 준공하고 서울시로 부터 선교사 묘원 관리권도 인정받아
명칭도 서울 외국인 묘지 공원으로 변경하고 유니온 교회에 관리를 위임했다
양화진이 현재의 이런 아름다운 묘원으로 가꾸어지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어 왔다
여전히 경성 미인 묘지회와 양화진 묘원안의 외국인 교회인 유니온 교회가 관리를 해왔으나
관리 소홀로 인한 황폐와 안내와 관리를 이유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는 행위가 있어 왔고
도심 안에 위치하여 매장이 금지된 곳 임에도 설정법을 어기고 묘지를 예매하고 매매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오랜 세월 한국 개신교계의 무관심으로 외국인 공동묘지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1985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재단으로 소유권이 이전되고 이어 선교 기념관이 지어진 후에도
여전히 유니온 교회가 관리를 맡았으나 이곳은 여전히 한국 기독교로부터 버림받은 곳이었다.
묘원의 황폐화를 보다 못한 100주년 기념 협의회가 국내 주요 교회들에게 묘지 관리 지원을 요청하였을 때에
그들은 ‘연합 사업으로 해야 할 일이지 특정 교단 산하 개 교회로서 지원은 어렵다’는 말로 거절하였다.
결국 100주년 협의회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 관리를 전담할 교회로 "100주년 기념교회"를 세웠고,
정식으로 이름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Yangha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으로 변경했다
백주년 기념교회 성도들의 헌금과 정성으로 가꾸어진 이곳은 한국 기독교 최고의 성지로 변모했다.
이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한 해에 7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찾는 곳이 되었으며,
해외로 파송받아 나가는 한국 선교사들이 조국을 떠날 때 스스로의 믿음을 돌아보기 위해 찾는 곳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성구 미인 묘지회가 2007년 백주년 기념 재단과 백 주년 기념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가슴 아픈 것은 경성구 미인 묘지회 회장인 피터 언더우드와 사무 총장인 존 린턴은 다 양화진에
그들의 선조가 묻혀있는 선교사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저련 주장으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무려 각각 3번의 형사, 민사 소송에서 2012년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소유권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한국 기독교 백주년 기념 재단에 있다고 최종 판결났다
허나 어이없는 것은 예장 통합측에서 오히려 경성구 미인 묘지회 주장을 옹호하는듯 하며
엉뚱한 개입과 시비로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더욱 한심할 뿐이다
페허가 되다시피한 묘원을 아름답게 가꾸고 관리하는 것을 적극 협조하고 격려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만약에 양화진 묘원이 전처럼 폐허로 남아 있고 백주년 기념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그랬을까?
그동안 전혀 돌아보지 않다가 이제 기독교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권리권을 주장하며
목회자 개인에 대한 비방과 음해마저 서슴치 않는 예장 통합 측의 속내가 무엇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지금 양화진 묘역 관리를 맡은 백주년 기념교회는 어느 교단과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완전 독립교회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백주년 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만 묘역을 관리하며
정성껏 가꾸어온 결과 지금에사 성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묘지 입장권도 관리비도 없을 뿐더러 어떤 기념품도 팔지 않는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사유화 할 수 없으며 그에 따라
백주년 기념재단과 백주년 기념교회에서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영구적인 공적 유산으로 보존하기 위해 국가 사적지와 문화재로 지정하고자
마포구와 서울시. 문화재청의 정책에 적극 협조하며 추진하고 있다
*양화진 묘역 최초의 피장자 John W.Heron 헤론(1856~1890)과 가족묘 c21~22
아내: Gale.Harriet G. Heron(1856~1908)
외손자: Gale.James M(1914~19140
헤론은 미국 테네시 주 메리빌대와 뉴욕 의대를 수석 졸업하여 의대 교수 초빙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에 한국에 온다
그가 조선에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수정이 쓴 편지가 실린
선교 잡지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헤론은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를 찾아 선교사 파송을 부탁한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먼저 일본으로 가서 이수정에게 조선 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힌 다음
1885년에 6월 21일 다른 몇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헤론은 이미 먼저 조선에 온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이 갑신 정변으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수술하여 살려냄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궁정 시의로 임명 받게 되어
알렌은 궁정 사람들만 치료하는 서양 병원 광헤원 설립을 허락받았으나
알렌은 일반 백성들도 치료할 수 있도록 탄원하여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1885/4/26)
비로소 일반 백성도 서양 의학의 혜택을 보게 되고 이로써 의료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헤론은 제중원 제 2 대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불결하고 위생 관념도 없어 전염병이 철 따라 돌았는데 헤론은 밤 낮으로 환자 치료에 전력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고 밤에는 성경 번역으로 과로가 쌓여 결국 이질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게 된다
헤론은 그의 병상을 지키는 아내와 언드우드에게
"나의 사역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지만 모두가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묘비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쓰여 있다
헤론의 아내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평소 해론과 가까웠던 선교사로 30세의 총각이었던
게일 선교사와 1892년 재혼하였고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고 헤론과의 사이에 딸만 둘이 있었다
해티는 1907년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와서
1908년 결핵으로 서울에서 소천하여 전 남편 해론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묻혔다
호레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원두우(元杜尤) 선교사 가족묘지( F 24~31)
충 4대에 걸쳐 언드우드 일가 7명이 잠들어 있다
가족묘의 비문에는 "언드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례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호레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원두우(元杜尤)1859.7,19~1916.10.12)
그의 부인,(Lilias Stirling Horton 릴리어스 홀튼 ) 1851,6,21~1921.10,28
언드우드 2세 아들(Horace Horton Underwood 원한경 元漢慶).1890.9.6~1951.2.20
2세 며느리(에델 V. 와그너(Edhel Van Wagoner )1888.4.11~1951.2.20
언드우드 3세 손자( Horace Grant Underwood 元一漢 원일한) 1917~2004.1.15
3세 손자 며느리 (Joan Vida Davodson 태요한) 1915.9.19~1976.2.2
언드우드 4세 증손자 며느리(Gale Clarke) 원일한의 셋째아들과 결혼하였다 1955.3.25~ 2000.6.15
언더우드 가족과 원요한 선교사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호레스 G.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원두우(元杜尤)1859.7,19~1916.10.12)와
그 부인 릴리어스 홀튼 (Lilias Stirling Horton 호돈·好敦 합장)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선교사는1859년에 런던에서 출생하여 1872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 대학과 뉴 브른슨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북장로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에 부활절에
26세의 나이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8세 연상의 의료 선교사 릴리어스 호튼(1851∼1921)과 결혼했으며,
신혼 여행을 전도 여행으로 다녀올 정도로 선교 열정이 컸다.
1886년 고아원을 설립하여 경신학교로 발전시키고 1887년에 최초의 장로교인 새문안 교회를 창립하였다
1897년에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였고 1889년 한 영 사전을 편찬하였다
1890년에 성서 공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6년 10월 12일 미국에서 사망하여 Union Hill 에 묻혀있다가 유족의 뜻에 따라 1999년 5월20일에 양화진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묘비명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언드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는 1851년 6월에 미국에서 태어나서 1883년 3월에 독신으로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광해원 제 2대 부인 과장과 민비의 시의로 사랑의 인술을 펼쳤으며
유치원을 세우기도 하였다
1889년 3월에 언드우드와 결혼하여 선교 여행겸 신혼 여행으로 북한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저서로 "한국의 언더우드"를 집필하였고 1921년 10월 28일에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언더우드 2세 호레이스 홀튼 (Horace Horton Underwood 원한경·1890∼1951).
1912년 미 북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3.1 운동때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을 세계에 폭로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고
1934년에 연희 전문학교 3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42년에 추방 당하였다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한국에 와서 미 군정청 하지장군 고문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에 연회 대학 명예 총장으 추대되었다
1948년서울서 아내가 공산주의자에게 피살되는 아픔을 겪고 미국으로 갔다가
1950년 10월에 한국전에 참전한다
1951년 부산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아내 곁에 안장되었다.
에델 V. 와그너(Edhel Van Wagoner1888.4.11~1951.2.20)
언드우드 2세 원한경의 부인으로 1988년 미국 미시건에서 출생하여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1912년 서울 외국인 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16년 12월에 원한경과 뉴욕에서 결혼하였다
연회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3월 17일에 공산당 청년들의 총에 피살되었다
그의 비문에는 "활발하고 다정하고 의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3세인 손자 호레이스 그랜트 (Horace G. Underwood원일한·1917∼2004)
191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 해멜턴 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1939년 8월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연세대 교수, 도서관장, 총장서리와 재단이사로
한국교육 발전과 한 미 우호에 힘썼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인으로 자원했고 정전 회담 실무자로 참여했다.
새문안 교회 장로. 성서공회 이사,6.25 전쟁때는 해군 대위로 참전하였고 정전 협정때는 수석 통역 장교였다
2004년 87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부모와 부모, 아내가 잠든 양화진에 묻혔다.
언더우드 가족을 추모하는 기념비엔 이런 글이 있다.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한결같이 이 겨레와 교회를 위해 이 땅에서 그들의 생애를 바쳐오고 있다.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죠안.V.데이비슨 (Joan Vida Davidson Underwood (태요한 1015.9.19~1976.2.2)
원일한 박사의 부인이자 언드우드의 손자 며느리인 서울에서 출생하여 연세대와 외국인 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녀의 비문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러"고 적혀있다
1919.3.30 서울에서 출생하여 1994.3.22.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서거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묘는 미국에 있다.
원요한 선교사는 1947-1991년 까지 44년간 청주 성서학원과 광주 호남신학대학에서 활동 하였다.
원요한의 부인 진 웨치(원진희) 역시 호남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1994.3.22.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서거 양화진에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언더우드 증손자 며느리인 게일 클락은 언더우드 4세 피터(Peter A. Underwood, 원일한의 셋째 아들)의 부인으로
교사로 헌신하였으며, 2000년 6월 15일 별세하여 양화진 언더우드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무더위에 땡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다니느라 엄청 고역스런 내 짝궁 ㅋㅋㅋ
양화진 어린이 묘역
스크랜튼.M.F (Sceranton,Mary Fletcher Benton 1832.12.9~1909.10.8) B44~45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함께 온 며느리 스크랜턴 부인과 구별함)은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출생하여, 1855년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였고, 외아들을 낳았다.
40세에 남편과 사별한 후 미 감리회 해외 여선교회 연회의 서기로 봉직했다
그녀가 53세의 늦은 나에에 1885년 2월 3일 외아들 내외와 두 살 된 손녀, 아펜젤러 가족 일행과 함께
미 북감리회 첫 여선교사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한국의 국내 사정으로 인해 잠시 일본에 머문 후 6월 20일 내한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 주로 버려진 아이들과 첩들로 학당을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이방인에 대한 불신과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차츰 학생수가 늘어나고 조정에서도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할 정도가 되었다
수업은 한글과 영어로 기초 과목과 종교과목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양성해 나갔다
이화 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 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 제일교회 초대 여성 교인은 거의 이화 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 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 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 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또한 그녀는 당시 근대 의료 시술을 받기 어려웠던 한국 여성들을 위해 미국 감리회 지원을 받아
1887년 서울 정동에 병원을 세우고 여의사 메타 하워드(1862∼1930)를 초빙, 여성 진료를 시작했다.
이듬해 고종 황제는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의미의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그 이름처럼 질병과 인습에 고통 받던 많은 여성들을 보호하고 구했다.
보구 여관은 여성 의학 교육의 최초 현장이기도 했다.
1892년 보구여관 의사 로제타 홀(1865~1951)이 다섯 명의 조선 여학생을 선발해 의학 교육을 시작했으며,
1900년 볼티모어 의대를 졸업한 한국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김정동)가 탄생됐다.
현재 이화대학 부속병원의 시초가 된 이 (보구여관이 (1887~1912)~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1912~1930)~
동대문 부인병원(1930~1945)~ 이대 동대문 병원(1945~2008),~이화 의료원(1973~)으로 이어진 130년의 역사가
오늘날 약 4300명의 의사를 배출한 최고의 의과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당시.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 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화 여고와 이화 여자 대학의 전신인 이화학당과 수원에 위치한 매향 여자 정보 고등학교의 창설자이다
. 1891년에 이화 학당장 자리를 로드 와일러에게 물려주고 미국에 안식년을 다녀온 후 부터
그녀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직접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전도 부인’을 조직하여 동역하였다.
스크랜턴 대부인이 1898년에 쓴 보고서에 보면 모두 8명의 전도 부인들이 그녀와 동역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전도 부인은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 53세의 늦은 나이에 조선에 들어온 스크랜턴 대부인은 24년간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 교육에 진력하다가.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 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6년 이화대학에서 오늘의 이화를 있게 한 5인의 스승을 기념하는 비를 스트램튼 대부인 묘역에 세웠다
이화의 창립자로 초대 당장인 메리 F. 스크랜튼, 3대 당장 조세핀 O. 페인, 당장서리 메리 R. 힐만,
제6대 교장 앨리스 R. 아펜젤러, 이화 의료원의 전신이자 우리나라 최초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 2대 여성 의료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메리.R. 힐만(Mary..R. Hillman 1870.4.21~1928.2.2) B 42
힐만 선교사는 1870년 4월, 미국 오하이오 주 뉴아크에서 출생하여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한 후
프로테스탄트 병원에서 1년간 간호사 교육을 받았고,
뉴욕에 있는 폴츠선교사 학교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미혼의 몸으로 1899년 12월 31일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1900년 초부터 제물포 여성 선교사회에 소속되어 여성을 위한 성경공부 지도에 힘썼다
이화학당 당장 서리로 일하며 여성 교육과 선교에 힘썼다.
특히 그녀는 강화, 삼산, 교동, 해주 지역까지 방문하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된 후에는 사경회를 열고 모세와 여호수아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는 등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1916년부터는 원주 선교부에서 강릉 지역까지 오가며 선교활동에 헌신했다.
힐만 선교사는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탓에 건강이 나빠져 1922년부터는 조선 예수교 서회에서 신앙서적 번역 업무
담당했으나 과로로 인한 병으로 인해 1928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
*윌리암 B. 스크랜톤(Scranton, 施蘭敦 시란돈1856년 5. 29~1922. 3)
스크랜튼 대부인의 외아들로 1856년 미국 코네티컷 뉴해븐에서 출생하여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다.
루리 W.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여, 오하이오주 개업의사로 활동(1882-1884)하다가,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1885년 6월에 내한했다.
한국에서 왕립병원(제중원)의 봉사를 시작으로, 1885년 9월 10일 최초의 민간병원 ‘정동병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으로 의료 활동을 했는데. 제중원에 이어 두 번째 병원이었다.
1886년 6월 병원 시설을 확장했으며, 1887년 고종 임금은 “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0년에는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을 설립하고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
선교부에서는 미국 감리회 조직을 위해 앞장섰고, 회계와 선교부 관리자로 서울 경기 지역의 감리사로 폭 넓게 활동했다.
성서 번역 위원으로 위촉되어 성서 사업에도 공헌했으며, 로마서 에베소서를 주로 번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190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감리회 선교연회’에서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독자적 의료 활동에 힘썼다.
만년은 일본에서 보내다가 코베에서 1922년 3월 쓸쓸히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코베 캇가노 묘지에 묻혀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아직 양화진에 안장되지는 못했다.
3대에 걸친(Hall Sherwood 1893~1991)가의 가족 묘역(C18~19)
*1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16~1894.11.24)
*그 부인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wood Hall 허을(許乙)1865.9.19~1951. 4. 5, ),
*2세 아들 셔우드 홀(Shewood Hall 1893.11.10~1991.4.5), *
그 부인 메리안 B,홀(Marian B.Hall 1896~1991)
*미국서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로제타의 품에 안겨 한국에 왔지만
3살에 죽어 양화진에 묻힌 딸 에디스 마가렛 홀(Edith Margaret Hall)
*셔우드 홀의 쌍둥이 중 프랭크가 하루를 살지 못하고 이 땅에 묻히므로 여섯 식구의 가족 묘역
제 1대 윌리암 홀(William.James.Hall William James Hall 1860~1894.11.24),
카나다 온타리오에서 출생하여 퀸즈의대와 뉴욕을 졸업하고 미 김리회 의료 선교부에서
빈민가 의료선교를 하다가 로제타와 약혼했다
1890년 로제타가 먼저 한국 선교사로 퍄송되었고 제임스도 중국 선교를 접고
약혼녀가 있는 한국으로 1891년에 들어온다
한국으로 와서 1892년 6월 서울에서 최초의 서양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로제타는 서울에서 남편 제임스는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가끔 만났는데
1894년에 평양에 가정을 꾸며 병원과 교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난 다음에 윌리엄은 로제타를 두고 최초의 평양 의료 선교사로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사역하던 중에
전염병에 걸려 한국에 온지 불과 3 년만에 둘째를 임신한 아내 로제타를 두고 숨을 거둔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9.19.~1951년.4.5)
부인 로제타 홀은 1865년 뉴욕에서 출생하여 펜실바니아 의과대학을 졸업사고 26세의 처녀로
1890년 10월에 미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일년 후 뒤따라 온 약혼자 윌리엄과 1892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선교초기에는 간호사를 양성하고 스크랜톤이 경영하는 상동시 병원에서 의료활동을 하였다
결혼 2년 반만에 남편 윌리암이 죽어 불과 29세의 나이에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딸 에디스를 낳은 후 두 아이를 데리고
윌리엄이 이루지 못한 조선을 향한 사랑을 내가 이루리라 결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1898년 평양에 광혜여원을 설립하고 미국서 배운 맹인 점자로 맹인 교육을 실시하여
평양 맹아 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또한 홀의 기념병원인 기홀 병원을 평양에 설립하기도 했다
이 병원은 북 장로회가 운영하던 평양 제중원과 통합하여 1920년 평양 기독병원이 되었다
그녀는 스크램턴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여성전문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한국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진료를 시작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찾아 직접 성 밖으로 왕진을 다녔다.
또한 당시 천민과 농민들이 주로 살았던 동대문 지역에 부인병원을 세워 동대문 바깥에 사는
소외된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의료 사역을 다져가며, 수도권 일대에서 강습회와 무료 진료를 계속해 나갔다.
그 당시 로제타 홀이 운영한 동대문 부인병원은 현재 이화여대 목동 병원이 되었다.
로제타 홀은 한국에 도착하면서부터 마음에 품었던 최초의 한국 여성의료인 양성도 시작한다.
이화학당에서 생물학과 약학 등을 가르치며, 여성 스스로 교육과 의료에 눈을 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중 수제자처럼 데리고 있던 박에스더를 미국 볼티모어 의과 대학에 입학시켜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직접 여자의학전문학교인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세워 6명의 여자 의사를 처음으로 배출해낸다
경성 여자 의학강습소는 경성 여자 의학전문 학교로 승격된 후,
고려 대학교에 병합되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로제타 홀은 전적으로 한국 여성을 위해 한국 여성이 스스로 교육을 받고,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간 것이다.
로제타의 유복자인 딸 에디스도 이질에 걸려 죽고 마는데
그녀는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그녀의 헌신은 43년 계속되었다
그녀는 4권의 일기와 2권의 육아일기를 남겼는데, 그 속엔 고난 속에서도 조선 백성을 위해 헌신했던
여 선교사의 삶이 생생하게 녹아있다
1940년 한국을 떠나 1951년 4.5일 85세로 뉴저지에서 소천하고 유해는 화장되어 양화진의 남편 곁에 뿌려졌다
양화진에 묻힌 그녀의 묘비에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셔우드 홀(Shewood Hall 1893.11.10~1991.4.5 )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 사이에 태어난 아들
대한 결핵협회에서 1993년 셔우드 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양화진에 공적비를 세웠는데
비문에 그의 생애와 한 일이 다 담겨 있으므로 설명을 생략하겠다
"캐나다인 셔우드는 1893 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자라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 퇴치에 헌신할 것을 결심
토론토 의대 졸업 후 역시 의사가 된 메리안 버텀리와 결혼하여 1926 년 함께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해주 구세병원에 부임했으며 한국 최초로 1928 년 근대적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고
1932 년에는 크리스마스 seal을 발행했다
1940 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 될 때까지 결핵환자 치료와 seal발행을 계속했으며
한편으로는 모범농장을 일구어 새 영농기술을 보급하고 의창 학교교장으로서 교욱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2대에 걸쳐 한국인에게 봉사한 공을 찬양해 1984년 한국 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서울시에서는 명에 시민증을 수여했다"
1940년 일제는 셔우드 홀이 크리스마스 실로 독립자금을 모았다는 누명을 씌워 간첨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겨우 풀려나 한국을 떠나게 되고 미국 선교 본부로 부터 인도에 의료 선교사 파송을 받아
인도에서 1963년까지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그가 한국서 활동한 기간은 1891.12~1894,11,24 일까지이다
1991년 4월 5일 98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4월 10일 리치먼드 사우스 암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4월 17일 대한결핵협회 장(葬)으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홀 가문의 4명의 선교사역 기간을 합치면 무려 79년이다
아펜젤러 가의 가족 묘역 (B 37 C 11~12)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1858.2~1902.6.11)가묘(기념비)
2세 아들 헨리 닫지 아펜젤러( Henry Dodge Appenzeller 1889.11~1953.12.1)
며느리 루스 노블 아펜젤러(Ruth Noble Appenzeller(1894.6.14~1986.11,25)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seller 1885.11.9~1950.2)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1858.2~1902.6)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프랭크 앤 마셜 칼리지를 졸업한후 감리교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를 수학하고 1885년 미 감리교 선교사로 결혼 두달 만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장로교 선교사인 .H.G 언드우드와 함께 제물포 항에 첫발을 딛었다
한국에 첫 발을 내딛고 아펜젤러와 언드우드가 드린 첫 기도가 선명하게 묘비에 쓰여있다
그는 신학문에 뜻을 두고 교육사업을 시작하여 고종황제가 친히 이름과 현판을 하사하여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학교인 배재학당(1886.6.8)과 한국 최초의 감리 교회인 정동 제일교회(1887.10.9)를 설립하였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 등을 강사로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아펜젤러는 출판 분야와 성서번역 분야에서 두드러진 공헌을 하였다.
그는 배재학당 안에 삼문 출판사라는 인쇄소를 만들고, 기독교 소 책자들과 독립 신문등 일반 신문도 인쇄하였으며 ,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더불어 성경 번역위원회를 최초로 조직해서 한글 성경 번역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언더우드 게일과 함께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였다
또한 한국 문화 연구와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2년 44세때에 성서 번역 위원회 참석차 배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목포로 가던 중
서해 해청도 군산 부근에서 해상 충돌사고를 당하여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하여
차가운 바다에 시신을 찾지 못하고 현재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는 가묘이다.(한국 활 동기간 1885.04.05~1902.06.11)
같이 성서 번역일을 하던 J,S,게일 선교사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 바쳤다 .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H.G 아펜젤러의 자녀들도 교육 출판 성경번역의 선구자였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교육과 선교에 헌신했다
2세 아들 헨리 닫지 아펜젤러( Henry Dodge Appenzeller 1889.11~1953.12.1)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1911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915년 Drew 신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뉴욕대서 M.A 학위를 받고 1917년 9월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감리교 선교사인 부인과 함께 한국에 왔다
인천지방서 3년간 활동하다가 1920년부터 20년간 아버지가 설립한 배재학당 교장으로 헌신했다.
학생들에게 신앙과 애국심을 강조해 한때 일제로부터 교장 인가를 취소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1919년 11.6일 미 감리회 한국 연회 서기로 피선되어 1924년까지 연임하였다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 찬송가 개정 작업에도 동참하여 1931년 신정 찬송가 발행에도 공헌했다
1953년 12.1 백혈구 부족으로 인한 건강이 악화로 미국에서 치료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데, 임종 전
“나를 한국 땅에 묻어주고 아버지께서 조선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로 하여금 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겨 1954년 10.18일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동교회서 사회장으로. 거행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H.D 아펜젤러 부인 루스 로블 아펜젤러(Ruth Noble Appenzeller 1894~1986.11.25)
루스 는 1892년 미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재학당과 평양지방 감리사로 1943년까지 활동했던
노블 선교사(Nobel Wiliam Arthur)의 딸로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양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서 중.고 대학을 공부하고 H.D 아펜젤러와 미국서 결혼했다
1917년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같이 감리교 선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에 의해 1941년 강제 출국당했다
1950년 세계 봉사회 한국 지부 대표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다시 한국으로 와서 1962년 까지 정동에 있는
감리교 선교사 게스트 하우스 핵임자로 봉사하였다
정년 후에 재혼하여 미국에 살다가 1986년 사망하여 1987년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동 교회서 장례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묘역에 안장되었다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seller 1885.11.9~1950.2)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 선교사 자녀다.
군산 앞바다에서 부친이 선박 사고로 순직할 때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 웨슬리 대학을 졸업하고 30세인 1915년에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인재 육성에 주력했던 그녀는 이화학당을 이화여자 전문 학교로 승격시키고 교장으로 일했다.
1939년에 한국인 김활란 박사에게 총장직을 물려주고 1940년 일제의 탄압으로 잠시 한국을 떠났다가
194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명예 총장으로 일하다가 1950년 학교 체플 시간에 쓰러져 순직하였다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陛仁, 1869.2.21~1909.9.25)
페인 선교사는 1869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했다.
그녀는 고교를 졸업한 즈음에 아펜젤러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 조선의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
이후 페인은 1892년 보스턴 선교사 양성소를 졸업한 직후 미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이화학당 제3대 교장(學堂長)으로 재직(1893-1971)하면서, 한국 최초의 생리학 교과서를 프라이(Frey)와 공동저술하고,
교과 과정을 정비했으며, 15년간헌신적으로 수고했다
페인은 산수 등 기존 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했다.
학당장 재임 중 ‘나라가 튼튼하려면 몸이 튼튼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체조를 정규 교과로 가르쳤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조약의 부당성을 미국 조야에 알리는데 힘쓰는 한편
학교에서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1907년 이화 학당장을 프라이(Frey, Lulu E., 富羅伊, 1907-1921)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인천, 평양, 서울의 기독교 학교의 관리와 전도를 위한 선교 활동에 주력했다.
열정적인 설교와 수백리 험한 길을 마다 않고 걸으며 한 전도는 감동을 주었으며 여성 해방 운동에 공헌했다.
페인 선교사는 1909년 해주에서 과로로 쓰러진 후 콜레라에 감염되어 그해 9월 25일 소천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1857-1898) 가족 묘역
양화진 제1묘역 ‘자열’에는 대리석 둥근 기둥에 넝쿨 장미 문양을 아름답게 조각한
양화진에서 제일 높이 솟아있는 묘비가 있다.
이 묘비는 인천지역에 거주했던 중국 상공인들이 졸리를 추모하며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왼쪽에는 졸리의 부인 클라라(Joly, Clara Agnes Lillie)가 안장되어 있다.
또한 그 중앙에는 졸리 부부의 막내딸 릴리안 A. 휘트만(Whitman, Lilian Agnes Joly)이 안장되었다.
당초 헨리 B. 졸리의 묘는 인천에 있었다가 1950년대 중반 양화진으로 이장되었다.
릴리안 A. 휘트만은 1968년 별세하여 남편 휘트만에 의하여 양화진 졸리 묘역의 부모 묘 가운데 안장되었다.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1857-1898)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는 1857년 터키(Smyrn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국 외교관인 영사로 중국 상해에 있다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부임하여 주한 영국 영사로 인천에서 활동했다.
1896년 영국 작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방문하였을 때는 그의 안내로 한국의 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98년 별세하여 처음에는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 후 딸 릴리안에 의하여 부모의 유해를 1950년대 중반에 양화진 제1묘역(자-7)으로 옮겼다.
묘비에는 “Now rests in Peace, perfect peace. not having died but only gone before in 1898
(이제는 평안, 완전한 평안 속에서 안식한다. 죽은 것이 아니라 1898년이 가기 전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뿐이다)”
라고 기록되었다.
*아내 클라라 A. 졸리(Joly, Clara Agnes Lillie1860~1928.3.28)
1860년 1월 1일 출생하였다. 주한 영국 영사 헨리 졸리와 결혼하여 인천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한국에 머물면서 순종(1907-1910)이 왕세자로 있을 때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1927년까지 살다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아들을 찾아 1927년 이한하였다.
그 후 북경(Peking)에 있는 또 다른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1928년 3월 28일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 릴리안 A. 휘트만(Whitman, Lilian Agnes Joly 1896~1968)
죨리 부부의 막내딸로 서울에서 석유회사 사무원으로 1920년대까지 일하면서 휘트만(Grant Whitman)을 만나
1927년 서울에 있는 영국 성공회 당(Anglican Cathedral)에서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ㆍ일 스탠다드 석유회사에서 기독 실업인으로 30년간 일하다가 퇴직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매릴랜드의 베데스다(Bethesda)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릴리안은 1968년 별세하였다.
그가 별세하자 남편 그랜트 휘트먼은 부인 릴리안의 유해를 양화진으로 운구하여
그 부모가 묻혀있는 졸리 가족묘지에 안장하였다.
비문에는 “Lord in thy mercy grant us safe lodging and a holy rest and peace at the last
(주여 당신의 긍휼로 우리를 받으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거룩한 안식과 평안을 주옵소서)”라 쓰여 있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 (Hulbert ,Homer B.1863.10.26 ~1949.8.5 허활보)B-7
난지 일년만에 죽은 그 아들이 묻혀있다
호머 베절릴 헐버트 (Hulbert ,Homer B.1863.10.26 ~1949.8.5 허활보)
1863년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884년 디트마우스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교 재학중에던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育英公院) 영어교사로 내한하였다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 공원의 운영과 교육 내용 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한 헐버트는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는데 이 책은 많은 학교에서 필수교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5년동안 교사생활을 한 후 학교가 문을 닫자 귀국했다가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다
그는 한국 땅에서 머물며 선교사로.교육자로, 언론인이자 저술가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아 최 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대한제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1907년 헤이그 비밀 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 활동을 하였고
후에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순회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기회가 있을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루즈벨트의 대한 정책을 비판하며 한국을 잊지 않고 돕는데 앞장섰다
고종활제의 신임을 받아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대한제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 활동을 하였고 3.1 운동을 지지했다.
정부에서는 1950년 외국인 최초로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헐버트는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를 중심으로 문서 선교에 관여하여 한국을 알리고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학장을 맡고
또한 한국 토속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만들어
1896년 처음 세계에 소개하여 제1회 서울 아리랑 상의 수장자가 되었다
한글과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글 발전에 공헌하여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그를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에 조성된 주시경 마당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이 같은 그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광복후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내한했지만 온지 일주일만에 86세의 노쇠한 육신으로 쓰러져 1949년 8월5일 세상을 떠났다
"웨스터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한 살때 죽은 아들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이 묘비는 1949년 8월 11일 영결식때 제막한 것인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묘비명을 쓸 수 있도록 비석의 가운데 부분을 비워두었다.
그러나 당시는 건국 초기여서 국내의 여러가지 사정상 추진위원회가 글씨를 미쳐 받지 못했고 그 이후 50년 동안
그대로 비어 있다가 헐버트 박사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1999년 당시의 대통령이던 김대중의 휘호를 받아 묘비명을 새겼다
<가운데 세로 글씨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한글 휘호가 김대중의 필적이다.묘비명은 순 한글로만 세로 줄로 이렇게 쓰여 있다
"천팔백육십삼년 일월이십육일 미국에서 탄생
천구백사십구년팔월오일 서울에서 별세
선각자요 한국의 친우인 헐버트 박사의 묘
나는 윈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팔월십일일
헐버트 박사 장의 위원회 세움"
*헐버트 2세 셸던 헐버트(Sheldon Hulbert 1896.2~1897.3)의 묘
겨우 일년을 살다가 죽었는데 헐버트는 1888년 9월, 한나(May B. Hanna)와 결혼하였으며,
그 부인은 1948년 11월 별세했는데 2남 3녀의 자녀를 낳았다.
성장한 다른 아들 헐버트 2세 윌리엄 체스터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6년 별세하였다.
그리고 3세(손자) 리차드는 2002년 미국에서 죽었으며,
4세(증손자) 킴벌리(KimbAll A.)는 현재 콜럼비아 대학에서 국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2004년 8월 5일 헐버트박사 55주기 추모식 때에 양화진을 방문하여 유족 인사를 하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박토리아 풍의 신사 헐버트(Homer B.Hulbert)박사 이곳에 잠들다"
외국인 최초로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한 헐버트 박사는 광복 후인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에
헐버트 박사의 논문 「한국의 소리 음악」은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첫 걸음이 되었고
100여 년 전 처음으로 아리랑을 오선지에 채보하여 세계에 알렸다
외국인임에도 1906년 우리나라 역사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라는 명저를 남겼다.
영국 런던에서 출판한 이 책은 그가 20여 년간 한국에서 머물며 보고 느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전통, 풍속, 산업, 사회제도 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에서도 그는 우리나라 서민의 대표 노래로 아리랑을 언급했다.
무어(S. F. Moore, 1860.3-1906.11 모삼열) 선교사 A-24
1892년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인 로즈(E. Rose)와 함께 고향인 미국 일리노이를 떠나
1892년 9월 1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좋은 어학 교사를 만나 한글을 배웠으며, 한글로 전도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학에 능통하였다.
무어는 권서 서상륜과 함께 백정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곤당골(을지로 입구, 현 롯데호텔)에 자리를 잡고
백정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여 1893년 6월 16명이 모인 가운데 곤당골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도 세웠다
학생 중에 봉주리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백정인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돼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어는
고종의 주치의요 제중원 원장 에비슨의 진료를 받게 하여 박씨를 치료해 주었고 완쾌된 박씨는 큰 감명을 받아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아 이름조차 없던 백정 박씨는 박성춘이라는 이름도 얻게 되었다
여기에 전도에 자신을 얻었던 무어는 양반들에게도 전도하여 상민과 천민 구별 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무어의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박성춘은, 무어와 협력하여 백정 선교에 힘을 쏟았다.
이 일로 곤당골 교회의 분위기가 신분 철폐 쪽으로 흘러가자 양반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양반들의 반발 또한 거세어 졌다.
양반들은 따로 나가 예배를 드리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 예수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으며, 다 주님 안에서는 형제고 자매입니다.” 하며
저들의 행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무어 선교사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마포 강변으로 오르내리면서, 어부 생활을 하는 그 지역에도 전도를 하였다.
예수 안에서 신분이 철폐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민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고,
무어 선교사는 마포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까지 다니면서 전도한 결과 16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마포구 있는 동막교회와 서대문구에 있는 대현교회이다
양반들이 따로 나가 예배를 드리던 홍문삿골 예배당이 뜻하지 않은 화재로 소실되자
양반들이 눈물로 회개하며 다 곤당골교회로 모여들었고
이렇게 하여 양반 천민이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교회가 점점 부흥하고 교인들이 많아지자 무어 선교사는 1905년에 인사동에 새 예배처소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양반과 천민이 함께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면서 승동교회(勝洞敎會)라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승동교회이다
그러나 무어는 1906년 12월에 장질부사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묘비명은 "조선인을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나이다"
조선에서는 무어가 최초의 민중목회자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어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백정들은 민중운동에 앞장선 무어의 정신을 이었다.
승동교회에장로 선거를 할 때 백정 박성춘이 당선되자 양반들이 더 이상 천민들과 같이 다닐 수 없다 하면서
안국동에 안동교회를 설립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Kendrick, Runbye Rachael(루비 캔드릭1883.1.28~1908.8.15)B-9
캔드릭은 1883년 미국 택사스에서 출생하여 1905년 캔자스 여자 성경학교를 졸업한후 자원하여
1907년 엡윗 청년회의 후원으로 미국 남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녀는 송도(개성)에서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고 영어를 가르치고 아픈 아이들을 간호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고 일한 그녀는 한국에 온지 9개월 만에 급성 맹장염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평소에 예견한듯이 나의 사역이 너무 짧게 끝난다면 나는 보다 많은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이곳에 와 달라고쓰고 싶다고 말했으며 그녀의 비문에 적힌 아름다운 글은
그녀가 택사스 엡윗 청년들에게 보낸 편지 속 글이다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실제로 이 편지를 읽은 많은 젊은이들이 조선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녀의 장례예배에서 와슨 선교사는 이렇게 설교에서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오히려 감사하고 더 큰 뜻을 바라봅시다.”
켄드릭 선교사의 별세 후 그녀를 파송한 텍사스 엡윗청년회는 12만 달러를 모아 켄드릭추모기금을 조성했고,
숭고한 선교 모범에 따라 다수의 청년들이 선교사로 자원했다.
랜들 선교사와 루비 켄드릭 선교사 묘비(왼쪽부터)
파울린 랜들(Randle, Miss Pauline Glass 우란걸禹蘭乬 1980.6.6~19252.9),
미국 루이지아나에 출생하여 미 감리회 파송으로 1918년 한국에 들어왔다
5년간 개성과 춘천에서 여성 사업을 통한 선교 사업에 종사한 후 안식년으로 귀국했다가
1925년 2월 재차 내한하여 철원 지방에서 선교하던 중 급성 맹장염에 걸러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 악화로 그해 5월에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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