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23. 신안 증도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bonitahuh 2022. 10. 21. 10:34

아침을 먹은 후 목사님. 사모님. 우리 부부 이렇게 신안 증도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사모님께서 자상하게도 아이스 박스에 옥수수며 음로수며 과일까지 넣어 준비하시고

탁 트인 서해 바다를 바라보며 신안군 증도로 향했다

 

전라남도 신안은 무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하여 ‘천사의 섬’으로 불리어진다

전남 신안군 내 수많은 섬 중 하나이자 주 섬인 증도(曾島)는 2012년과 2015년 한국 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서 전국 2위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은 곳이다.

 

증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우 시티’로 선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청정 해역의 아름다운 섬이다.

증도는 112개의 섬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연육교가 들어서면서 육지가 되어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유·무인도를 포함한 33.62㎢ 면적의 면(面) 중심지가 증도다.

영광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두어시간 남짓 달려 신안 증도에 도착했다.

증도를 빛나게 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순교자, 그리고 문준경이라는 한 여성의 이름이다.

인구 1800여명 정도되는 주민의 90%가 기독교인이며 불교 사철이나 성당을 볼 수 없고

그리 크지 않은 섬 안에 무려 11개의 교회가 세워질 정도로 복음화율이 높으며

한국 기독교역사와 특별한 순교의 역사가 흐르는 곳이다

도서 지역 복음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전남 신안군 일대 낙도들을 구석구석 누비며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숱한 교회들을 세웠던.문준경 전도사는 바로 이 섬에서 순교로 사역을 마감했다.

 

2012년에 출간된 '천국의 섬, 증도'(홍성사)는 문준경 전도사와 그의 자취가 서린 증도의 곳곳을 소개하는 책이다.

글을 쓴 유승준 작가는 증도를 ‘최소한 두 번은 가야 하는 섬’이라고 말한다..

첫번째는 아무 것도 모르고 무작정 가야 하고, 두번째는 문준경 전도사에 대해 알고 나서 공부 좀 한 다음에 가야 한다. .

이렇게 두 번을 가면, 가지 말라고 해도 세번째로 증도를 찾게 된다고 한다.

 

증도는 무작정 찾았을 땐 ‘즐거운 섬’, 문 전도사를 알고 다시 찾을 땐 ‘거룩한 섬’,.

세 번째로 찾았을 땐 ‘즐겁기도 하면서, 한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천국의 섬’이다

크리스천에게 증도는 순교자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발자취 때문에 손 꼽히는 성지가 되었다.

그래서 증도는 천국의 섬, 기적의 섬, 빛과 소금의 섬으로 불리워 지기도 한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전경이다.

총 대지 8.418㎡(2.550평)에 본관 1395㎡(420평). 생활관1084㎡(328평)으로 2013년 5월 21일에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불과 400m 거리 해안의 순교지를 바라 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한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성결교단이 모금운동을 벌여 건축한 기념물로.

한국 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녀의 순교 신앙과 삶을 기념하고, 순교 정신을 미래 세대에 전하기 위해 .

관련 자료 전시물과  영상으로 더 가깝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3층짜리 건물인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과 죄측에는 생활관으로 건물 2동이 자리하고 있다

 정원에는 조형물과 하연 십자가 탑 추모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문준경의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신안군 증도면사무소 옆 증동리교회에 문 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원래 그의 무덤도 이 증동리교회 뒤 편 산에 있었지만,

2005년 증동리교회 앞바다 즉 문 전도사의 순교 현장인 우전리 터진목으로 이전했다.

감동적인 드라마와도 같은 그녀의 생애와 신앙을 기리기 위해 순교 현장인 우전리 터진목 백사장에는

순교기념비와 문 전도사 묘소. 문 전도사 약력을 새긴 비석등이 있어

지금도 문 전도사의 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문 전도사는 신안군 섬 일대를 직접 발로 오가며 10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한 해에 고무신이 9켤레나 닳을 정도로 전도에 앞장서면서, 가난한 집엔 음식과 의복을 가져다 주고,

임산부에겐 산파 역할을 자처했으며, 염병이 퍼진 동네에 들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섬겼던

그녀의 희생과 헌신은 주민들에게 복음과 함께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으로 이 곳에서 159명의 목회자와 81명의 장로가 배출됐다.

한국 대학생 선교회 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 성결교 이만신 원로목사(부흥사) 이봉성 목사. 이만성 목사

정태기(크리스찬 치유상담 대학원 대학교 총장) 목사.순교관 시비를 쓴 시인 고훈 목사 등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들이 그 열매들이다..

순교관으로 들어가는 외부 입구 계단에 성결교의 중심 교리인 4중 복음이 선명히 보인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란 글자가 4개의 아치문 형태에 순서대로 보인다.

성결교는 이 4중 복음을 전도의 표제로 삼아 복음적으로 성장해 왔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내다보며 찍었다. 아름답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터에서 / 시 고훈  글 이행선.

 

증도의 순교자 성결의 어머니 문준경.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열일곱에 시집온 갯벌.

태문막힌 은총 소박 받고 / 평생 버림당함으로 살아낸 고난의 세월.

 

당신은/엘리야 같은 장석초 김응조 이성봉 이명직 목사 만나.

신유와 중생과 재림과 성결의 겉옷 받아 입고 / 미신과 우상과 가난과 무지의 바다를.

복음의 땅 순교의 섬으로 만든 신안의 잔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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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기쁘면 당신은 미소로 웃음이 되고 / 저들이 울면 당신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저들이 헐벗으면 당신은 한 벌 옷이 되어 입히고 / 저들이 발벗으면 당신은 한 켤레 신이 되어 신기고.

저들이 어두우면 당신은 빛이 되어 눈뜨게 하고 / 저들이 배고프면 당신은 밥이 되는 바보 목자.

저들이 병들면 당신은 몸으로 약이 되신 성녀여.

 

1950년 시월 오일 / "이 반동 간나 문준경은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다".

짐승 같은 공산당원 죽창에 찔려 / 갈기갈기 찢긴 피투성이 몸으로 여기 순교하실 떄.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이 계집종의 영혼을 받으소서".

그날 하늘도 바다도 땅도 울고 /같은날 당신이 씨 뿌린 이 판일 장로 가족과 성도들 48명.

임자도 진리교회에서 함께 순교한 거룩한 갈보리 신안이여.

 

당신 순교로 낳은 백정희,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박성철.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같이 천천만만을 이룬 양무리들 / 우리 같은 부족한 종들도.

당신 순교의 빛을 받아 남은 자의 아픔으로 여기 서 있습니다..

 

증도의 순교자 성결의 어머니 문준경/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들의 능력은 당신을 죽이는 것이나/당신의 능력은 죽는것입니다.

 

문준경전도사 순교시비.

1891년 2월 2일 암태면 수곡리 출생 / 1927년 3월 5일 목포 북교동교회 입교.

1950년 10월 5일 이곳에서 순교하시다.

순교기념관 왼편으로 있는 생활관은 순교신앙 교육에 활용되고 있다

현재 중동리 교회

옛 중동리 교회 이다

문준경 전도사님께서 본 교회가 세워진 이곳에 1933년에 최초 기와 건물로 교회를 세웠고,

이후 증동리 교회 교인들이 순교지인 교회 앞 터진목 솔무등에서 모래로 블록을 찍어

머리로 이어 날리고 져날라 이인제 목사님께서 리모델링 재건한 교회이다

문준경 전도사와 백정희전도사 는 일제 강점기때 경방단에게 빼앗긴 교회를 1945년 광복 후되찾아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재판 등 갖은 고난을 겪다가 순교하실때까지 이 교회를 섬겼다

현재까지도 옛 증동리 교회 대지를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교회 외벽에 그려진 지도는 문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 위치들을 그려 놓았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니 바로  로비에 문준경 전도사님(文俊卿, 1891~1950)의 동상이 서 있다

한국의 테레사 수녀, 섬마을의 어머니, 여자 사도 바울로 불리워지고 있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문 전도사의 생애와 삶, 성결교회의 역사 등을 담은 전시실과 예배실, 생활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시관 일층은 ‘한국의 성결교회’ ‘인간 문준경 고난의 삶’ ‘사역을 준비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다’ 등 제목의 코너들이 나타난다.

문 전도사를 이해할 수 있는 전기(傳記)와 전시물들이다.

계단을 걸어 2층으로 올라가면 그가 사용한 ‘태반 단지’와 성경책 등 유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은 ‘박해와 헌신의 삶’ ‘순교 더 큰 사랑의 실현’ ‘그가 남긴 열매 교회들’ ‘그가 남긴 열매 사람들’ 등을 주제로 구성돼있다.

그가 전도하는 과정에서 1년에 고무신 9켤레가 닳도록 걸었다는 노두길이 꾸며져 있어

바닥에 그려진 발자국을 따라 직접 걸어 보며 체험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이곳은 2층 면적의 약 1/3을 차지하는 크기의 세미나실이 있고, 3층은 예배당이다.

각 층 사이 휴게 공간에는 문준경 전도사께 드리는 헌시가 액자에 담아 줄지어 서 있거나 벽에 걸려 있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 장면을 부조한 동판을 벽에 걸어 놓았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증동리 교회에서 800m 떨어진 바닷가에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내무서원들이

중동리교회 교역자 문 전도사와 그녀가 딸처럼 사랑한 30대 초반의 백정희 전도사를 백시장에 내 팽개쳤다

내무 서원들은 인민군, 빨치산, 자생 공산당원들로 이들은 유산 계급과 미 제국주의자 타도를 외치며

무자비한 살육과 온갖 악행으로 주민을들 괴롭히고 먼저 기독교인들을 괴롭혔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으로 사탄의 이념 주입은 빠르게 공동체를 파괴했다.

그들은 전도를 많이 한 문 전도사를 “ 새끼 많이 깐 씨암탉” 이라며

문 전도사와 백전도사를 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요, 종교라는 아편을 퍼뜨리는 인민의 적으로 여겼다.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로마 군병의 모욕과도 같았다. 

문 전도사는 숨을 거두기 전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죽어가는 목숨에 총대와 칼이 날아들며 확인 사살로 이어지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와 전도 많이 한 씨암닭이란 이유로....

후에 백정희 전도사는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으나 문 전도사는 5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20년의 세월 동안 생과부가 된 그녀는 결국 목포로 나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다가

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 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 성결교회였다

당시 유명한 부흥사요 그 교회 담임목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 문준경은 전도에 열성을 보이는 성도로 바뀌었다.

하나님께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리라 서원하고, 나이 40세에 서울 경성 성서 학원(서울신대 전신)에서 공부를 했다.

 

학생 신분으로 문준경은 1932년 임자도(남편이 소실과 살고 있던 곳)에 내려가 처음으로 진리 교회를 개척하였고

일제가 식민통치의 강도를 날로 강화하던 1935년 2월 증동리교회 ,3월에는 대초리교회,

이듬해 재원리, 방축리, 우전리에 기도처를 열었다.

1943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목포 경찰서에 불러가 고문을 당했고 일제는 1943년 말에

모든 교회를 강제 해산해 버렸고 6.25사변이 일어났다.

1950년 진리교회 성도 48명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집단 순교를 당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지역 전체가 인민군에게 넘어가서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공산주의자들이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신학교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온 문 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또는 노두길을 걸어서 이 섬 저 섬 무 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컬레나 바꿔신었다고 전해진다.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문 전도사는 큰 보따리를 짊어지고 집집마다 심방을 다녔다.

그 보따리 속엔 전국의 교회로부터 후원받은 연고, 소화제, 항생제 등 온갖 약품이 가득했다.

피부병이 있는 사람에겐 약을 발라주며 기도해줬고, 배가 아픈 사람에겐 배를 어루만지며 기도해줬다.

 아기 낳는 여인에겐 산파 역할을 하며. 병원도 약도 없던 섬에서 문 전도사는 간호사이자 종합병원이었던 셈이다.

그 보따리 속에는 문 전도사가 부잣집이나 잔칫집에서 챙겨온 누룽지며 각종 음식들로 가득하였고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에게 나눠줬던 것이다.

문 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바닷길에 놓인 징검다리 노두길을 걸으며 전도하는 문준경 전도사

물때를 못 맞추어 때로는 물에도 빠지며 여러번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징검다리를 건너 이 섬 저 섬으로 전도와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 다녔다

그녀의 손에는 항상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 있었는데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이며 필요한 물품들이다

문 전도사가 바닷길에 놓인 징검다리를 지나 전도여행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도 노두길을 걸어본다

유난히 목소리가 아름다운 문 전도사는 찬송하기를 좋아했는데 어디서나 그녀가 찬송을 부르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그녀가 부르는 찬송 그 자체가 복음이었고 전도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이 되었다

문 전도사의 신앙의 멘토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인생길에 휼륭한 멘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이고 힘이 되는가

하물며 신앙생활 하면서 휼륭한 멘토를 만난다는것은 믿음의 성장과 함께 축복이고 은혜이다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우리들은 서로 서로에게 믿음의 멘토가 되어 주면 좋겠다

문준경 전도사에게 영향을 받은  목회자는 이 밖에도 이만성. 이봉성.신복윤 목사등.... 다수가 있다

이 판일 장로는 1934년 이성봉 목사의 집례로 여신자 5명과 더불어 진리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고

동시에 여신도 3명과 함께 최초의 집사로 임명 받았다. 그는 동생 이판성의 가족과 주민 전도에 힘썼다.

교회 모든 일에 물심양면으로 헌신적으로 일하며 방학이 끝나 문준경 전도사가 학업을 위해 상경하면 대신 교회를 돌보았다.

일제 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그의 신앙 절개를 꺽지 않았다.

해방 후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된 교회를 재건하고 1946년 장로 장립을 받았다.

1950년 6.25 동란이 일어나 지역이 공산화되어 교회 예배가 중지되자 같은 해 9월24일 밀실에서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목포 정치보위소로 끌려가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목포에서 석방된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임자도 진리교회로 돌아온 지 1주일 되는 10월 5일 새벽 2시,

공산 해안경비대의 소장이 악도들을 인솔하고 그와 이판성 집사의 집을 급습,

22명의 가족과 36명의 교인들을 묶어 처형장으로 끌고 가 무참히 살해했다.

이렇게 임자 진리교회 48명의 성도들은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구덩이에 던져져서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당시 광주에 있어 화를 면한 그의 장남 이인재는 1950년 10월 30일 국군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가족 22명은 물론 진리교회 성도들이 처참하게 순교 당했음을 확인하였다

원수들을 모조리 잡아 야산공터 처형장에 세워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해 멈칫했다.

“아들아, 내가 그들을 용서했으니 너도 그들을 용서하라!” 이인재는 일시에 온몸의 힘이 쭉 빠져 힘없이 쓰러졌다.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린 이인재는 정벌 대장에게 부탁하여 악도들의 처리권을 위임받고 원수들의 결박을 풀어주며

“당신들이 죽인 내 아버지가 당신들을 용서하셨으니 나도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고 다시 혼절한다.

 

그 후 이인재는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었고 자녀들의 결혼식에는 주례까지 맡아 축복하며 사랑을 베풀었다.

이인재는 아버지의 농지를 팔아 그 지역에 기념교회를 세우고 악도들과 그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하도록 했다.

후에 그는 임자 진리교회에서 34년 시무한 후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고 또한 그의 후손들도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대한 성결교단은 1990년 7월 임자진리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진리교회 앞마당에

‘48인 순교기념탑’을 세워 그들의 순교 신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문 전도사가 교회에서 사용했던 종

1951년 2월 2일 문준경 전도사님의 환갑날 호남 지방회 이름으로 정식으로 장례 추도식이 있었다.

호남지방 성결교 남녀 교역자들이 다 모여 건을 쓰고 상복을 입었다.

전도받은 교인들과 시가, 친정, 일가 친척들.도움받고 못잊어하는 사람들. 그를 죽였으나 용서받은 식구들,

동네 사람들 등...구름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상여 뒤를 따랐다.

서울에서 온 어느 성도는 "김구 선생 장례식보다 추모 인파가 많다."고 했을 정도로 장례식은 장엄하고 휼륭햇다.

고 문준경 전도사의 시신은 정씨 가문으로 시집와서 평생 남편에게도 버림받고 고생만 하다가

집을 떠났으나 시댁식구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 원망하고 한탄하지 않고

평생을 착하게 헌신하였기에 온 문중이 의논하여 정씨 문중 선산 중앙에다 안장하게 하였다

성결교회의 역사와 교리에 대한 설명이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3층에 있는 영상실겸 예배실인데 문준경 순교 기념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고 할 수 있다

 

전시실 복도 휴게실에 문준경 전도사에 대한 헌시들이 액자에 담아 진열되어 있다.

그 중 몇개만 골라 순례기에 올려본다. 창으로 해가 강렬하게 비치니 역광이라 사진이 어둡다

순교기념관을 나와 해안 길로 1㎞ 정도 이동하면 길가에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현장인 순교지가 보인다.

순교 당시 긴박했던 상황 속에서도, 교회와 성도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의 뜨거운 순교신앙의 현장을 이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갯벌 섞인 넓은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그의 무덤과 기념비 등도 이곳에 모여 경치를 바라보고 있다.

. ‘고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라고 적힌 비석  5개와 그의 묘가 놓여 있다.

왼쪽부터 1950년에 맨 처음 세운 순교비(하얀 돌비)

순교 추모비 문준경 전도사 지묘. 추모비. 순교지 기념비석, 문준경 전도사 약력 돌비

팻말에 적힌 순교지를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사랑을 전하고 실천한

그녀의 신앙과 숭고한 정신은 오늘날까지 목회자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성경책 처럼 펴진 책장에 문준경 전도사의 약력이 새겨져 있고 아래는 순교장면을 부조해 놓았다

1964년 그의 신앙의 제자들은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 전도사님이 누어 계시다’는 추모석을 세웠다.

추모석 뒷면에는 "  빈한 자의 위로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은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압해, 지도, 임자, 자은, 암태, 안좌 등지에 복음 전도, 진리 증등리 대초리 방축리 교회 설립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고 자기를 위하여는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대의 이름에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히 깃들기를. 우리들의 어머니."

평소에 그 분은 양딸인 백 전도사님에게 자기는  장손도 아니고 또한 나갔으니 정씨 문중 선산에 묻힐 수 없으니,

자기가 죽으면 그 산 아래 밭의 한 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했다.

순교 1주기 때 이 얘기를 들은 정씨 문중에서는 모두 모여 문중회의를 열었다.

결국 그 분은 문중을 빛낸 분이니 선상 중앙에 모시자고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지금 그 분의 묘는 정씨 문중 선상 한가운데 있다

순교 기념관에서 갖고온  "순교자 문준경과 그 의 사람들 "에 보면 김준곤 목사님께서 이렇게 쓰고

또 다른 자료에도 정씨 문중 선산에 묻히셨다는데

순교지에 있는 '전도사 문준경 지묘'는 어찌된건지 모르겠다.

순교 직후 중동리 교회 뒷산에 묻었다가 이 곳으로 이장했다고도 하고? 아무려면 어때서...

날씨도 너무 더웠고 또한 손수 운전하시며 같이 가주신 목사님과 사모님께도 너무 죄송스러워

진리교회나 다른 곳에는 더 가보질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같이 가주셔서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이 많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