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22. 전라남도 영광 야월 교회,백수읍 교회

bonitahuh 2022. 10. 21. 10:21

목사님 사택에 머무니 무엇보다 새벽 예배로 하루를 시작하니 너무 감사하다

오늘은 목사님께서 바쁘셔서 사모님이 운전하시고 같이 야월 교회로 향했다.

영광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며 형제간의 대립과 폭력이 난무했던 땅이다.

그 처참한 현실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켰고, 공동체의 삶을 유지해왔다.

그러기에 영광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고장이 되었다.

야월리는 지금은 육지이지만  교회 설립 당시만 해도 100 여 가구가 사는 야월도라는 작은 섬이었다..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배유지)은 1897년 개항도시.

목포에 목포 선교부를 설립하고 전남 서 남해안 선교에 주력했다.

유진 벨은 영광 지역 첫 교회 백수 교회(1903),를 시작으로 묘량 교회(1904), 영광 대 교회(1905), 등을 이미 세웠다.

당시 육상 도로가 열악하여 선박을 이용하여 서해안으로 북상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조기잡이로 유명하였고

이 일대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던 법성포로 가는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야월리 포구에 정박하게 되었다

야월도는 온갖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외국인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과 거부감이 있었던 섬이었는데

그러함에도 유진 벨은 원래 가려던 법성포로 다시 가지 않고 야월도에 머물면서 복음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야월도는 문맹률이 높았고 농촌 계몽 운동도 미치지 않았던 곳이어서 복음 전파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초가집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리고 주민은 당 집 앞에서 주문을 외듯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1908년 4월에 교회를 세우고 정식으로 전남 노회에 염산리 교회로 등록하는데 후에 야월교회로 개명한다

처음에는 조직 교회가 아니었으나 복음이 들어가자 문해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조직 교회로 발전해 나갔다

교인들은 농촌 계몽 운동과 애국 운동, 신앙 교육을 전개하였고. 후에 염산교회(1939) 분립 등 지역 복음화에도 힘썼다.

 

일제때는 야월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 운동, 생활 개선운동, 애국 사상 고취 등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신사참배 강요와 이에 대한 항거로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집사가 구속됐고 교회가 폐쇄됐다.

그들은 교인 가정에 모여 예배를 이어가다가 해방이 되자 교회를 재건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곧 재건된 야월교회는 조양현 허숙일 두 영수가 교회 강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닥친 이념의 갈등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족이면서도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씨앗을 뿌렸고

결국은 한국 전쟁이라는 동족 상잔의 비극을 불러왔다.

생각하기도 힘들만큼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하는 일은 이 조용한 마을에도 생겨났다.

교인이 고작 65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였지만 야월 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나 있었다.

6.25때 인민군과 함께 들어온 내무서원(북한의 사회안전원)은 야월 교회를 점령하고 인민 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했다.

교회를 빼앗긴  교인들은 가정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각각 몰래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

6.25 당시 야월리 마을 유지들에 대한 공개 인민 재판에 기독교인들이 반대한 것과

공산당이  9.28 수복때에 기독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국군과 UN군 환영 행사 준비를 한 것을

빌미로 삼아 공산군 잔당인 공비들이 마지막 철수 직전 기독교인들을 잡아 처형했다.

김성종, 조양현 영수와 최판섭, 최판원 집사는 염산 설도 수문 앞에서 개별적으로 끌어다 물에 빠뜨려 처형하였고

그의 가족들과 수많은 교인들은 두우리 쪽 큰 북재 넘어 공동묘지에 직경 6m 넓이의 구덩이를 파서

밤에 손과 몸을 묶어 구덩이에 생매장 시키고 죽이기도 했는데 한 구덩이에서 수십구의 사체를 발굴하기도 했다.

이어서 그 해 10월 어느 날 그들은 교회당 건물까지 소각해 버려서 그 곳은 몇 년 동안 교회 없는 마을이 되었었다.

순교 사건 이후에 야월리는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는 마을이 되어 졌다..

야월도 사람들에게 교회는 곧 죽음을 의미했고 교회 때문에 망한 동네라는 인식마저 있었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의 기피 대상 지역이기도 했는데 순교 1년이 지난 1951년에
야월교회서 분립해 나간 염산교회 청년들이

야월리 현지에 와서 고작 10여명의 어린이를 모아두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 교육을 하였다. .

어린이들은 구호 물자를 나누어 주니 그것을 얻으려고 나온 아이들이었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의 기피 대상지역 까지 되어 순교 이후 80년대 초까지 무려 20여명의 교역자가 다녀갈 정도로.

어렵고 열악한 형편었지만 그래도 다행히도 몇 뜻있는 사람들과 미 남장로교의 지원으로.

한 성도의 사랑채에서 다시 예배당을 짓고  시작하여 차츰 자리를 잡아 가게 되었다.

현재 이 적별돌 예배당은 1975년에 봉헌하였다

이층으로 된 교육관은 200여명이 집회를 할 수 있고 숙소도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학생들과 성도들의 수련회 장소로도 제공되고 기독교 순교 역사에 관한 강의도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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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 본당 예배실로 넓고 아름답다

잠시 들려 기도하고 본격적으로 순교 기념관을 돌아보기로 한다

기독교인 순교 기념관 전경인데  2009년 7월에 준공되었다

옆 마당에 세개의 십자가와 종탑.시비.그루터기 나무의 조형물들이 서있고 저만치 기독교인 순교탑이 있다

나무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 십자가로 올라가는 붉은 두 사람. 십자가 중심에 있는 물고기 형삳

그 옆에 대리석 판에 설명들이 쓰여 있어 이해하기가 쉽다

시인이신 고훈 목사님의 "당신들이 뿌린 순교의 피로" 시비

기독교인 순교 기념관 앞에서

기념관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전시실, 기념관, 추모관으로 나누어져 있

 한쪽 방에 고서 자료실이 있으며 이층에는 순교자들의 사진이 길게 자리하고 있다

일층 중앙홀에서 부터 이층까지 뚫고 올라간 "맞잡은 손"이라는 조형물은 이 순교 기념관의 상징이 되었다

2층에는 한국 교회 대표적인 순교자들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으며 예배실이 있다.

야월교회 원로 장로님이신 최종한 장로님께서 친절하게 전시관 안내와 설명을 해주신다

장로님은 그 당시 9살의 소년으로 그 때는 예수 믿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면하셨단다

그 후에야 예수를 영접하고 줄곧 야월교회를 섬기며 초대 장로를 거쳐 원로 장로님이 되셨다

 장로님은 마을 지도자로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 새마을 운동을 하게 되어 1978년에 군민이 주는 상을 받았고

훈장까지 받게 됨으로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게 되는데 선한 영향력을 주었다.

선교 기념관 건립은 영광군과 전남 도청의 지원아래 각 교회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건립되었다

전시장 입구 로비에 들어서면 양편 벽에 검은 대리석판에 영광 지역 순교자의 명단들이 걸려 있다

야월교회 순교자 명단 65명

염산교회 순교자 명단 77명

영광 대 교회 2명.법성 교회 6명,백수교회 30명( 염산교회 순교탑에는 36명) 묘량교회 9명

영광 대 교회의 미확인 순교자가 20여명 더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층에 있는 예배실겸 영상실

기념관과 순교자의 증거들을 영상을 통해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한다

순교의 현장을 목격하고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장로님은 비단 야월교회 뿐 아니라

영광의 순교자를 낸 교회들이 마을은 물론 한 교회 안에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함께 살며 신앙생활하고 있어

어느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다

허지만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며 우리가 다 사랑으로 품어야 할 대상들이리고 하신다

“형제들 아닙니까. 쉽지 않았죠. 이제는 형제를 얻었다고 봅니다.”

또한 장로님은 공산주의 대해 아주 철저한 반공 의식을 가지고 현 정권의 친북 성향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신다

만에 하나 대한 민국이 사회주의화 된다면 제일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이 박해의 대상이 될 것은 뻔한 사실이란다

전라도 지방에서 이런 장로님을 만나다니 의외여서 반갑고 고맙다

유진 벨 선교사는 전남 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1898년 당시 광주군 양림동 교회 설립을 시작으로  광주군 송정리 교회(1901), 해남군 우수영교회(1902),

광주 제일교회(1904, 일명 북문 안 교회), 옥과리 교회(1904), 담양읍 교회등 50여 교회를 설립하고 관리하였다

또한 목포 영흥 학교,정명 여학교(1903)를 세웠고, 광주 숭일학교(현 성일중ㆍ고)와

나무껍질 아 여학교(1908, 수피아여중ㆍ고)를 설립함으로써 이 고장에 기독교 교육을 하였으며,

광주 최초의 병원인 재중병원(현, 광주기독병원)설립에 깊이 관여하였다

유진 벨 선교사 가정은 무려 117년 동안 일가친척 50여 명이 대를 이어 지금도 한국에서 진행 중인 미국 선교사 가문이다

설명 보다 유진벨 선교사 가문도를 통해 이해를 돕기로 한다

너무 힘들어 지쳐서 전시실 공간 복도에서 잠시 휴식중....

고서 자료실은 김수진목사와 김나미 권사의 고서(古書)기증 도서 100여권과

 여러 목사님들이 기증한 고서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일층 중앙 홀에서 이충 까지 올라간 순교 기념관의 상징이 된 "맞잡은 손" 조각품

상하리 교회 추미호 사모님과 함께

맞잡은 손 조각은 화해와 용서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상처나고 부선진 손을 거룩한 손이 맞잡고 있다

1층 중앙 홀에서 이층까지 뚤고 올라온 화해와 용서의 손.

사진은 순교자들의 사진이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이 말은 일제의 탄압에 죽어간 제암리 교회 순교 기념관에도 있었다.

아래 사진들은 순교자들의 사진이다.

순교 기념관 마당 저편에 순교 기념탑이 서 있다.

야월교회 원로 목사이신 배길양 목사님이 부임하셔서 숨겨진 순교 신앙을 찾아 내어.

광주 노회와 성도들이 힘을 모아 1990년 11월 22일에 준공하였다.

순교기념탑 비문 (차종순 목사 호신대학교 총장 쓰신글)

순교 기념탑 건립에 즈음하여

1897년 목포에 선교부를 세운 미국 남 장로교 소속의 배유지(Eugin. Bell)목사 일행의 선교 활동으로

이곳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구 한말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곳에서도 친일적인 일진회를 반대하던 문영국,

정정옥씨등이 교회를 찾았으며 이렇게 해서 1908년 4월 5일 야월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

해방 이후 야월도가 연육되면서 부터 교인들이 지역 사회의 주축을 이루면서 교회는 성장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6월 22일 이 지역에 상륙한 숫자 미상의 인민군의 기습이 한 기독교인의 제보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갈등으로 교회 탄압을 가하던중 1950년 9월 부터 10월사이에 기독교인들을 살해하였다.

 교회는 불타고 교인 전체(65명)가 죽임을 당하여 이 지역의 복음화가 일시 단절된둣 하였으나

 이들의 거룩한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서 이곳이 믿음의 모퉁이 돌임을 오늘 까지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광주 노회는 정성어린 기념탑을 세우면서 이곳이 여호수아의 증언석이 되어서(수24:17)

65명의 귀한 순교의 신앙을 영원토록 전해주기 바란다.

 

백수읍 교회

야월교회와 기독교인 순교 기념관을 다 둘러보고 나서 점심을 먹고 사모님과 백수읍 교회로 향했다

백수읍 교회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갈 계획조차 없었는데 사모님께서 이 곳에도 들려 가자 하셔서 가게 되었다

영광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교회요 무려 순교자를 36 여명이나 낸 교회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아

백수읍 교회에 대한 자료조차 별로 없는거 같아 아쉽다

교회에 들어서니 염산 교회와 야월 교회와는 달리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교회에서 조금 성의있게 옛 선진들의 신앙 기록을 잘 찾아내서 보존하고 널리 알렸으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백수읍 교회는 처음에 대전리 교회(1903)였다가 후에 백수 교회로(1935년) 또 후에 지금의 백수읍 교회(1982)로 이름이 개명되었다

교회당 옆 정원에 영광군 선교 110주년 기념탑

성경의 첫장 첫절 창세기 1장 1절 그리고 마지막 성경 요한 계시록 22장 21절이 새겨진 돌판과,

하늘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손 모양의 형상이 조화를 이룬 조형물이 세워져있다

영광군 기독교 협의회가 2013년 10월에 백수읍 교회에 세운 영광군 선교 110주년 기념탑이다.

1898년 3월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선교사가 목포 양동에 선교부를 마련하고 선교에 임해, 1903년 목포 지역교회

(양동교회, 양동 제일교회, 새한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현지 전도인으로 사역함으로써 영광 지방 선교가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영광군 묘량 지역에서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한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 나오는 1910년까지 세워진 영광군과 주변 지역 내의 교회들을 살펴보면 영광군 관내에는

1903년 대전리 교회(현 백수읍 교회), 1904년 신천리 교회(현 묘량교회), 1905년 무령리 교회(현 영광 대 교회),

1908년 염산리 교회(현 야월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에는 거명되지 않았지만 1913년경에 영광에 존재했던 교회들은

덕산교회(군서), 봉산교회(백수) 그리고 포촌교회(군남)이다.

성경의 맨 첫장 첫절 창세기 1:1절 말씀과 성경의 맨 끝장 끝절 요한계시록 22:21절 말씀이  새겨져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현재 백수읍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이용률 목사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시며

더운데 오셨으니 시원한 데서 차 한잔 하고 가시라며 목회실로 안내하신다

목사님께서 차에 일가견이 있으신듯 손수 차를 끓여 따라 주시는데 얼마전 중국서 가져온 보이차 란다

목사님께서 백수읍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잠시 말씀해 주시고 현재 백수읍 교회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특히 ‘영광 행복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재가 복지 센터를 건립하고, 마을 독거 노인들을 방문 요양으로 섬기는 중이며. 

작년에 개원한 행복의 집에서는 재가 복지 사업 말고도, 5명의 노인들을 센터로 모셔와 24시간 돌보는 사업도 펼치고 있다..

조금 힘들어도 직접 모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재정도 투자하고, 교우들이 요양사 자격도 취득해 행복의 집을 열게 되었으며.

다른 농촌 교회들에게도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잘 운영해 보려 하신단다

외부로부터 큰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힘으로 운영하는 행복의 집 사역은 백수읍 교회 온 성도들의

큰 자부심이며, 특히 나이든 교우들이 안심하고 노후를 맞을 수 있는 안전망이다.

뿌리 깊은 역사, 자랑스러운 전통, 역동적인 현재. 백수읍 교회 가족들은 그 모든 것들을 은혜로 여기며 감사한다

 

현재 월드 비젼 사업에도 적극 참여하며 수많은 선교사들도 길러내었다

 장우환 장진환 박상길 김안조 조강석 목사 등과 러시아 저득수 선교사, 베트남 표영일 선교사 등

 

수많은 사역자들이 백수읍 교회라는 요람에서 길러졌다.

한편으로는 교회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태국에 꼼옴엣 교회당과 양비양 교회당을 건축하고,

치앙마이 선교센터를 후원하는 등 농촌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 선교로 지경을 넓혀왔다.

현재 8대 담임 목사인 이용률 목사님의 교회 자랑이 대단한데 자랑할만 하다.ㅎㅎㅎ

 

 

2009년 현재의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는 돌비를 함께 세웠다

백수읍 교회는 특이하게도 한국인들 스스로 시작한 초기 역사를 가지고 있다

유진 벨 선교사의 조사였던 변창연과 김문삼 등의 전도로 이 고을에 살던 표익선 문양삼 등이 먼저 예수를 믿게 됐고,

이들에 의해 1903년 1월 20일 백수읍 교회의 전신 대전리 교회가 설립됐다는 것이 조선 예수교 장로 사기의 기록이다.

초창기에 유진 벨 선교사와 뉴랜드(Newlandm Leory Tate, 한국명 남대리) 선교사의 지도를 받던 대전리 교회는

선응칠 김기찬 박인원 등 한국인 교역자들이 강단을 이어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몇 차례의 이전을 거쳐 1963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고 예배당을 건축했으며,

1982년 현재의 백수읍 교회라는 명칭으로 교회 이름도 바꾸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장갑수 집사와 김진원 영수 등 여러 성도들이 공산군과 좌익 세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복음의 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그 사이 백수 남부 교회를 비롯해 백수중앙교회 백수 북부 교회 백수 교회 등 여러 교회를 분립하며,

백수면 일대에 기독교세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산실 역할을 하였다

 

오늘 하루 온 종일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수고해 주신 추미호 사모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