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 순교 유적지를 둘러 보려고 목사님과 사모님. 우리 부부 이렇게 길을 나섰다
목사님께서 운전도 해 주시고 길을 아시니 너무나도 편하게 전라도 지방 성지 순례를 하고 다닌다
배롱나무 분홍 꽃길 가로수 길따라 달려서 여수로 들어오니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애양원 유적지로 향했다
.여수 시내에서 애양원 가는 길은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끼고 돌아간다
오늘날 애양원은 나환자촌이 아니다. 이곳은 우리에게 참신앙을 가르쳐준 선교사들의 사랑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또 손양원목사가 잠들어 있으니 사랑과 순교가 공존하는 장소다
순교 유적지는 총17만6000㎡(5만3240평)이다
유적지는 애양병원. 토플하우스.최초의 여자 병사,애양원 역사 박물관. 평안 양로원.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
손양원 목사 순교장소, 성산(애양원)교회.삼부자 묘소. 기념 조형물 기념비등...
토플하우스.산책할 수 있는 치유의 숲과 숙박할 수 있는 팬션도 있다
오른쪽 길로 가면 애양원 교회, 역사박물관, 순교기념관, 토플하우스, 평안의집, 묘역 등이 나온다
옆에서 찍은 성산(애양원) 교회 전경
이 건물은 정면 왼쪽에 종탑이 하나 있는 장방형 석조 건물로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투박하나
건축 당시 성도들의 정성이 담겨 있는 건축물이다.
한센병 환자 1세대가 거의 세상을 떠남에 따라 교회 이름을 애양원 교회에서 '성산교회'로 바꾸었다.
이곳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지 이기도 하다.
애양원교회는 애양원 환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설립한 교회로 특수한 사명을 가지지 않으면
사역 할 수 없는 한센병 환자들의 교회였다.
애양원(愛養園)은 한국 최초의 한센병 치료병원으로 선교사들이 꾸려가던 광주의 한센병원을 모태로 하고 있다
당시 나환자는 '문둥병(한센병)'이란 이름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고 인권 유린도 흔하게 이뤄졌다
이러한 시기에 애양원은 원생들의 자치로 운영되면서 나환자들 사이에선 천국으로 불렸다.
애양원교회는 1908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월슨 선교사에 의해 봉선리 교회로 시작되었다.
봉선리교회가 1928년 여수시 율천면 신풍리로 이전하여 신풍교회로 불리웠으나
교회가 너무 초라해서 미주 교포인 석은혜성도가 헌금을 보내와서 건축하여 잠시 '석은혜 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애양원의 초석을 놓은 윌슨(Robert M. Wilson, 禹日善) 박사가 병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공모했다.
많은 응모 이름 가운데 사랑 애(愛), 기를 양(養), 동산 원(園) - 사랑으로 돌보는 동산이라는 '애양원'으로 선택했다
따라서 교회 이름도 자연스럽게 애양원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애양원 교회는 1982년에 다시 성산교회로 개명했다
이유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과 또한 한센인 환우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비 한센인 성도가 많아져
거룩한 동산이라는 '성산 교회'로 개명하였는데 굳이 개명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네?
1939년 2대 사역자로 부임한 손양원 목사는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형무소와 청주구금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5년을 복역하고 해방과 함께 출소해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던 그는 1950년 9월 여수 미평동에서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신사참배 반대자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애양원 교회가 그를 담임교역자로 청빙하였는데 부임하고서도 손 전도사는 1940년 신사참배 반대를 이유로
투옥되어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출옥하여 손양원 전도사는 다시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고 1946년 2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안재선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학생들에게 순교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땐 환자들과 함께 있겠다며 피난을 거부하고 교회에 남아 있다가 1950.9월에 공산군에게 순교했다.
개명하여 현재는 '성산교회'지만 여전히 교회 정면 벽에는 '애양원 예배당'이라고 되어 있다
교회 앞에 손양원 목사 순교비가 서 있다
성산 교회는 1993년 4월 27일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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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양원교회는 1935년 일제 강점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교회 건축물로 한국 근대 선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등록문화재 32호로 지정되었고 삼부자 묘는 한국 기독교 사적 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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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예배당 바로 마주보는 건너편에 '애양원 역사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역사 박물관은 애양원이 여수로 이주한 후 현재의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센 환우들을 치료했던 병원 본관 건물이다.
전남 여수시 율촌면에 위치한 애양원 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목숨을 건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설립됐다.
질병과 가난으로 처참했던 조선에서 한센병은 저주의 병.불치의 병으로 불렸다.
애양원 병원의 전신은 1909년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윌리 포사이트(Wiley Hamilton Forsythe1873-1918) 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돼 광주에 한국 최초로 세워진 한센 병원이다.
당시 광주에 있던 병원은 주민의 거센 항의로 조선 총독부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1928년 환자 600명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애양원 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1935년 당시 원장인 윌슨 선교사는 병원 이름을 ‘사랑으로 키운다’는 뜻에서 애양원(愛養院)으로 바꿨다.
초기에는 전기불도 없어서 수술실 천장에 빛이 들어오게 해서 수술을 했다.
또한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물을 길어다가 사용을 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원장들의 사랑의 치료로 인해서 놀라운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건물은 광주에서 옮길 때 1928년 지어졌으나 1934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1935년 다시 지었다
1972년부터는 양로원으로 사용하다가 2000년부터 '애양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은 당시에 사용하던 의료 기구들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원장님들 그외 환우 들의 생활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한센병의 역사는 물론 애양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애양원 예배당과 애양원 역사 박물관 사이에 있는 손양원 목사 순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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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 역사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에 서서.
1909년 4월 어느 날 광주 제중병원 미 남장로교 소속 윌슨 (Robert Manton Wilson 1880-1963)의료 선교사에게
급한 연락이 왔는데 순천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 오기원 1867~1909) 선교사가
폐렴에 쓰러졌고 3일이 경과한 후에야 광주로 후송되는 상황이었다.
윌슨은 그 오웬의 상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고, 혼자서는 감당키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목포에 있는 선배 의료 선교사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1873-1918) 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포사이드는 말을 타고 광주로 향해 가던 중 나주를 지날 무렵 길가에 쓰러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가까이 가보니 여자 한센병 환자였다
머리는 감지 않아 엉켜 있었고 손 발은 문드러지고 냄새가 코를 찔러 가까이 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포사이드는 말에서 내려 고름 투성이의 그녀를 부축하여 말에 태웠다.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포사이드는 행동에 옮긴 것이다
진정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본을 보여준 에수 사랑의 실천이었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만 보면 돌을 던져 쫓아버리는 최흥종이라는 건달패가 있었는데,
포사이드는 구경하고 있는 그에게 한센병 환자가 떨어뜨린 지팡이를 집어 달라고 하였다.
그가 머뭇거리고 있자 포사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팡이를 주웠다
이를 본 최흥종은 충격을 받았고 그때 받은 감동으로 사람이 변화 되었다
이 후 최홍준은 목사로서 사회 사업가로서 소외된 자, 병든자,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광주로 환자를 데리고 왔을 때 병원으로 들어 갈 수가 없을 지경이라 마당 구석에 있는 가마터로 환자를 옮겨놓았다
가마터는 선교사의 주택을 지으려고 벽돌을 굽던 장소였다
포사이드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센 병 환자들에 대한 치료 동기를 부여한 후 임지인 목포로 돌아가고
광주 제중원 2대 원장이던 윌슨이 가마 굽는 터에서 치료해주었는데,
윌슨이 한센병 환자를 치료 한다는 소문이 퍼짐과 동시에 환자들이 광주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1912년 광주 봉선리에 E자형 병원 건물을 짓고 본격적으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광주 나병원이 설립되었다.
병원에 환자의 증가와 이로 인한 주민들의 반발로 1928년 여수 율촌면 현 애양원 자리로 이전하였다
포사이드의 정신은 전주 예수병원과 여수 애양원에서 느낄 수 있고 윌슨은 광주와 순천 그리고 역시 애양원에서 느낄 수 있다
윌슨 원장은 애양원 본관 건물 담장에 명심대(明心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므로 병을 고치려면 마음을 다스리는것이 우선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작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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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병원은 등록 문화재 32호인 애양원교회에 이어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 제2대 담임자로 1939년 7월14일에 부임하여 목회 하였으며
1945년 9월10일 부터-10월 15일 까지 애양원 병원장을 겸임 하였다.
"예수만 위해 살자"는 손양원 목사의 글도 감동으로 다가와 함께 나눈다.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안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인해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을 위해 살면 /주같이 부활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게 하지 말자
그는 청주구금소 독방에 수감돼 감식형(끼니를 줄이는 형벌)을 받아 몸이 점점 쇠약해졌다.
독감까지 걸려 사경을 헤맬 때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빈방 홀로 지키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하여 네 식구가 되었도다
온갖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반기독교 세력의 공격, 세속주의의 도전 앞에 안락함만 추구하는 현대 크리스천을 향한 회초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 뜨끔했다.
현 시대에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안일 무사 주의로 내 신앙,내 교회만 지키면 된다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애양원 역사 박물관은 한센병 의료 선교기관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의료기구와 사진 자료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장소가 좁은 지라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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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의 방으로 3인이 한 방을 쓰고 부부는 한 방을 썼다는데 재현해서 그런지 깨끗하다
소년의 튀어나온 창자를 수술하는 윌슨 원장의 사진이 보인다
선교사의 가족들
애양원 역사 박물관은 장소에 비해 많은 물품들이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다 올릴 수 없어 몇개만 올려 놓는다
역사 박물관을 나와 뒷 동산 손양원 목사 유적지로 올라가니 이런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은 1993년 4월 27일 준공하였다,
건물 면적은 774평, 연건평 300평(지상 150평 지하 150평)이며 총 공사비 10억이 들었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 정신을 전승하고 순교 자료 보관. 기독교 문화 예술전시.
손양원 순교 기념 장학 선교 및 장학사업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다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은 성산교회(애양원 교회)가 주축이 되어 성산교회 성도들의 헌금과
전국 각지의 512개 교회와 663명의 개인, 108개 기관들의 헌금으로 건립하였다
기념관이 준공되기까지 많은 분들이 봉사로 재능기부로 참여 주셨는데
대호 건축 송건 집사님이 설계를 하시고 준공될때까지 감리 및 총감독으로 재능기부를 해 주셨고
김영길 교수님은 현 기념관 건물을 스케치해 주셨으며 준공할때까지 기도와 수고로 봉사하셨으며
개관부터 3년간 성화 전시를 해 주셨다
김칠성 집사는 기념관 내의 전기 시설을 모두 설치하시고 봉사해 주셨다
2012년 여수 박랍회를 계기로 여수시의 도움으로 순교관 리모델링과 공원 조성을 하였다
기념관 지붕은 ㅅ자 형태로 손양원 목사의 성인 손의 ㅅ자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삼위일체를 상징하며 동시에 순교한 두 아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건물 벽 12면은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의 12제자를 상징한다
순교관 앞 6계단은 안식일에 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하며 천정의 원뿔은 신자가 하늘을 향해야 함을 상징한다
머릿돌은 기념관이 종교적 의미로 지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순교관 앞으로 가니 순교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땡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자기 자신을 손양원 목사님의 막내 아들이라고 소개했는데 목사님이 순교하신 그 당일에 태어났단다
순교관 패쇄에 대하여 혈기가 가득한 얼굴로 성산 교회를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순교관을 관리하고 운영해온 성산교회(애양원교회) 측과 유족간의 갈등으로 2018년 3월에 잠정 패쇄되었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유족측이 아니라 막내 아들 손동길 목사 때문인거 같았다
너무나도 황당해서 꾹 참고 들어보니 결국은 유족에게 일정한 보상도 아니하고 주인 노릇하고 있다는 것과
전시관에 진열된 유품도 가짜가 많고 유족측에게 관리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일단은 이렇게 찾아오는 순례객들을 위해 순교관 문울 열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니
순교 기념관은 관리하고 운영하는 성산교회 측에서 열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는 어쩔 수가 없단다
대신 삼부자 묘를 자기가 팬스를 쳐 놓았지만 먼 곳에서 오셨다니 팬스를 열어 주겠다고 마치 선심쓰듯이 말한다
남편이 이것이 유족 모두의 뜻이냐고 물어보니 지금 자기 형제들과 의논중이고 큰 누나인 손동희 권사는 자신이 부자인지라
별로 협조하지 않아서 지금 설득 중인데 연세가 많아 말이 안 통한다는 식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손동희 권사를 만난적이 있고 권사님의 간증도 들은 적이 있는데 겸손하시고 온유한 성품이셨다
나중에 자세히 기사와 여러 경로로 통해 알아보니 거의 20여년 넘게 성산 교회에서 잘 운영하고 관리해 오던 순교관을
3년전에 손동길 목사가 여수로 내려오면서 여러가지 요구사항을 말하면서
성산 교회측과 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은 이런 불행한 사태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여러가지 사정과 이유를 늘어 놓았지만 결국은 돈 때문인거 같아서 심히 불쾌하고 화가 났다
손양원 목사님의 희생과 섬김과 용서와 화해 그리고 내려놓음의 정신과 정반대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아닌 아들이란 자가
순교관 패쇄까지 이르게 해야 하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순교성지로 불리우는 여수 애양원 손양원목사 기념관을 둘러싼 갈등은 크리스천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것은 물론.
이미 성지의 자격을 잃어버렸다는 차가운 시선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순교관 건립에서 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성산교회가 주축이 되어 이제껏 해왔고 각 교회와 개인. 단체가 헌금하여 개관한 것인데
어찌 유족이라 하여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슨 권리로 순교관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지 도저히 이해불가이다
오히려 순교관 건립에 애쓴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협조하며 우리 기독교의 공동 유산으로 길이 보전하여
손양원 목사님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받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손 목사의 고향인 경남 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39에는 지난 2015년 10월 20일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개관해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경남 창원시는 문화 해설사를 파견하고 있다.
성산교회는 순교관을 찾는 이들에게 함안 '산돌 손양원 목사 기념관'을 소개하며 그리로 가도록 하고 있단다
애양원 손 목사 순교 기념관도 여수시에서 아예 전문 해설사를 두고 시에서 관리하였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을까 싶디
사실 여러 기념관과 박물관을 다녀보니 시에서 해설사를 파견하고 관리하는 곳이 많았고
다만 종교적인 유산인만큼 기독교 문화유산은 크리스쳔 해설사로 하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순교 기념관 머릿돌이다.
순교 기념관 오른쪽으로 기념관 돌비와 순교 시비가 있다
고훈 목사님의 추모시비 글씨가 작아 옮겨 적어본다
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가족의 순교신앙을 추모하며
시 고훈. 글 이행신
오늘 당신을 말하는 것은/우리가 너무 어설퍼 당신에게 오히려 누가 됩니다
버림받은 한센 병자들/ 아픔으로 쏟아내는 피고름
사랑의 입으로 빨아낼 때/당신은 이미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인,동신 두 아들/공산당 총에 쓰러져 순교 제물되어 돌아온 날
"자식하나 순교자로 바침도 영광인데/둘이나 받으시니 하나님 실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눈물 흘리실 때/당신은 이미 이 땅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두 아들 난사한 원수 같은 그 학생 양자로 삼던날
사랑의 원자탄은 메마른 이 땅에 터지고/그 무거운 용서의 십자가 가족과 함께 지고 여기 설 때
당신은 이미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남해를 품은 이 아름다운 애양원 동산에/당신은 /또 다시 모진 공산당 고문 목숨으로 감당하시고
거룩한 순교자 반열에 영광으로 오르실 때/"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한 날부터
피투성이된 두 아들과 남편/연역한 가슴에 날마다 품고/삶으로 살아낸 산 순교자 사모님
가족 모두 함께 여기 이렇게 찬란히 누워 계시니/당신은 이 땅이 차마 감당치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말하는 것은/우리가 너무 부끄러워 당신에게 오히려 누가 됩니다
가운데 손양원 목사상과 빙둘러 순천 여수 전라도 지방에서 순교당하신 12 분 기념비
1.김정복 목사(1882.6~1950.9.27) 68세에 공산당에 순교하심
2.손동신 성도(1930.0.18~1948.10.21)여순 반란 사건때 18세로 복음을 전하다가 총살당함
3.손동인 성도(1925.11.8~1948.10.21) 여순반란때 형 동신과 함께 23세로 순교함.동신 동인 손양원 목사의 아들이다
4.안덕윤 목사(1897~1950.8.7) 교회 뒷산에서 공산당원에게 죽창으로 찔려 향년 53세로 순교함
5.양용근 목사(1905.10.14~1943.12.5)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르던 중 38세로 감옥에서 순교하심
6.이기풍 목사(1865.1.25~1943.6.20)신사참배 거부로 모진 고문 끝에 결국 순교하심 향년77세
7.이선용 목사(1908,10,21~1950.12.9)6.25때 훼손돈 교회를 복구하기 위해 노회를 찾아 가던중 공비들의 총격으로 순교함 향년 43세
8.윤형숙 전도사(1898~1950.9.28) 3.1 운동때는 여고생으로 시위주도를 하다가 왼팔과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여수 제일교회 전도사 시절 한국전때 미평동 과수원에서 순교 향년 52세
9. 조상학 목사(1877~1950.9.28) 일ㄹ제때는 신사 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렀꼬 6.25때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의해 73세로 순교함
10.지준철 성도(1930/6.10~1950.9.28)퇴각하던 공산당원들에게 아버지 지한영강도사와 함께 집단학살로 순교 향년 20세
11.지한영 강도사(1908.5.16~1950.9.28)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아들과 함께 총살로 향년 44세로 순교함
12.허상용 집사(1906.12.25~1950.9.28) 교회를 지키다가 둔덕 과수원에서 공산당에 의해 순교함 향년 44세
손 목사님의 목사상 아래에 손목사님의 9가지 감사가 적혀 있다.
감사의 기도 (A prayer of Gratitude).
)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니 감사..
2.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이런 보배를 나에게 주셨으니 감사.
3. 3남 3녀 중에서 가장 귀중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셨으니 감사.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이 함께 순교하였으니 감사.
5. 예수 믿고서 와석종신해도 복이라 복이라 했는데 전도하다 총살 순교했으니 감사.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
7.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8. 내 아들 순교의 열매로써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믿으면서 감사..
9.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심부자 묘소로 올라가는 길인데 입구에 펜스를 친 것을 선심 쓰는양 팬스를 걷어 주며 안내한다.
삼부자가 순교한 일은 드문 일로 현재 이 묘역에는 1948년 10월 21일 순교한 손양원목사의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의 묘 2기가 앞에 있고 뒤에는 1950년 9월 28일 순교한 손양원목사와
1977년 11월 26일 사망한 정양순사모와의 합장 묘 1기가 있다..
굳이 사진을 같이 찍겠다 하여 내키지 않았지만 찍었는데 왼쪽 세번째가 손동길 목사다.
왼쪽 추미호 사모님, 이상표 목사님, 손동길목사. 손형준 장로, 허연경권사
유적지 공원에 세워진 조형물 '용서와 사랑'(김대길 작품) 2016,10,22일 준공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손 목사님이 포옹하는 모습이며,
두 개의 빈 의자는 여순 사건으로 순교한 동인, 동신 두 아들의 자리로
누구나 이 빈자리에 앉아서 사랑과 용서를 느껴보게 한다는 뜻으로 제작하였다고 작가는 말한다
순교 기념탑인 사랑의 열매 탑은 전남대 조소과 김대길 교수의 작품으로 14m높이의 청동으로 제작하였다
손 목사와 두 아들의 순교정신을 나타내기 위해 사랑의 씨앗과 줄기, 열매를 형상화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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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플 하우스 애양병원의 마지막 외국인 병원장인 토플 선교사의 업적을 기념하며 붙인 이름이다.
1953년 신축하여 1955년 한성신학교로 사용하다 1962년 폐교되었단다.
2000년에 토플하우스(TOPPLE HOUSE)로 개보수하여 기독교인의 쉼터와 수양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스트 하우스인 셈이다
1953년 신축되어 1955년 한성신학교로 사용되었다가 1962년 폐교된 곳이
1967-1979년 아래층은 의지제작실로 사용되었고, 윗층은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1986년 기독교 수양관으로 개보수하여 2000년 토플하우스로 기독인의 쉼터와 수양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애양원의 영문 명칭은" Wilson Leprosy Center and Rehabilitation Hopsital" 이며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나병 곧 한센병을 치료하는 곳이며 또한 한센병과 그 외의 여러 재활이 필요한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1909년 포사이트(Wiley Hamilton Forsythe1873-1918.보위렴) 선교사가 길에 쓰러진 한센병 여자 환자를 발견하고
광주 진료소의 벽돌가마로 데려와 치료를 시작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09~1910년에 미 남장로의 재정지원으로 광주에 한센병 치료소를 세웠다
1911년 4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의사 윌슨 (Robert Manton Wilson 1880-1963,우월순)과 미국 남장로회의
도움으로 광주 나병원으로 ‘환자 진료, 선교, 봉사’를 설립목적으로 시작하였다.
1916년에 설립된 소록도 국립 한센 병원 보다 5년여 먼저 설립된 한국 최초의 한센병 치료병원이다
1923년 조선총독부 사립병원 취제규칙에 의하여 정식병원으로 인가되었고, 환자가 점점 늘어나자
광주 시민들의 반발과 환자수용 문제로 1927~1928년 여수로 이전하게 되고
비더올프 나병원으로 불리워지다가 1935년 3월 병원 이름을 애양원으로 개칭하였다
.
1948년 4월 미국 남 장로교 한국 선교회로 운영권이 이관되었다.
1966년에는 한센병(나병) 이동진료반 운영을 시작하여 한센병 관리 직원을 여수시,·순천시,·여천시,여천군,·승주군,
·광양군,고흥군,·보성군에 파송, 한센병 교육과 재가 환자 진료 및 새로운 환자 발견에 힘쓰게 하였다.
1967년 8월 여수 애양 재활병원으로 개칭하고 현대식 병원으로 건축, 일반 지체장애자와 나환자를 함께 재활 수술하게 되었다
1988년 3월 사회복지법인 여수 애양병원으로 변경하였다
이제는 한센병의 좋은 치료제가 발명되어 새환자는 거의 없다시피하고 완치할 수 있는 병이되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병원 입구 돌비석에 새겨진 말씀 하나가
1909년 애양 병원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성구 하나가 애양병원을 드나드는 많은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
아무리 명의라 할지라도 그 의사를 통하여 치료하시는 분은 여호와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애양 병원 뜰에 있는 역대 원장들의 조형물이 있다
애양병원 정원에 세워진 손양원 목사 동상
애양병원 초대 원장 윌슨의 좌상 조각품
병원 앞뜰에는 광주와 여수에서 한센병 병원을 짓고 환자들을 돌봤던 역대 애양병원 외국인 원장들의 기념비.
도성래(스탠리 토플) 원장, 보이열(앨버 보이어) 원장, 우월순(로버트 윌슨) 원장, 보위렴(포사이트) 의사 등
4명의 외국인 의료 선교사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토플은 소아마비 후유증 환자의 재활과 수술을 위한 재활병원을 이곳에 세웠다.
석촌 나눔상 수상을 위해 최근 한국에 온 스텐리 토플과 그 부인 미아.
스탠리 토플(Stanley Craig Topple, M.D 도성래)은 손양원 목사의 뒤를 이어 1960, 70년대에 애양원 10대 원장을 지냈고
부인인 미아 와 함께 애양병원에서 한국의 한센병 환자 진료에 전력을 다했다
1959년에 한국에 와서 1981년까지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제 1회 석천나눔상 수상자가 되었다
엘머 보이어(Elmer T. Boyer '보이열'1893-1976)
1921년에 한국에 온 엘머 보이어는 목회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또한 애양원에서 원장으로 재직하며
요양소를 세워 나병이 완치된 330명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준 인물이다.
현재 병원은 정형 외과와 피부과, 내과, 마취 통증 의학과를 운영 중이다.
아마도 피부과와 정형외과는 한국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병원이다
이런 병원이 되기까지 모두가 외면하던 한센인들을 사랑으로 보듬고 치료해서
이 땅에서 한센병을 없어지도록 헌신한 의료 선교사님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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