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27.통영 충무교회. 삼도 수군 통제사.

bonitahuh 2022. 10. 21. 11:55

전라도 지방에 성지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데 이제 미국으로 돌아갈 날도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데다

4일 후에 서울에서 가족 모임이 약속되어 있어 부득히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애초 계획을 잡아 놓으신 모양이신지라

너무 아쉬워 하시니 죄송하고 감사하다

새벽기도 후 바로 한수원 주위와 한수원(한빛 원자력 발전소)에서 만든 공원을 한바퀴 돌았는데

교회서 바로 간지라 셀폰도 아무것도 안가지고 가서 사진이 없어 아쉽다

 

현재 영광은 총 6호기까지 가동중인데 영광 지역 발전은 한수원 때문이라는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광군 인구 6만여명 가운데 한수원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아

사실상 영광 경제가 한수원과 관게되어 있다

교육·,경제,복지,·문화,·체육·,농업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영광 지역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복지관과 문화센터 건립, 군민 공원도 조성하고 운동장도 만들어 지역 주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어 한수원에서 운영한다는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또한 한수원에서 만들어 관리한다는 공원에도 가보았는데

시설도 좋고 참 아름답게 조성해 놓아 영광 군민들에게 많은 문화 헤택을 누리게 하고 있었다.

 

처음 원전 건설을 할때는 많이 불안하고 반대 여론도 많았으나 이제는 오히려 이런 여러 혜택과 도움으로 인하여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어 한수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때에

갑자기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악의적인 여론조성으로 처음에는 멋모르고 군민들이 탈원전 찬성쪽 시위에 나섰다가

원자력 가동을 줄이고 새로 건설하려던 7호기도 취소되다보니 한수원 직원들이 떠나가고

지방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제서야 군민들이 제대로 깨닫고 다시 원자력 가동을 원하고 있다한다

참 알수 없는 엉뚱한 정책으로 이래 저래 국민들만 힘들게 하는 정부가 야속하다

마지막이라고 영광 굴비를 굽고 보리굴비를 쪄서 목사님께서 한상 차려 주시고 영광의 명물인 모시송편도

한 박스 사 주시면서 통영으로 떠나는 우리에게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 광주까지 차로 데려다 주셨다

(음식은 목사님께서 요리에 관심도 있으시고 잘 하셔서 목사님 담당이시다 ㅎㅎㅎ)

영광은 온 도시가 비릿한 굴비 냄새로 은근 배어 있는 듯 한데 그 냄새가 역겹지 않고 구수한것이

아마도 싱싱한 굴비라서 그런가 보다

영광군의 곳곳에 집 앞에나 빌딩 윗층에 굴비를 말리는 덕장들이 보이고 식당마다

굴비 정식은 상시 메뉴인지라 굴비 냄새가 온 도시에 배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진짜 영광 굴비 한번 실컨 먹었당ㅎㅎㅎ 목사님, 사모님, 고마워요!!

1983년 헌당한 현재의 충무교회 예배당 모습

통영은 성지 순례를 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촌 언니를 만나러 간 것이다

사촌 언니와는 어릴적 부터 각별하게 친하게 지낸 사이라서 한국을 나가면 꼭 언니를 만나곤 했다

방학때면 시골 고향 이모네로 갔었고 언니가 시골 고향서 부산까지 고등학교를 유학온 지라

부산에서  살던 나랑 더욱 자연히 친하게 지냈다

언니네서 하루밤 자고선 새벽에 언니랑 함께 언니가 섬기는 충무교회 새벽기도를 갔다

지금은 충무교회 은퇴 장로이신 형부가 2009 년도에 충무교회 100년사를 발간할때 편찬 위원장이라서

3년전에 한국을 방문했을때 형부를 통하여 충무교회 역사에 대해 익히 들었던지라 기독교 성지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통영지역은 호주 선교사 무어(Miss Elizabeth S. Moore)에 의해 1894년 무렵 기독교가 전해졌다.

통영군 용남면 출신인 김치몽이 이때 기독교를 받아 들였지만 곧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하였다.

이후 아담슨(孫安路 Andrew Adamson,)의 전도로 1902년 봄 통영군에 동항리교회(욕지도)가 세워졌다.

당시 박명출·박인건·이영백·최명언 등 동항리의 초기 교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을 세웠다고 한다.

날씨가 어지간만 더웠어도 여기서 가까운 욕지도에 가보고 싶었으나 너무나 덥고 시간도 없어 못 가보았다

 

통영시 문화동 중앙시장 곁에 위치한 충무교회(담임 임교호목사)는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강점기가 시작 되려던

1905년 4월 5일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대화정 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이로부터 문화동 교회(1918~1945), 통영 교회(1945~1956)를 거쳐

1956년부터 지금의 충무교회로 교회 이름이 변천되어 왔다.

 

충무 교회는 영국인으로 호주 장로교회 파송 선교사인 아담슨(孫安路 Andrew Adamson,)부부 선교사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가 최초로 전도한 사람은 권희순 이었으며 충무교회는 권희순의 집에서 모여 예배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담슨은 권희순을 비롯, 김국형, 김낙진, 김찬의, 김학범, 박몽은, 정몽은, 등과 함께 대화정 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본당은 문이 닫혀 못 들어갔고 새벽기도는 교육관에서 하였다

충무 교회를 시작으로 호주 선교부는 1912년 통영 선교부를 설치하고 24명의 선교사를 통영 지부에 파송했다

통영 선교부는 전도활동과 함께 교육, 의료등 문맹 퇴치와 근대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활을 감당하였다

 

1914년에는 의료 선교사 테일러(William Taylor 위대인)가 이곳에 보건 진료소를 설립하여 당시 해양성 질병과

각종 전염성 질환으로 고생하는 통영, 진주, 섬지역 사람들을 치료하며 전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12년 1월 15일 학생 18명으로 시작한 진명학원은 그 당시 설립된 통영의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 기관이었다

학교 내에 산업반을 개설하여 장애여성, 매춘여성, 이혼 당한 여성,

그리고 남편에게 쫓겨난 여성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실시하며,

보호받지 못한 여성들을 보호하며 한글을 가르치고 자수, 영농기술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이들이 자수로 만든 손수건, 책상보, 앞치마 등을 호주 멜본으로 보내면 멜본의 장로교 본부 내의

여전도회 연합회 사무실과 티 룸에서 이를 판매하였고 그 대금을 통영으로 보내어 여성들의 생활을 후원했다.

 

진명학교는 1912년 왓슨( R.D Watson 왕대선) 선교사 부부에 의해 시작이 되었고

 1920년부터는 신애미(Miss A.M Skinner)선교사,

1926년부터는 Francis (방선생)선교사, 1929년부터는 Kerr(한국명. 거이득)선교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선교사들은 신앙 훈련과 근대 교육을 통해 종교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에 걸출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했다.

음악가 윤이상, 시인 청마 유치환, 극작가 유치진, 작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김상옥,

제2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 등이 충무 교회와 진명 학교 출신들이다.

 

또한 3.1 운동의 중심에 충무 교회가 있었다

교회 청년들이 밤새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들고 진명 학원 교사들이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

충무교회 청년들과 진명학원 교사들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식,

신앙적 결단에 의해 이 운동을 이끌어 갔던 것이다.

이처럼 충무 교회는 문맹 퇴치와 지식 전달 기관의 기능에 충실했고,

선교 활동과 민족의식 고취등 지역 근·현대사와 함께 중요한 의미와 역활을 담당하였다.

선교사들의 이같은 노력으로 통영 지역은 비교적 빨리 개화됐으나 통영시는 수산 항구 도시여서

무속 신앙이 강한 탓에 복음화율은 낮아 현재 인구 13만여 명 가운데 7%인 1만여 명만이 하나님을 영접했다.

기념탑은 중국석 오석으로 탑 높이는 210㎝, 넓이는 160㎝로 충무교회 입구에 세워졌는데

교회 앞 마당 믄화재 유물 발굴 작업때문에 현재는 잠시 이전하여 보관중이었다

충무교회 설립 및 호주 선교 100주년 기념탑에 새겨진 24명의 역대 호주 선교사들.

손안로 목사 부부. 모이리 사백, 왕대선 목사 부부. 안진주. 위대연 부부. 신애미. 허대사.

맥계익, 거이득, 추마전 목사 부부. 전은혜. 방란서, 매견시목사 부부. 하예애, 엽덕애, 나예인목사 부부

왕영애 선교사이다. 선교사들의 한국 이름으로 그대로 옮겨 놓는다.

 

교회 앞 마당은 문화재 유물 발굴 한답시고 엉망으로 파 헤쳐져 있어서 어수선 하기 짝이 없었다.

100주년 기념 탑도 자리를 옮겨 보관 중이라서 보지 못하였지만 그 전에 보았고 사진 자료는 형부에게서 빌려 올렸다 .

이 지역의 모태 교회격인 충무교회는 그동안 많은 아픔과 고난을 겪었다

담임 목사가 30번이나 바뀌고 4번이나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제는 2007년 1월 첫주에 부임한

임교호 목사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안정을 되찾고 차차 회복되어 가며 부흥하고 있다 하니 감사하다.

또한 필리핀과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지어 헌당하였다.

통제영으로 들어가는 길

새벽기도 후에 일찍 아침을 먹자 마자 뜨거운 한 낮이 되기전에 일찍 길을 나섰다

통제영은 바로 충무교회와 가까워 걸어서 통제영으로 갔다

 

제주도에 하루방이 있다면 통영에는 벅수가 있다

통제영 파킹장 앞에 서 있는 벅수

충무교회 종탑이 보인다

통제영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구매하려고 하니 안에 있는 젊은사람이

어르신들이 이 더위에 오셨으니 그냥 들어가시란다.

이 더위에 찾아온 노인네가 쬐끔은 블쌍해 보인듯?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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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문화동의 이 일대는 사적 제402호인 통영 삼도 수군 통제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통영 관아가 있던 통제영(統制營)은 삼도 수군 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종2품)가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통할하던 본영을 말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인 1593년에 초대 삼도 수군 통제사로 당시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였던 이순신이 임명되었다.

3도의 수군이 당시 수군 전력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므로 오늘날의 해군 참모 총장격이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니 이때의 한산 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 재란으로 한산 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각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선조 37년(1604년)에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 고장 두룡포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크게 4개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제영 중앙의 세병관 영역, 통제영의 오른쪽의 내아군 영역, 통제영 입구 왼쪽에 있는 우후군(중영) 영역,

세병관 왼쪽에 있는 12공방 영역이다

 

선조 38년(1605년) 7월 14일,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 세병관을 창건하고

차례로 통제영 관아를 지으니 통영은 이렇게 조선조 유일한 계획 군사 도시로 출발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각도의 병영 및 수영이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되었다.

천주교인의 순교지인 통영 옥터는 세병관 앞에서 약 100m 내려가면 세병로 거리에 옥터 자리가 있다.

예전 통제영은 전각이 100여 동이 서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이 있던 대규모 병영이었다.

292년 동안이나 3도 수군을 지휘하며 우리나라의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통제영.

그러나 고종 32년인 1895년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지고,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기 말살 정책을 펴

세병관만 남겨 두고 대소 관아 100여 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이후 학교·법원·검찰청·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1603년(선조 36년)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李慶濬)이 통제영을 이곳 두룡포(頭龍浦 : 현 통영시 관내)로 정하여

통제영터를 닦기 시작하여 2년 만인 1605년(선조 38년) 음력 7월 14일 세병관(洗兵館: 보물 제293호)

·

백화당·정해정 등을 창건하였다. 1895년(고종32년) 각도의 병영 및 수영이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되었으며 208명의 통제사가 체임되었다.

 

세병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과문(止戈門)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통제영의 내삼문에 해당하는 지과문은 ‘창을 거둔다’라는 의미다

 

 

 

 

’병기를 씻는다’라는 뜻을 가진 ‘세병(洗兵)관.

통제영의 중심에 있는 세병관은 창건 후 약 292년 동안 경상, 전라, 충청 3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이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그 위용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현재 이곳 통제영은 복원계획을 세워 많은 건물이 세병관 주변에 새로 들어서고 있다.

 

세병관 앞뜰에 서 있는 석인들.

세병관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 2벌대로 쌓았다. 기단의 윗면에는 전돌을 깔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앞뒤에는 간살을 작게 잡은 퇴칸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원래는 평면의 기능에 따라 벽체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너무 햇볕이 뜨겁고 그늘 하나 없어 워낙 땀을 많이 흘리고 더위를 못참는 남편은 세병관 마루에 앉아있고

나 혼자 돌아다니면서 설명판도 읽으며 사진도 찍었다

이곳 통제영은 천주교 신자 9명이 순교한 천주교의 성지이다

삼도 수군을 관할했던 통영 통제영 중영관아와 옥 터에서 김기량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통제영 입구인 망일루에 들어서기 전 큰길 왼쪽에 자리한 중영(중영청), 곧 삼도 수군 통제사의 부장이자 참모장 격인

우후(虞侯)의 군영인 우후영이 김기량 복자 등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증거 터로 추정된다

이어 1869년에도 부산 동래 수영 출신 신자 8명이 통제영에 끌려와 참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887년 경상 우수영이 있던 거제에 신앙의 씨앗을 뿌려 ‘거제의 사도’가 된 윤봉문(尹鳳文, 1852~1888, 요셉)이

거제에서 잡혀 통제영에서 문초를 받고 이듬해 2월 진주 진영으로 이송돼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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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895년 폐영되기까지 기록이 남아 있는 천주교 순교자 9명이 피를 흘렸고 더 많은 신자가 잡혀 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한 통제영은, 한국 교회의 빛나는 순교성지가 됐다

124위 순교 복자 가운데 ‘제주의 사도’로 불리는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1816∼1867년)는

1816년 제주 함덕리(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차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구조되어

홍콩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휴양중인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바울리노는 김기량에게 천주교 교리 공부를 가르쳐 그해 5월 31일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1886년의 병인박해로 제주의 복음전파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고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통영 관아에서 문초와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고 결국은 교수형에 처하여 졌다

관장은 죽은 그의 가슴에다 다시는 살아 나지 못하도록 대못을 박았다 하니 그 잔인함이 소름끼친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윤봉문(尹鳳文, 1852~1888, 요셉)은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의 가족은 1866년의 병인 박해로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하였다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에 정착하여.

거제의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끝내 배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통영으로 압송되어 통제영 관아에서 심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진주로 이송되었다.

그는 통영에서 진주로 압송될 때 발뒤꿈치를 칡으로 꿰어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끌려갔다.

진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치명하니 그때가 1888년 4월 1일(음 2월 20일)로, 당시 요셉의 나이는 36세였다.

 

*병인 박해(丙寅迫害)*

1866년 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출신의 선교사등이 처형된 사건이다.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등이 근무했던 ‘산성청’

 

통영 문화동은 예술의 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제영을 나와 언니네로 걸어가는 길에 군데 군데 시비도 있고 동상도 있다

청마 유치환 시인은 나의 모교인 경남여고에 아쉽게도 내가 졸업하던 해인 1963년도에

교장으로 부임하여서 직접 만나거나 본 일은 없다

그러나 청마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정운 이영도 시조 시인과는 인연이 있다

꿈 많던 여고시절 그때는 누구나 문학소녀를 꿈구던 시대여서 나와 통하는 친구랑

당시 부산에 살고 있었던 정운을 가끔 찾아 갔다

단정하고 청초한 모습과 검소하고 소박한 살림살이가 지금도 눈에 선하고 수예점을 하던 정운은

우리에게 시조랑 십자수도 가르쳐 주었고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 주어

함께 있으면 왠지 편안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도 많이 해 주셨다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정운과 청마와 주고 받은 연서"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가 출간 되었을때

유부남이었던 청마와의 연서를 두고 비난하는 소리들이 많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오히려 그 순수하고 지순한 그리움을 담은 연서에

영혼이 맑아지며 가슴이 저려오던 기억이 난다.

언니가 멸치를 작은거. 중간거. 큰거 크기별로 세 박스나 사주었다

통영 언네네에 갈때마다 멸치는 언니가 사서 주신다. 고마워요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