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부터 한 번 가보아야지 하던 소록도를 이제서야 가보게 되었다.
"작은 사슴 섬"이란 이름의 소록도는 섬 모양이 사슴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푸른 남해바다와 진분홍 배롱나무 꽃 가로수를 지나가며 멋진 소록대교를 달려 소록도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소록대교는 선박으로만 갈수 있었던 소록도를 육지와 연결해 주는 다리로 '거금도 연륙교'라고도 한다
전남 고흥군 도양읍에 위치한 국도 29호선을 구성하는 다리로 고흥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다리다
길이는 1,160m이며 연결도로를 포함하면 3,460m에 이른다.
12개 교각에 중앙 부분에 주탑 2개가 케이블로 연결된 형태의 현수교로, 왕복 2차선의 도로로 구성되어 있다
2001년 6월에 착공하여 완전 개통은 2009년 3월에 하였다
소록도에 도착하니 입구에서부터 안내판과 요소 요소 설명판들이 사진과 함께 붙어 있어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전체 면적 약 3.8㎢의 소록도는 여의도의 1.5배인 15만평 정도로 원래는 고기잡이와 농사를 짓고 사는 평범한 섬이었다.
소록도가 한센인의 한(恨)이 서린 섬으로 바뀐 건 일제 강점기인 1916년 2월부터다.
이때 조선 총독부가 현재 국립 소록도 병원의 전신인 ‘자혜의원’ 설립을 공포했기 때문이다.
자혜의원은 나병 전문 병원으로 한센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여 치료하는 곳이었다
소록도가 위치한 고흥군 지도와 관광 명소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시간이 없으니 우선 소록도만 보고 갈 수 밖에 없다.
한달에 한 번 멀찌기 마주 보고 서서 자녀를 바라만 보아야 했던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으며.
이그러진 모습으로 변한 부모를 보는 어린 자녀들은 또 얼마나 무섭고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됐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려오며 착찹하기 이를데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병원과 한센 박물관으로 1km정도 걸어가는 나무 테크 해안길이 참 아름답다.
몹쓸 병에 걸린것 만도 서러운데 가족은 물론 사람들과도 철저히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저들의 한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1984년 5월 4일 교황 바오로 2세가 소록도를 위로 방문하였다.
.한센인들은 소록도를 찾아준 교황에게 엎드려 인사했고 교황은 차에서 내려 직접 한센인들을 마주하며 위로했다.
소록도는 교황의 방문을 앞두고 도로 및 기반 시설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져 주변 환경이 한층 나아졌다.
교황 방문은 한센인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했는데 병원 직원과 한센인이 하나의 선창을 함께 쓰게 된 것이다
당시 소록도를 찾은 기자들이 직원과 환자가 서로 다른 선창을 쓰고 있는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환자들만 드나들며 이용하던 선창이었던 제비 선창은 그때부터 폐쇄됐다.
입구에서 내려 한센병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에 군데 군데 소록도에 관한 이런 설명판이 붙어 있어
천천히 읽으면서 소록도에 대해 알아가며 걸어간다.
일본 놈들은 여기까지 신사(神社)를 차려놓고 환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 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워서 참배하는 것을 말한다
신토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만신 사상에 가까운 신앙으로 그들의 고유 종교요 국수사상의 핵심으로
한일 합방 직후 일본은 한국 곳곳에 신사를 차리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참배하게 하였다
현재 일본에는 8만여개의 신사가 있다고 공식 집계하지만 사실은 일본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작은 신사까지 합하면 30여만개가 넘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무려 8백만이 넘는단다.
신사마다 각기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는데 모든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것은 물론
그들의 토속신들과 그 지방의 위인들을 신으로 모신곳도 있고
최근에 아베 총리가 참배하여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도꼬의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유신 지사들이나 군인 등,
근대 일본에 기여한 인물들을 모시고 있어 신사라기보다는 국립묘지같은 성격이 강한데
주변국 침략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신(영령)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야스쿠니 산사에는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들도 포함되어 있어 국제적으로 비난과 논란이 되고 있다.
아무리 자기 나라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지만 남의 나라 침략 전쟁에서 죽은 자를
신으로 받들어 참배하다니......국제적인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
이렇게 온갖 우상숭배를 하는 나라를 우리 하나님께서 그냥 두고 보실까?
외국인으로서 어찌 이리도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소록도에 오기전 이 두 수녀님에 대한 아름다운 스토리는 벌써 십 수년 전에 알고 있었는데
다시 공적비와 설명 판넬을 보니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두 수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록도에 와서 무려 43년간이나 봉사하다가 70세가 되어 거동이 불편해지자
오히려 짐이 된다며 편지 한장 달랑 남기고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홀연히 떠났다
지난 2016년 4월 소록도 국립 병원 100주년을 맞이하여 마리안느 수녀가 한국을 떠난지 11년만에 한국에 왔다
마가렛 피사렛 수녀는 현재 치매를 앟고 있어 인스부르크 요양원에 있어 오지 못하였다
정부는 두 수녀에게 히딩크 감독에 이어 두번째로 대한민국 명예 국민증을 수여하였고
두 수녀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곧 나올 예정이며 고흥군에서는 노벨 평화상을 추진중에 있다한다
소록도 곳곳에 있는 건물들과 이야기는 모두 슬픈 사연과 역사를 담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고운 바다 물빛과 함께 멀리 보이는 소록대교가 아름답다
멀리 한센 박물관, 생활 문화관 건물이 보인다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동행해 주신 고마우신 추미호 사모님과 이상표 목사님.
해방 된 후에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니 그동안 얼마나 한센인들의 인권이 철저히 말살되어 왔었는지 알 수 있다
국립 소록도 병원 한센병 박물관 전경으로 국립 소록도 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해 2016년 6월에 개관하였다
한센 박물관 입구에 있는 익살스런 마네킹과 이마를 맞대고 뽀뽀 인사 중 ㅋㅋㅋ
버튼을 누르면 영상과 함께 해설도 나오고 또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해당 번호를 누르면 전시물에 대한
해설이 나오는데 각국 언어로 들을 수 있다
절절하고 서러운 이 소록도의 소리 한구절이 스러져간 꽃잎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워라!
한센병은 1873년 노르웨이 의사 한센(Hansen)에 의헤 발견되었다
원인균은 나균((Mycobacterium leprae)이며 호흡기나 피부접촉에 의해 감염되며 잠복기는 3~9년이다
발병부위는 피부, 말초신경. 상기도 점막. 눈 등으로 법정 전염병 제 3군으로 지정되었다(2000.8.1. 나병(한센병))
BCG 결핵 예방 접종을 하게 되면 학술적으로는 30 ~ 80% 예방이 되며
선진국인 경우 보건학적으로나 예방학적으로 치료가 잘되어 BCG 결핵 예방 접종만 해도 거의 걸리지 않는다
결핵이 Mycobacterium tuberculosis이고 나균이Mycobacterium leprae 인데 종이 똑같아 치료약이 비슷하다
설령 한센병에 걸렸다 해도 2주~2개월 정도 약을 복용하면 전염성이 전혀 없고
5∼20년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된다.
현재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 대부분은 한센병 후유증에 따른 재활 치료 대상자들이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한센병에 의해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센인들의 글과 그림 출판된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소록도 한센인들이 출판한 책들.
최근 2018년도 11월에 소록도 병원에 입원중인 한센인 작가 강선봉씨(79세)의 시집
'곡산의 솔바람 소리'가 일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강씨는 1939년 경남 진주에서 한센인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8살 때인
1946년 어머니와 함께 소록도에 왔다
시집에는 그가 1962년 섬을 탈출하기 전까지 어머니와 격리된 채 살았던 보육소 생활, 발병 이후
마을 생활 보조원으로 일했던 경험,
소록도 내 한센인 자녀들이 다녔던 소학교 풍경 등 한센인으로서 겪은 기구한 삶이 녹아 있다
2010년 11월 소록도 병원에 재입원한 강씨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6년부터는 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한센인들로 구성된 예술동호회 ‘해록예술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센인들은 서예, 악기 연주 등 다양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소록도에서 사용했던 말. 말. 말.
소록도 교회는1922년 일본 성결교단 다나까 신사부로 목사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구북리 1호사에서 예배드린 것이 시작이다.
다나까 목사는 월1, 2회 오는 순회목사였기 때문에 통역관 박극순 씨를 교회지도자로 세워 주일과 수요 예배를 주관케 하였다.
1923년에는 교인수가 120명에 달했고 남자40명, 여자4명이 구북리 서해안 백사장에서 다나까 목사에게 최초 세례를 받았다.
한편 병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하나이 원장은 일본 천조대신 신당을 예배 처소로 허락하였는데,
1926년 다나까 목사가 부임하고, 1928년 예배당을 신축하였다(현 북성교회)
이어 같은 해 10월24일에는 남부 예배당(현 남성교회)이 세워졌다.
소록도 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 목사이셨던 김정복 목사님은 6.25 때 공산군에 의해 총살 당하는 순교를 하셧는데
소록도 중앙교회 뜰에 김정복 목사님 순교비가 세워져 있지만 출입 통제 지역이라서 가보지 못하였다
기독교가 가장 먼저 교육과 의료 봉사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이곳 소록도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기독교가 1922년 일본 성결교단이 교회를 세운것을 필두로 소록도 마을에 무려 일곱 교회가 세워졌으며
천주교는 1935년에 천주교 한센병 환자가 소록도에 온 것을 계기로 1943년에사 이 곳에서 첫 미사를 드렸고
원불교는 1977년에 이곳에 원불교 교무가 왔다
현재 (2017년 기준) 소록도에는 인구 감소로 인하여 교회 5곳, 성당 2곳, 원불교당 1곳이 자리하고 있으며 불교 사찰은 없다
국립소록도 병원의 전경이다
소록도 병원의 역사는 1916년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으로 시작되는데 이 병원은
당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문 의원이었다.
한센인을 소록도에 수용하기 시작한 건 자혜 의원이 들어서고 이듬해 4월 병사(病舍)가 건립되고 부터다.
평범한 명칭과 달리 자혜 의원은 의료 시설이라기보다는 격리 수용 공간에 가까웠다
일제는 전국에서 뚜렷한 주거지 없는 한센인들을 강제로 끌어 모아 소록도로 보냈다
현재 소록도에는 병원을 비롯해 7개 마을에 550여 명의 한센병 환우들이 거주하고 있다.
여기에 의료진과 자원봉사자가 200여 명에 이르고 해마다 환우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한센인과 같이 생활하기를 꺼려하는 일반인의 인식과 가족과 오랜동안 헤어져 지냈던
한센인들은 소록도 병원 뿐 만 아니라 전국 정착지 90여 곳에서 살고 있다
지금 전국에 등록된 한센인들은 13,000여분 정도이지만 실제 양성으로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200여명 정도 뿐이다
평균 년령은 69세이며 60세 이상이 81%이다
현재 소록도 병원의 역할은 환자들의 치료·재활과 함께 복지 서비스 제공에 맞춰져 있다.
한센병의 감소로 인하여 아마도 수년내에 국립 소록도 병원은 한센 전문 병원만이 아닌 일반 병원으로 전환될것 같다
1974년 1월에는 소록도 한센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다.
한센인의 생활 공간과 외부 세계를 갈라놓은 총 2㎞ 길이의 경계 철조망이 제거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소록도는 유독지대와 무독지대, 직원지대와 환자지대 등으로 구분된 상태였다.
철조망 철거는 단순히 물리적인 변화를 넘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왔던 한센인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됐다.
1980년대는 치료 본관이 세워지는 등 소록도 병원의 시설과 의료 인력이 점차 보강되는 시기였다.
1976년 13만원에 불과하던 환자 1인당 연간 예산은 1985년 69만원으로 늘어 현재는 250만원이 넘는다.
1995년 4월 소록도에 ‘자원 봉사자의 집’도 들어섰으며 현재 의대생,·군인,미용학원 관계자·
종교단체 관계자 등이 수시로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의 벗이 되어주며 봉사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소록도는 젊은 층의 새로운 환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아 한센인의 고령화에 따라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고 노인 전문병동 신축과 리모델링이 이뤄졌다.
2009년 노인재활 병동이 새로 건립됐고 2010년에는 환자들이 거주하는 병사 내부도 현대화됐다.
현재 몸이 불편한 한센인들은 소록도병원 건물 내 입원실에서 지내지만
건강을 회복한 환자들은 주거용 건물에서 생활한다
한센인들의 거주지역은 저들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출입통제가 되어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그 곳에 종교시설도 있고 엣 자혜의원과 아나이 원장 창덕비.순록탑등이 있지만 보지 못하였다
국립 소록도병원 본원 우측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담에 총 길이 110m, 높이 3.05m, 전체 면적 211㎡에 옹벽에
"아름다운 동행. 소록도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타일과 대리석으로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든 웅벽 벽화가 있다
850장의 화강석과 대리석을 붙여 음각하고 채색 하는 암각기법으로 완성했다.
박대조 작가의 작품으로 2013년 4월 30일에 웅벽 벽화 준공 제막식을 가졌다
이 벽화는 과거 소록도 주민들의 인권유린의 상처를 극복하고 그들의 삶을 과거 현재 미래로 반영하여 형상화한 것이란다
과거는 상처 입은 소록도 한센인들의 삶을 '피 흘리는 아기 사슴'으로 표현하였고,
현재는 소록도 주민과 소록도 병원 임직원, 재능기부 작가, 남포 미술관 관계자 등 약 450명의 얼굴들을 담고 있으며,
미래는 한센병이 사라진 아름다운 소록도의 푸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아기 사슴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남포 미술관 곽형수 관장은 "소록도는 과거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한센인을 격리치료 해오던 섬으로
그들의 애환이 서린 역사적인 현장이기 때문에 거주하는 한센인 모두가 완치에 대한 확신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잘 가꾸어진 소록도 중앙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초입에 좌측으로 소록도 자료관이 있고 우측으로 감금실과 검시실의 엣 건물이 있다
별로 크지 않은 자료관에는 소록도의 과거와 현재가 전시되어 있어
소록도의 아픈 역사와 유물들을 한 눈에 돌아볼 수 있다.
이곳에는 소록도 병원의 연혁,
원생들의 노동과 수난, 수호원장 동상 건립과 살해 및 하나이원장 창덕비 건립 소개,
해방후 84명 원생들의 참사 전말, 오마도 간척공사.
추진경과,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및 김대중대통령 부인 이희호여사 방문,
원생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 및 집기비품, 소록도의 은어 소개 등 다양한 기록물과 사진,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별로 크지 않은 공간에 소록도의 역사를 한 눈에 볼수 있게 질서있게 잘 정리하고 전시한 유품들과.
>요소 요소 설명 판넬을 통하여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알아간다.
한센인 시인 한하운과 그의 저서들
공원으로 들어서지 않고 자료관을 둘러보고나서 맞은편 공원 입구 우측에 제2 자료관인
감금실과 검시실이 나란히 있어 먼저 보고나서 공원으로 가려고 한다
검시실과 감금실은 등록 문화재 66호. 67호로 등록되어 있다
낡고 더러운 검시실과 감금실에서 처참하게 인권유린을 당했던 과거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어
검붉은 벽돌 건물이 진짜 핏빛처럼 슬픈 앙금으로 가라앉는다
감금실 복도 벽에 걸려있는 갇금실에 갇혔던 한센병 환우의 두편의 시
오른쪽 시는 소록도 제 4대 악명 높았던 원장 수호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벌로
감금실에 갇혀 강제 정관 수술을 받아야 했던 25세 젊음의 피맺힌 절규의 시요
왼쪽은 감금실에 갇힌 한 성도의 애절한 믿음의 시다
감금실에 갇힌 한 한센인 성도의 절절한 시가 진솔한 신앙고백으로 가슴을 파고든다
"내 주의 위로하시는 은혜로...."
성도에게 주시는 내 주의 위로하시는 은헤는 어떠한 고통과 역경가운데서도 승리하게 하신다!!!
검시실 내부인데 죽은 한센인들의 해부가 1970년도 초까지도 이곳에서 이루어 졌으며
지금은 빈 유리 벽장이지만 1990년대까지도 해부된 아이의 얼굴이나 장기를 유리병에 담아 보관한 장이고
태아의 시체가 담긴 유리병이 14개나 발견되어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환자가 임신하면 주사를 맞히고 태아를 사산하게 했으며 남자들은 강제 정관수술을 받게 하였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잘못된 상식으로 저질러진 만행이었다
한센인들은 세 번 죽는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한센병 발병, 두번째는 죽은 후 해부, 세번째는 장례후 화장 이란다
목사님과 남편이 소록도 중앙 공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1936년 12월 1일 착공, 3년 4개월 동안 공사기간을 거쳐 1940년 4월 1일 완공하고, ‘부드러운 동산’이라 불렀다.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 연인원 6만여 명을 강제 동원하여 산림을 깎아 조성하였으며,
득량만과 완도 및 소록도 주변 섬에서 암석을 채석하여 옮겨오고,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하여 식재하였다.
광복 후 공원 명칭이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변경되었고, 현재 면적은 약 2만 5,000㎡에 이른다.
솔송과 황금 편백을 비롯하여 향나무·후박나무·삼나무·팽나무·히말라야 시더.·종려.·치자.·팔손이나무 등
잘 손질된 관상수 100여 종이 심어져 수목원을 방불케 하는 빼어난 조경이 참으로 멋졌는데.
공원 조성 과정을 알고 보니 어쩐지 감탄하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공원에는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은
구라탑(求癩塔1963년 건립)과 한센병을 앓았던 시인 한하운(韓何雲)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와 공덕비 2기가 있다
.
중앙공원의 상징인 구라탑(求癩塔)은 오마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국제 워크 캠프단'이 1963년 세운 기념탑이다.
미카엘 대천사가 나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탑은 공원에 우뚝 서서 ‘한센병은 낫는다’고 웅변하고 있다.
탑 밑받침을 4면을 빙둘러가며 '한센병은 낫는다'고 적혀 있다.
벨기에 의사와 간호사들의 노고를 기리는 ‘Belgium Damien Foundation 공적비’는 1972.5.17일에 건립되었다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원명은 Joseph de Veuster)는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863년 호놀루루에서 사제로 서품받았고 1865년 하와이 군도에 나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되었다.
1873년 메그레 주교로부터 몰로카이 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성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건너가 700여 명이 넘는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주고, 의사의 도움 없이
나환자들의 고름을 짜 주고 환부를 씻어 주며 붕대를 갈아주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자 냉담하던 환자들도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따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사로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았다.
성 다미안 신부는 1885년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였다.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성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되었으며
성 다미안 신부는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Brussel)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그리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하와이 몰로카이 섬의 ‘문둥이 성자’ 다미안 신부(1840~1889)의 위대한 사랑이다.
오스트리아 수년 3인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세마비)
마리안느 슈테거, 마거릿 피사렉, 마리아 디트리히 이들 오스트리아 수녀 3인의 이름이 새겨진 이 공덕비를
소록도 사람들은 이름 첫자가 M 마자로 시작한다하여 세마비라고 부른다
마리안느 수녀는 1962년2월에 마거릿과 마리아 수녀는 1966년 10월에 소록도에 왔다
1972년 휴가로 잠시 귀국하였던 마리아 디트리히 수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아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지만
마리안느수녀는 마거릿 수녀는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에 와서 2005년 어느 새벽에 편지 한장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는 편지를 남기고선.....
사랑으로 봉사와 헌신의 삶을 무려 43년간.39년간 살았던 그녀들의 아름다운 작별인사였다
소록도의 한센인에게 '엄마 수녀, 할매 수녀’ 등으로 불리던 마리안느와 마거릿 수녀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의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던 절친한 친구로 졸업 후 천주교 광주 대교구의 요청을 받은.
인스브루크 주교로부터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돌볼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건네 듣고 소록도에 왔다.
한센병 환자들은 직감적으로 자기네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병이 자신에게 전염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두려움으로 자기들을 공포의 대상을 쳐다보는 어둠의 눈빛은
환자들을 육체의 고통보다 더 아픈 저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마리안느, 마가렛과 마리아 세 수녀들의 눈빛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깃들지 않은 사랑 그 자체 였고,
환자들은 “세상에 저런 눈빛도 있구나”하고 느끼게 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온 젊은 간호사들이 자신들을 두려워 하기는 커녕 사랑으로 돌봐주는 ‘어머니’의 정을 느끼게 했다.
당시 병원의사들도 마스크와 장갑을 겹겹이 끼고도 환자들을 멀리 앉게 하고 원격으로 진료를 할 때였는데
수녀들은 하얀 가운만 걸친 채 맨손으로 짓물러 달라붙은 환자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만지고
몸 구석구석을 직접 소독해 주었다.
환자들의 상처에서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담담했으며, 오히려 환자들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한다.
약이 모자라면 오스트리아 수녀회에 호소해 약을 구해다 치료했다.
소록도에는 환자들 자녀로 아직 감염되지 않은 미감아(未感兒)가 있는데 이들을 위해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후원을 받아
사용하지 않는 간호사 기숙사를 개조해 영아원을 만들었으며.공중 목욕탕과 보육소, ‘사랑의 동물원’, 정신병동,
결핵병동 등이 수녀들의 노력으로 속속 들어섰다. 수녀회에서 보내온 자신들의 생활비는 환자들의 간식비로 썼다.
자신들을 위해서는 한 푼도 아꼈으며 심지어 죽은 환자들의 옷을 수선해 입는 검소한 일생을 살았다.
두 분이 묵었던 3평 남짓한 방에는 작은 장롱이 전부다.
두 수녀의 사랑과 정성스런 치료는 무려 40여 년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 6000명에 달하던 환자는 530명으로 줄었다
왼쪽이 마리안느 수녀님, 오른쪽이 마가렛트 수녀님 현재 모습
소록도 병원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 온 마리안느 수녀에게 당신들의 희생과 봉사에 한국인들이 깊이 감동받았다고 하자
"나는 예수님 뜻 따르고 복음 따라서 산 거니까 특별한 거 없어요. 소록도에서 진짜 좋은 시간 보냈고,
나는 그저 그들의 좋은 친구였어요. 기쁘게 (일)했으니까 충분한 거지." 라며 웃으며 말했다
요즘도 그는 일주일에 세 번 20㎞ 떨어진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 드리고 인스부르크 요양원에 있는
마르가레트 수녀를 보고 오고
집 옆 양로원에 100 명 넘는 노인들을 시간 날 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있다면서
소록도 친구들은 이제 잘 사니까 안 도와줘도 된단다 ㅎㅎㅎ
또한 마가렛트 수녀님은 옛날 얘기 잘 하는데 요즘 생긴 일은 기억 잘 못해서
지금도 가끔 자신이 소록도에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녀의 봉사와 희생 정신과 활동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니 그녀는 영원한 현역이다
노벨 평화상 범 국민추진 위원회가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에 대해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을 닦아주며
고통의 장소를 희망의 장소로, 천형(天刑)의 섬을 천사(天使)의 섬으로, 어둠의 땅을 광명의 땅으로 바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인류의 자산으로 보존키 위해 현재 100만인 서명을 받고 있다 한다
이런 악질분자는 이렇게 죽어도 싸다 싶다
소록도 병원 제4대 원장 수호(周放正秀)는 자혜의원 확장공사 때 원생들을 동원, 완도에서 거대한 바윗돌을 날라왔다.
그 당시 나병환자들 사이에서는 ‘놔도 죽고 메도 죽는다’는 노랫가락이 유행했다고 한다.
수호 원장은 그 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동상에 참배하는 날 이춘성이라는 원생의 칼에 피살된다.
1942년 6월 16일의 일이다. 한하운 시가 쓰여진 바윗돌은 바로 그 동상 앞에 있던 상석(上席)이라 한다.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하나이 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이 창덕비는 지금 한센인들의 주거지역인 옛 자혜의원 오른편에 세워져 있는데 출입 통제지역이라 들어가보지 못하였고
소호와 대조적 인 인물이어서 사진을 살짝 빌려와 부연 설명을 한다
소록도 자혜의원 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는 소록도 자혜의원 원장을 역임한 5명의 일본인 중에서 유일하게
한센인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만 8년 동안 소록도에서 생활하면서 한센인들을 위한 의료서비스와 생활 개선에 적극 나섰다.
또한 하나이 젠키치 원장은 1922년 10월 광주에서 활동하는 성결 교단 전도목사 ‘다나카 신사부로’를 소록도에 초청해서
이틀 동안 집회를 열었는데 바로 이 집회가 소록도 기독교 부흥의 일등공신이다.
1년 만에 교인 120명이나 생겼고 당시 소록도에 한센인이 200여 명 정도 있었는데 그 중 120명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3년 11월에는 소록도 주민 남자 40명, 여자 4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 세워진 교회가 ‘남성교회’와 ‘북성교회’다.
성도가 계속 증가하면서 중앙교회, 신성교회, 장안교회, 서성교회, 동성교회도 세워졌다.
모두 주민 마을에 있으므로 가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소록도 한센인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는데 1929년 갑자기 서거하였다
이에 환자들이 돈을 추렴해 창덕비를 세웠고 이듬헤. 해방이 되었다
일제 잔재 청산에 휩쓸릴까 우려한 환자들은 창덕비를 땅에 파묻어 숨겼다가.
1961년 환자들은 비석을 땅에서 파내 다시 세웠다
그의 창덕비 비문에는
“하나이 젠키치가 제2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확고한 뜻을 정하고 원무를 혁신했으니
모든 언행은 자애에 가득 차 있었다.”라고 써있다
이 시비 너럭바위돌은 소호 원장 동상의 상석으로 사용했단다.
바위에 "보리피리"시가 음각되어 있었는데 닳아서인지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
한하운(본명. 한태영.1919.3.20 ~ 1975))은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식인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함흥 제일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이리 농림학교에서 수의 축산학을 공부했다.
1936년 봄, 한하운의 나이 17세, 이리농림학교 5학년 때 우연히 몸에 종기가 나서 진찰한 결과 한센병으로 진단받었다
1937년 졸업하고 병세가 호전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케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병세가 악화해 1939년 귀국했다.
얼마 동안 요양을 한 뒤 그해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대학교에서 축목학을 전공하고 1943년 돌아왔다.
1944년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들어가 개마고원과 경기도 용인군 등으로 옮겨 다니며 근무했다.
그러나 갈수록 증세가 겉으로 나타나자 1945년 봄 도청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해방 후 부재 지주로 몰려 가산을 몰수당하고 치료비로 남은 재산마저 다 탕진하고 약을 1948년 월남했다.
1949년 서울 명동에 '시를 파는 문둥이 거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다.
유랑생활을 하던 한하운은 구걸의 대가로 시를 종이에 적어 주었는데 몇몇 시인들의 관심을 끌어 이들의 도움으로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나시인 한하운 시초'라는 제목으로 '전라도 길' 외 12편이 한꺼번에 실렸다.
이 시들이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다음 달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출간됐다.
한하운은 경기도 수원시 세유동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 하천 부락에서 지내다가
1950년 3월 인천시 부평의 한센병 환자 마을 성혜원으로 이주해 투병하는 한편
1952년 5월 부평에 신명 보육원을, 1953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동진원을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대한 한센 연맹 위원회장을 맡아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에 힘썼으며 1958년에는 청운 보육원을 설립했다.
1953년 8월 한 주간지가 '한하운 시초'에 실린 작품 '데모'의 일부 표현을 문제 삼아 한하운을 좌익으로 몰려
경찰과 검찰,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됐으나 문제가 된 시의 표현도 불온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사건은 마무리되고
서울신문 10월 15일 자에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가 실렸다.
1955년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가 나온 데 이어 5월부터 잡지 '희망'에 자전소설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를 연재했다.
1956년에는 '한하운 시 전집'을 발간했다.
1959년 '한하운 자작시 해설집'을 내놓은 지 얼마 안 돼 그의 한센병이 드디어 음성으로 판명됐다.
그는 사회에 복귀, 1960년 8월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하 문화사를 설립했다.
해설집 '황토길'을 펴내고 활발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1962년에는 미 공보원에 의해 그의 반생을 그린 극영화
'황토길'이 제작되기도 했고 1966년에는 한국 사회 복귀 협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간 경화증에 시달리다가 1975년 1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는 넓고 평평한 너럭바위에 걸터 앉아서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 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피-ㄹ닐니리
그의 시 보리피리와 파랑새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꿈 많던 여고시절엔가 그의 시 '전라도 가는 길'을 읽고 목이 메였던 기억이 나서 한편 적어 본다
전라도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삼거리를 지나고/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가는 길...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공원을 한바퀴 돌고 나오니 공원 입구에 선물의 집이 보여 목도 축일겸 해서 선물의 집에 들어갔다
시원한 물 한병을 마시고 비비빅을 사서 입에 무니 마침 가게에 우리 외엔 손님이 없는지라
주인 아저씨가 자리를 내주며 앉아서 쉬다 가시라며 친절을 베푸신다
60대 초로 보이는 아저씨는 인상도 좋으시고 참 잘 생기셨는데 소록도 한센인 마을에 거주하시는 주민이란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전혀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한쪽 엄지 손가락 쪽이 약간 구부러진 후유증을 보여주신다
16세에 발병하여 소록도에 왔고 이제 완치되었지만 여기서 살고 있단다
가족이 있는데 시내에서 살고 집에도 왔다 갔다 하면서 아저씨는 주로 여기서 사는게 더 편하고 좋으시단다
이곳에 사는 한센인들은 이제 거의 다 완치된 환자들이지만 오랜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 가족간의 왕래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이 노인들인지라 후유증 재활치료도 받고 또 노인성 질환을 치료받으며
정부에서 일체를 지원해 주니 이제는 별 부족함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어 굳이 떠나려 하지 않는단다
현재는 일년에 고작 5명 정도의 한센인이 발생할 정도인데 앞으로는 그마저도 없어질거라
소록도 병원도 한센인 전문 병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젊은 날 너무 외롭고 서러움과 고통가운데 지냈으니 이제라도 이곳 한센인들이 편하게 지내신다니 감사하다
진작 자기에게 오셨으면 출입통제 구역인 주민 마을도 가볼 수 있도록 했을텐데 하면서 아쉬워하시니 고맙다
소록도 한센인의 자치 조직인 원생 자치회는 더 이상 소록도가 강제 수용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원생 자치회는 병원과 함께 소록도 7개 마을 관리, 주거지역 질서 유지, 공원관리 등을 맡고 있다.
병원 측과 함께 소록도 주민들의 삶을 이끄는 중요한 축이다
보리 피리 너럭바위 시비 앞에서 선 목사님과 바위 위에 선 사모님. 무언의 대화 중이시다 ㅎㅎㅎ
소록도를 떠나는 마음이 짠하고 슬프면서도 지금 최고의 치료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믓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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