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 하리영)B2-3
양화진에는 하디 선교사의 난지 하루 만에 죽은 셋째딸 Marie(1893.8.9~1893.8.10)와
여섯살때 죽은 넷째 딸 Magaret(1903.9.1~1909.2.10)이 안장되어 있고
하디 선교사의 대각성 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선구자
R.A. 하디(Robert A. Hardie 1865.6.11~1949 하리영)
하디는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칼레도니아에서 출생했다
토론토 대학 의대 재학중에 해외 선교 자원운동에 참여 하면서 해외 선교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토론토 대학 YMCA 후원으로 결혼한 아내 켈리(Matilda Kelly)와 함께 1890년 9월에 한국에 왔다
내한 초기에는 부산과 서울을 오기며 2년 동안 사역하다가 1892년 부터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겨
진료소와 시약소를 운영하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내한 이후 약 8년동안 교단소속이 없는 독립 선교사로서 활동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토론토 의대의 YMCA후원 기간이 끝난 1898년 미국 남감리선교회로 소속을 변경하였으며
1899년에는 개성에 남도병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그는 원산에 병원을 설립하고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교회를 개척하는 등 수년동안 선교에 힘을 쏟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마음이 갈급한 채로 원산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을때에
1903년 중국에서 휴양차 온 화이트(Mary C. White)선교사의 제안으로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개최하게 됐다.
그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그 동안 자신의 무력함과 교만. 믿음의 부족함을 철저히 회개하면서
성도들 앞에 공개적으로 눈물로 고백하며 구원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회개와 고백은 모든 성도들에게 큰 감명과 은혜가 되어 많은 성도들이 회개운동에 동참하게 되었고
그를 비롯한 모든 성돋르은 구원의 확신과 성령 충만함으로 마음속에 평화와 기쁨을 경험했다.
"이제는 조선민족과 함께 고난을 나눌 것"을 다짐하였다
;
이 같은 부흥집회는 1904년 2월 개성으로 확대, 1904년 3월에는 서울 잣골교회에서도 부흥집회가 계속됐다.
결국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불길로 이어져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 후 하디는 1909년부터 1922년까지 협성신학교 교장, 피어선 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신학 교육에도 힘썼다.
서울 제중원에서 에비슨과 의료 활동을 하고, '세브란스 의전'에서 의사(1917~1918)로도 활동하였다.
1916년 선교잡지 '신학세계'를 창간하여 감리교 신학 연구의 전기를 마련했다
조선 예수교 서회 총무(1921~1927)로서 문서 선교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1930년 기독신보의 사장으로 활동하고 '조선 농촌 구제책'이라는 저서도 출판하였다.
1935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49년 미시건 주 랜싱에서 소천하였다
하디의 어린 두 딸 묘역에는 J. L. 저다인(Gerdine, Joseph Lumpkin 全約瑟, 全堯燮, 1870-1950)
선교사의 아들 주니어 저다인이 출생하지 하루 만에 숨져 양화진에 묻혔고
개성에서 하디의 뒤를 이은 부흥집회 주창자 크램(W. G. Cram, 奇義男) 선교사의 아들도
2 살의 어린 나에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봉사활동을 하였으나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의 보건 위생 등 열악한 환경 때문에 풍토병이나 전염병들으로 사랑스런 자녀들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며 가족까지도 희생하면서 조선과 조선민족을 사랑한
저들의 숭고한 믿음과 섬김에 머리 숙여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메리 로간 (Mary Lee.Logan 1856.9.17~1919.12.7)D10
충북지역 여성 교육의 초석(礎石) M. L. 로간
로간 선교사는 1856년 미국 켄터키에서 출생하여 켄터키에서 자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J. V. 로간(Logan, Mrs. J. V.)으로 켄터키 센트럴 대학 학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로간은 남편과 같은 대학에서 기독 청년회(YMCA)와 여자 기독 청년회(YWCA)를 육성하였고
사회봉사 활동에도 힘을 썼으며 특히 리치몬드의 센트럴 대학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다.
1908년 남편 로간 박사가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사망한 후 평소 소망했던 해외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로간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로 헌신 중이던 포사이드 박사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회신이 오기 전인 1909년 봄, 그녀 나이 53세때에 한국에 자비량 선교사로 먼저 들어왔다.
이 무렵 선교사들은 대부분 정규 선교사(Regular Members)로 임명되어
보수(報酬)와 재정 지원을 받고 활동했으나 로간 선교사의 경우 임명 받기전에 들어왔으므로
당분간은 해외 선교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며
활동한 한국 최초의 자비량(Affiliated Members) 선교사였다.
로간 선교사는 목포에서 옛날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이었던 유진벨 선교사와
의사 오긍선을 만나 수개월 동안 그들과 함께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이후 로간 선교사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으로 청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국에서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주일학교, 성경학교, 주일학교 교사반, 여성 전도반,
여성 지도자반 등을 육성하면서 충북 지역의 선교와 여성 교육에 커다란 공을 세운 여성 선교사였다.
자기 집에서도 매주 15시간 씩 여러 성경 공부 반을 인도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5-60여명에 이른다.
당시 청주 여성들에게 로간 선교사는 언제든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자애로운 어머니’였으며,
밀러 선교사의 부인 도티 선교사와 함께 청주지역 여성 교육의 초석을 놓은 개척자였다.
로간 선교사는 1919년 12월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했다,
그가 살던 청주시 상당구 탑동 185-1번지에 있는 집(1911년 건립)은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3-5호로 지정되어 “로위(Lowe)기념관”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한편 1921년 6월 청주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청주시 남문로 1가 154번지(청주제일교회)에 화강석으로
가로 0.4m, 세로 0.4m, 높이 1m 규격의 기념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충북기독교100년사>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첫째, 충북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기념비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둘째, 한문을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 봉승(奉承) 진출갈력(盡忠竭力) 등 한문 용어까지도 한글로 기록하여,
일제 강점기에도 교회가 앞장서 우리글과 말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기독교와 한글운동-민족운동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귀중한 사료이다.
셋째, 이 비석은 여전도회 중심으로 건립되고 여성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교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에 노력한 흔적을 보여준다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Vinton,1873.1.31~1903.12.4) C 7-10
캐뒤(Cadwy 4살) 왈터(Walter 1살).토미(Tommy 6개월),
C. C. 빈턴 선교사의 부인 레티샤와 어린 세 자녀가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Vinton,1873.1.31~1903.12.4)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은 1873년 1월 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여,.
미 북장로교 선교사인 C. C. 빈턴(Vinton, Cadwal 결혼한 후 1891년4월 3일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녀는 12년간 남편의 선교 사역을 도왔는데 그러나 내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인한 혼란한 시기에 폭염과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인한 풍토병으로
두 자녀를 잃고 결국 자녀를 잃은 슬픔으로 건강을 해쳐서 30세인 1903년 사망하고 말았다.
1908년에는 딸마저 사망함으로써 양화진에는 모두 4인의 가족묘가 되었다.
C. C. 빈턴(Vinton, Cadwallader C., Cadwallader C.Vinton, 1856~1936.6.26)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나 1891년 아내 레티샤 선교사와 함께 미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알렌 헤론에 이어 제중원 제 3대 원장을 맡았으나
정부 병원이라는 한계 때문에 마음대로 복음전도를 병행하기 어려웠다
‘육체를 치유하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 고 생각한 빈턴은 1893년 11월 제중원을 사임하고
자택에서 민중들을 대상으로 치료와 복음전도에 노력했으며 이로 인해 조선정부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그는 평양, 의주, 만주 지역을 돌며 전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힘을 쏟았다.
그는 한글 성서의 출판과 보급을 위하여 성서공회(聖敎書會) 창설에 참여하여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상임 성서 실행 위원회가 한글 신약 전서의 단편 성경들을 처음으로 출판하기 시작했을 때,
그 관리인(Custodian)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97년 4월 1일 창간한 장로교 최초의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News)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선교잡지로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이 신문은 2부가 왕실에 전달되고, 정부는 460 여부를 구입하여 서양의 문명 계몽 용도로 전국의 관청(367군, 중앙부처)에 보급했다.
그는 전도를 위한 기금 확보를 위하여 ‘재봉틀’을 수입하여 팔았고, 성서공회 건물을 이용하여 ‘벽지장사’를 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부산 나병환자 치료소와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1908년 선교사 직을 사임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양화진에 남겨 둔채 귀국했으며, 193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1891년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7년까지 16년간 의료와 복음 전도와 문서선교에 최선을 다하였다
Lewis, Ella A.(유의선) (1863~1927) C24
루이스에 대힌 신상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루이스는 함께 일했던 의사 로제타 셔우드가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자 자신도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여
1892년 1월 미 북 감리교의 간호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이후 루이스는 로제타가 주관하고 있던 보구여관, 볼드윈 진료소, 동대문 병원 등에서
약 8년 동안 간호 선교사로 헌신했다.
1900년대 초, 제중원의 경영권이 조선 정부로 부터 에비슨 선교사를 비롯한 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면서
병원 내에서 복음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공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의료선교사들이 복음 선교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루이스는 1899년부터 간호사를 그만 두고 복음 선교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스크랜튼 선교사가 개척한 동대문 교회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종로 교회(현 중앙교회)에서 복음 전도자로 헌신했다.
그러나 1904년 서울에 성홍열이 창궐했을 때에는 간호사로서의 역할도 감당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여성 운동의 요람이었던 종로 교회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날마다 부인들을 심방하고 각종 여성 모임을 인도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루이스 선교사는 간호 및 복음 전도자로 한국에서 35년을 헌신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복음 선교 활동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았다.
조선 정부의 복음 선교에 대한 제약이 완화된 1899년부터 간호 선교 사역을 그만두고 복음 선교에 진력했다.
그녀는 1927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양화진에 안장됐다
.
결혼도 하지 않고 처녀의 몸으로 36년 동안 한국을 위해 헌신한 루이스 선교사 묘비명에는
‘遠涉大洋 初到朝鮮 廣傳福音 多救靈魂"
(멀리 대양을 건너 처음 조선에 와 널리 복음을 전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선교부 재정 총괄 책임자 존 F. 젠소(1984-1951)선교사 가족 묘역A 28
존 프레드릭 젠소(John Frederick,Genso 金昭 1884~1951)
아내 마벨 R. 젠소(Rittgers Mabel.Genso,)1982.4.5-1957)
아들 존 R. 젠소( John Rittgers.Genso, 1911~1914.8.30)
존 프레드릭 젠소(John Frederick,Genso 金昭 1884~1951.7.15)
젠소는 1884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908년 11월 19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기도 양주군 봉화현 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교회는 당초 감리회 선교사가 설립하였으나 장로회와 감리회 간에 선교 지역 분할협정으로
장로회에 편입되어 젠소선교사가 교역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1915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가 재단법인으로 조직될 때 재정분야를 총괄했다.
.
1911년 12월 4일, 독노회(獨老會) 경충 대리회가 경기.충청노회로 조직될 때 임원(회계)으로 피선되어,
1913년 12월 제5회 경충 노회와, 1914년 1월 제7회 경충노회에서 계속 회계로 선임되었다.
한편 1915년 “세브란스 연합 의학 전문학교”가 재단법인으로 조직될 때 임원(회계)으로 피선되었으며
, 1917년 “사립(私立)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로 승격될 때에도 임원(회계)으로 선임되어 재정분야를 총괄했다.
선교잡지 '신생명, The new life'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안동교회 부지 안의 62평의 땅을 교회(사택)시설을 확충하는데 사용하도록 공여한 일도 있다.
이 땅은 후일 그의 딸 바바라(Barbara)의 증언을 통하여 안동교회 명의로 등기를 이전했다고 한다
.
1941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출국 하였다가 1946년 다시 내한했다.
6.25 한국 전쟁으로 1950년 6월 26일 서울을 떠나 일본에 체류하다가
1951년 7월 15일 코베(Kobe)대학이 위치한 니시노미아(Nishinomiya)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한국 선교 역사의 저자 해리 로드(Harry A. Rhodes)는 ‘한국 전쟁기간 중 가장 큰 두 가지 손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존 F. 젠소의 별세이다’라 기록할 정도였다.
젠소 선교사 아내 마벨 R. 젠소( Mabel Rittgers Genso,1982.4.5-1957.6.28)
마벨 R. 젠소는 1882년 4월 5일 미국 아이오아주 디모인에서 출생하여 1902년
디모인 하이랜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무디 성경학교(1907-1908)를 수료했다.
그 후 아이오아주 폴크에서 초중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1906년 6월 6일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선임되어 1908년 11월 27일 내한하여 서울에서 활동했다.
한국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뒤 1910년 정신여학교 제7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1910년 프레드릭 젠소와 한국에서 결혼하여 1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 후에도 1916년까지 영어교사와 아동 교육 및 심리학 교사로 봉직하고,
1920년 정신 교장 서리로 다시 취임했으며.전도 사업과 사회봉사 사업에 진력하였다
1923년 서울 안동교회 부설 초대 유치원장으로 있으면서 영어 성경 반을 인도했다.
또한 YWCA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기독교 여성 단체 등에서 끊임없이 활동했다
.
1941년 일제의 강압으로 남편과 출국하여 1947년 다시 내한하고 계명협회(啓明協會) 협동 총무로 활동하다가,
1951년 남편 젠소 선교사가 소천 한 후 잠시 귀국했다가 1954년 세번째로 내한하였다
프렝크 리우 박사가 주창한 문맹퇴치 운동에 헌신하였고 보육원에서 아동 부녀 복지사업에 참여했다
1956년 한국에서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귀국하여 1957년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에서 별세했다
. 유해는 양화진 남편과 아들 곁에 안장되었다.
겐소 부부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기간을 제외한 평생을 한국 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양화진에는 태어난 지 3년 만에 죽은 아들이 겐소 부부와 함께 양화진에서 안식하고 있다
클라렌스 N. 윔스(Weems, Clarence Norwood)선교사 가족묘역F12~13
윔스 2세. 클라렌스 윔즈의 셋째 아들. 벤자민 B. 윔스(1914~1986. 1. 31)
벤자민의 부인. 룻 코브란츠 윔스 (1916.5.2~1966. 6월 23.)
3세 손자 John Jordan 한살 때 죽어 양화진 어린이 구역에 묻혔다(둘째 아들의 아들)
클라렌스 N. 윔스(Weems, Clarence Norwood 魏任世 1875.2.18~1952.2.26)
클라렌스 N. 윔스는 1875년 미국 조지아 주 우스타놀라에서 출생했다.
1899년 아칸소 대학과 에모리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칸소와 켄터키에서 10년간 교직에 있다가 선교사가 되었다.
클라렌스와 낸시부부는 큰 아들 데이비드, 둘째 아들 클라렌스 Jr.와 함께 미국 남 감리회 선교사로 1909년 내한하였다.
첫 부임지는 개성이었으며 동부교회와 서부교회 목사로 봉직하였고, 송도 고등 보통학교 교장과
개성지방 감리사 등으로 23년간 활동 할때 셋째 아들 벤자민과 넷째 아들 빌을 낳았다
.
그 후 원산으로 옮겨 원산 성경 학원, 농촌 교회 사역자 양성회, 광명소학교 등을 설립하여 7년간 봉직하였다.
그의 주요 업적은 교역자 양성에 힘썼으며 유능한 학생들을 미국 유학을 주선하고, 40여 교회를 건축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1930년 남 감리회 조선연회 대표자로서 남, 북 감리회 통합에도 공로가 있다.
그의 아내 Nancy 는 남편의 선교사역을 내조하면서 선교 센터에서 독자적으로 재봉과 요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윔스 가족은 1940년 안식년 휴가를로 미국으로 떠나면서 다음해 다시 돌아올 것을 계획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윔스 선교사는 1952년 2월 26일 조지아 주에서 별세했다.
그의 네 아들들은 성장하면서 모두 한국에서 외국인 학교에 다녔고, 한국 선교사, 미 군정청 고문,
주한 미국 대사관 담당관 등으로 한국에서 봉직하였다.
장남 데이비드는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헬렌과 결혼하여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철원에서 선교사로 있었으며,
2남 클라렌스 Jr(주니어)는 2차 대전 때 OSS대원으로 참전한 후 미 군정청에서 한국군 고문으로 일했으며,
콜럼비아 대학에서 한국학을 연구했다
그는 특히 헐버트 선교사의 한국 역사책 두 권을 편집하므로 한국 역사 연구에 공헌하였다.
특히 1947년 출생한 그의 아들John.Jordan이 그 해 죽어 양화진 어린이 구역에 묻혔다
3남 벤자민 B 윔스는 서울에서 한국학 전문가로 많은 활동을 하다가 부인과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4남 빌은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MIT와 국제 협동 기구에서
1958년부터 1963년까지 5년간 한국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윔스 선교사는 자신은 물론 두 아내 모두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했으며, 네 아들 역시 한국과 관련된 삶은 살았다.
클라렌스 윔스와 낸시 윔스 선교사 부부는 1909년 미국 남 감리교 선교사로 모두 31년 동안 개성과 원산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이들은 1920년대에는 교육선교사로, 1930년대 이후에는 주로 교회 건축가로 활동했다.
클라렌스 윔스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말에 강제 추방되어 미국에서 살 때, 아내와 사별한 후
수년간 한국 선교사 협회에서 일했던 율린 스미스와 재혼했다.
율린 스미스 역시 1953년부터 1964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했다.
이 세 선교사가 한국에서 헌신한 기간을 모두 합하면 72년에 이른다.
3남 벤자민 B. 윔스(Benjamin Burch.Weems, 1914.5.14~1986.1.31)
3남 벤자민 B. 윔스는 1914년 개성에서 출생하여 한국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미국에서 듀크 대학을 졸업했다.
북 캐롤라이나에서 교사로 있다가 1939년 내한하여 서울 외국인 학교 교장으로 1940년까지 봉직했다.
1942년 미국에서 룻 코브렌츠(Ruth Coblentz )와 결혼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로 활동했고 1948년 ‘미국의 소리’ 방송을 담당하고,
1974년 은퇴 할 때까지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학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에는 단국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서울외국인학교에서도 활동하였다
벤자민 윔스는 첫 아내 룻이 죽은 3년 후에 1969년 신윤희(현재 미국에 거주)와 재혼하였으며,
1986년 1월 31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Beloved husband and father' 라 쓰여 있다.
벤자민 윔스의 아내 룻 코브렌츠(Ruth Coblentz) 묘(1916.5.2~1986.1.31)
그의 부인 룻 코브렌츠(Ruth Coblentz)는 191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에리(Erie)에서 성장하여 오버린 대학을 졸업했다.
독신 여성으로 1938년 서울 외국인 학교 교사로 내한하여 1940년까지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1942년 벤자민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버지니아 주 알링턴에 정착하며 딸 셋을 낳고 살다가 1963년 남편을 따라 다시 내한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서울에서 암으로 1966년 6월 23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
그녀의 묘비에는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인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thy peace(St. Fransisco)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쓰여 있다
아더 G. 웰번(Welbon, Arthur Garner, 한국명: 吳越番)선교사와 두 자녀의 묘 A 51-52
아더 G. 웰번( Arthur Garner,Welbon, 吳越番1866.8.4-1928.4.5) A51~52
아더 G. 웰번은 1866년 미국 미시간에서 출생하여 1897년 마가레타(Macalester)대학을 졸업했다.
1900년 샌 안젤모(San Anselmo)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1900년 10월 17일 내한했다.
1901년 9월 대구 간호 선교사 새디(Sarah Harvey)와 서울에서 결혼하였으며 1909년까지 서울 선교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제1회 독노회(1907. 9. 17)때에 전도 위원으로 참여하고 제3회 독노회(1909.9.3)에는 경기노회 총대로 참가했다.
선교 구역의 분활로 원주가 감리교 구역으로 편입되고 안동에 새로운 선교부가 개설되어
1909년 2월 플래처(Fletcher,鷲義湫, 성소병원 설립자)와 안동 선교부로 전임 되면서
선임 선교사로 안동의 선교 기지(基地)와 가옥을 매입했다.
1909년 8월 안동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10월 소오텔(Sawtell,史佑大)선교사와 안동 주변지역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안동 선교부 책임자로 안동군 부내면 옥리동에 거주하며 안동 지역 교회의 공동관리,
한국어 연구 감독, 보조 교역자(助師)와 성서 판매원 감독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과묵한 성격에 안면이 검은 수염으로 뒤덮혀 야성적인 인상을 주었고,
교인들과 인간적인 접촉은 별로 없었으나 금곡동에 우물을 파주어 주민들의 식수(食水) 해결을 해 주었다.
안동 교회 동사목사(同使牧師)로서 초대 당회장을 역임하였고 지곡, 내매 교회에서도 사역했으며,
1921년에는 안동지역이 7천여명 교인으로 늘어나 130여 교회로 확장되어
경안노회가 분립되었을 때 임원으로 참여하여 노회발전에 기여하였다.
1917년 평양으로 전임되어 1919까지 순회 전도와 계몽 교육에 힘쓰다가
부인 새디의 건강 악화로 가족들과 미국에 일시 귀국했다가1922년
1다시 돌아와 안동지역 선교 사업을 계속하다가 1928년 4월 6일 61세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했다
.
대구 최초의 간호 선교사 새디 웰번(Mrs. Welbon, Sadie 일명: Sarah( -1925.7.20)
미 북 장로회 간호선교사로 1899.9.22에 처녀의 몸으로 내한하였다
대구에서 최초 독신 간호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01년 9월 웰번 목사와 결혼했다.
그 후 서울로 전임되어 여성 성경반을 지도하며 순회 선교를 했다.
남편 웰번이 안동에 부임 한 뒤에는 1910년 6월 합류하여, 젊은 여성층과 노년층으로 2개의 성경반을 조직 운영하고
많은 새 신자들이 성경반을 통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했다.
1914년 5월에는 안동 지역을 15일간 6백여리(150마일)를 걸어서 전도하며 12개 교회를 순방하고
400여명을 전도한 기록이 있다.
건강이 악화되어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가 192 테네시(Maryville)에서 53세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히지는 못했다
웰번의 장남 토마스(Thomas Harvey.Wwlbon 1903.5.17-1903.5.27 )의 묘
웰번(Welbon, A. G.) 부부에게는 6남매의 자녀가 있었다.
장남 토마스(Thomas Harvey)는 1903년 5월 17일 출생하여 같은 달 27일 서울에서 열흘 만에 사망하였으며,
딸 앨리스(Alice)는 1912년 5월 30일 출생하여 1914년 2월 9일 디프테리아(Diphtheria)로
2살의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이들은 양화진에 아버지 아더 G. 웰번 함께 묻혀있다.
한편 차남 헨리(Henry G.)는 1904년 출생하여 1919년까지 평양 외국인학교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뒤 목사가 되었다.
1932년 결혼(Dorothy Klein)하였으며, 한국에서 미 군정청 통역관으로 봉직(1946-1947)하였다.
바바라(Barbara B.)는 1962년 한국에 돌아와 영어교사로 봉직하고, 매리(Mary F.)는
미국 아이오와(Davenport)에서 여배우로 활동했다
. 찰스(Charles P.)는 L.A.에서 미국 우편사업에 종사했다.
웰번의 딸 엘리스의 묘 Alice. Welbon 1912.5.30-1914.2.9)
엘리스는 세상에 난지 2년만에 디프테리아(Diphtheria)로 서울에서 사망하여 아버지와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1867.10.20~1962.3.28) C20
소다 가이치와 그의 아내 우에노 다끼가 안장되어 있다
소다 가이치는 1867년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서 영어를 배웠고,
대만에서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YMCA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 상재 선생을 만나 1906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백만명 구령운동에 참가하였고 경성 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어 매서인을 겸한 복음 전도에 투신하였다
3.1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으며,
1921년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 지부장에 취임하여 두 내외가 전심으로 고아들을 보육하게 되었다.
그는 8.15광복 때까지 1천여명의 고아를 돌보아주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많기도 했다.
. 때로는 이런 그를 자선가로 위장한 일본의 앞잡이라고 비방을 받기도 했고,
<1943년에는 77세에 원산(일본인)교회 무보수 전도사로 취임하여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으로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8.15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서 배편으로 시모노세끼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그는 한 손에는 세계평화란 표어를 들고,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일본의 회개를 부르짖었다.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가마꾸라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 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 단체 연합장’으로 국민 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 운동 본부장(柳達永), 보사부 장관(鄭熙燮), 서울시장(尹泰日)의 조사가 있었다.
일본인으로는 최초의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 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일보, 1962. 4. 2 기사)
그는 양화진 묘지에 있는 유일한 일본인인 그의 묘비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伊知”,.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꾸라 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러라.
1919년 독립 운동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연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쓰여 있다.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산 하나님의 사람이다.
.
우에노 다끼(上野,Takiko, 1878-1950.1.14)
소다의 아내 우에노 다끼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 여학교와 이화 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전택부는 기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이라는 아름다운 시가 쓰여 있다.
프랭클린 올링거 두 자녀의 묘와 올링거 선교사의 기념석 H 19-20
올링거 선교사의 아들 David Birchard( 당시 12세 1889.5)
딸 Bertha Wilhelmina(당시 9세1889.5)
올링거 선교사의 자녀들은 한국에서 죽은 최초의 서양아이들이다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1845.11.29~ 1919)
프랭클린 올링거 선교사는 1845년 미국 오하이오주 샌드시키 카운티 출신으로
남북전쟁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올링거는 부친과 형이 남북전쟁에서 돌아 온 1865년 저먼 왈라스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 후 미시간의 사기노와 베이시티 독일 감리교회 등에서 설교자로 1년간 사역한 뒤
펜실베니아 피츠버그의 독일감리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였다
진로를 놓고 기도하던 중 북 감리교의 한 감리사의 조언에서 소명을 발견한 올링거는
1870년 가을 당시 중국 선교의 중심지였던 복건성의 수도 복주에 중 북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876년에는 귀국하여 독일 감리교회 목사 존 슈바인푸르트의 딸 베르타와 결혼하였다.
미북감리회에서 파송을 받아 1888년 1월부터 1893년 9월까지 한국 선교사로 사역했다.
그는 한국으로 파송되기 전 중국에서 16년간 선교사로 활동했고, 그의 나이 42세가 되어 한국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한 경험 많은 중년 선교사의 한국 입국은
20대 청년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큰 도움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에서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사역은 한국 기독교는 물론
인쇄와 출판 및 교육 사업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
그는 한국 선교 첫 해에 올링거 선교사는 파송 첫해에 인천에서 오두막 예배당인
인천 내리교회를 세웠고.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소인 삼문 활판소를 배제 학당에 설립했다
1889년 2월부터 그는 스크랜튼 대부인이 자기 집에서 시작한 여성들의 모임을 이어받아 여성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893년에는 당시 한반도의 주도적인 항구 가운데 하나였던 원산에서 의료선교사 맥길과 함께
기독교 서적을 팔며 병자도 고치는 사역을 감당했다
.
1891년 1월에 올링거 선교사는 한국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은 여자 의사 박에스더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890년부터 1893년까지는 정동 제일 감리교회를 담임하며 복음을 전했다
1890년에 현 대한 기독교 서회의 전신인 조선 성교 서회를 언더우드와 함께 설립하고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coder’를 창간했고,
한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식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던 중 전도하여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여러 전도 문서의 번역 출판뿐 아니라 그가 쓴 설교학과 목회학 저서들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신학교 교재로 채택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초기 한국 감리교회 찬송가 대부분을 번역해 보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프랭클린 올링거는 후대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에 의해 미국 북감리회의 초기 선교 신학을 대변한 선교사로
19세기말의 선교 신학의 주요 흐름이었던 ‘기독교 문명론’(Christian civilization)을
한국과 중국, 일본의 선교 현장에서 구현하였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올링거 선교사 부부는 1893년 9월에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안식년을 마치자 올링거 선교사 부부는 1895년 다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911년까지
복주에서 인쇄소와 대학을 중심으로 사역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미시간 앤 아버에서 1919년 사망하여
톨레도 우드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올링거 부인은 1943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남편 곁에 묻혔다
최근 올링거 선교사 4 대손의 요청으로 그동안 이름 모를 묘지로 남아 있었던 올링거 선교사의 .
두 자녀의 무덤을 찾아내고 그 묘역 안에 올링거 선교사의 기념석을 2010년 6.4일에 세웠다
.
총탄 자국이 난 갬블 선교사의 부인 베아트리스 선교사 묘역.
F K.갬블(Gamble, Foster Kirk:甘保利:1880~1969)
1880년 앨라배마에서 태어나 남 버밍햄대학과 밴더 빌트대학 신학 대학원을 나와 고향에서 수년 간 목회했다.
1908년 10월, 아내와 함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개성, 춘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10월부터 1913년까지 남감리회 연회 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개성 북부교회에 시무 하고
춘천지방 전도 사업을 담당하다가 1915년 일시 귀국하였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불길이 한반도 전역과 중국에까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가다가
1908년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이 열기도 급격하게 쇠잔해 갔다
이런 위기의식이 다시 한 번 이 민족 가운데 놀라운 부흥 운동의 역사가 있게 해달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이에 따라 부흥 운동이 재개됐는데 이 운동이 ‘백만명 구령 운동’(The Million Souls for Christ)이다
1909년 7월 12일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남 감리교 개성 선교부의 몇 명의 선교사들,.
갬블(F.K.Gamble), 리드(C.F. Reid), 스톡스(M.B. Stokes)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염원하는 기도모임을 함께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1915년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부에서 활동한 후 1921년 다시 내한하여 .
경성(서울)지방 감리사와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의 통합을 위한 합동 연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
1927년 아내 베아트리스 선교사가 사망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목회자로서 문서 선교와
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부에서 간사로 활동했는데, 1940년에는 미국 감리교 본부 산하에 해외 구제 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에는 한국에 들어와 한국 감리교 재건에 기여했다
그가 발표한 논문에는
The Evangelistic Challenge of the Cities (1923.1. KMF)를 비롯하여 A Korean boy soul-Winner(1923.8. KMF),
Christianity in Korea(1926.7. KMF) 등이 있다
>
갬블 선교사의 부인(Jenkins, Beatrice Aurora 1877.8.5~1927.1.14 )의 묘
아내 젠킨스(Jenkins, Beatrice Aurora) 선교사는 1877년 미국 북 캘롤라이나 주 프링클린톤에서 출생하였다. >
리틀톤 대학과 내슈빌 감리교 선교사 훈련 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1908년 9월 갬블 목사와 결혼한 후 그 해 10월
남편과 함께 미국 남 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927년까지 20년간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담당하였다
한국에서 선교 활동 지역은 개성과 서울이었다. 1912년 6월에는 개성에서 남편과 함께 살면서 여성 선교 사업에 헌신하였으며,
1924년에는 서울 사직동에서 남편과 5 자녀가 함께 거주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27년 1월 14일 49세의 나이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하여 종교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에 묻혔다
1927년 2월 2일자 기독신보 기사에는 “18년 전에 남편과 함께 내한하여 개성에서 몇 해 동안과 서울에서 몇 해 동안 살면서
그는 신앙이 견고하고, 품행이 아름답고, 마음이 착하여 교인뿐 아니라 비교인(非敎人)들 까지도 그 부인과 한번 교제하면
과연 이상적 여자라고 칭송하였다. 그런고로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슬퍼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서 가족과 친지들에게 말하기를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나는 가기로 준비하였으며,이번에 나의 병이 낫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 범사가 다 잘 될 줄 안다고 하면서
고통가운데서도 주님만 의지하다가 영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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