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경기 지역의 성지들을 대충 둘러보고 이제 전라도 지방으로 가려고 하는데
전라도 쪽은 전혀 생소한 곳이라 숙식이며 교통편이며 여간 걱정스럽지 않다
헌데 뜻밖에도 영광에 계신 "상하리 교회" 사모님께서 먼저 연락을 해오셨다
한국에서 성지 순례 다니면서 간간 페북에 근황을 올렸는데 그걸 보시고 연락을 하신것이다
사모님은 두 아드님이 미국 사시는지라 일년에 한 두번 미국엘 오시는데
그때마다 내가 나가는 우리 집 근처 작은 교회에 새벽 기도를 나오신다
그 교회 목사님이 "상하리 교회" 목사님 내외분과 세 분이 나란히 고려대 동문이시다
새벽기도 후에 가끔 근처 빵집에서 서너번 정도 빵과 커피를 나눈 친분밖에 없는데 이렇게 일부러
전화를 주시면서 전라도 쪽에 돌아볼 성지들이 많으니 꼭 오시라고 부탁까지 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쬐금만 이쁜 짓을 해도 이렇게 미리 준비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니
참 좋으신 하나님! Thank God so much !. I love Jesus!
아침 일찍 고속버스로 영광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목사님과 사모님이 마중나와 계셨다
좀 이른 점심으로 근처 냉면집에서 식사를 하고 시간이 있으니 먼저 염산교회를 둘러보고 집으로 가자신다
다른 숙소 알아볼 필요 없이 불편해도 목사님 사택에서 머무라고 하시니 황송하도록 감사하다
염산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염산 순교 기념 성지라는 돌비가 서 있다
한국 기독교 사상 최다 순교자를 낸 염산교회는 전 교인 3분지 2인 77명이 순교한 교회이다
2014년 77명의 순교자가 총회 순교자 명부에 등재되었고 다음해인 2015년 6월 1일 제99회 총회에서
염산교회를 "한국 기독교 순교 사적지 제 1호"로 지정했으며 현재 국가 사적지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전남 영광군은 불교, 개신교, 원불교, 등 3대 종교 성지로 알려져 있다.
원불교 영산 성지와 백제 불교의 도래지 그리고 기독교의 순교지를 보유하고 있는 종교의 메카로 알려져 있다.
전국 최대의 독특하고 유일 무이한 종교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인 셈이다.
영광 야월교회는 전교인 66명이 순교하여 영광군은 194명이라는 사상 최다의 기독교 순교지가 되었다
이에 영광군에서는 대표적 순교 현장인 염산 교회 아래 설도항 입구에 기독교인 순교탑을,
야월 교회당 옆에는 순교자 기념관을 각각 건립해 추모하며 후세를 위한 역사 유산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래쪽 왼편에는 옛 염산 교회당을 복원해 놓았고 윗쪽이 현재 염산 교회당이다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설도마을 서해안 작은 어촌 설도항에 위치한 염산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인 77명의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곳이다
한국 기독교의 순교 신앙과 사랑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세계적인 기독교 순교 유적지로 손색 없는 곳이다
한국 전쟁 때 국군이 영광에 진군해 들어왔을 때 미처 퇴각하지 못한 공산당들이 예배당에 불을 지르고
교인을 죽창으로 몽둥이로 찌르고 때리고 바닷가 수문통에서 새끼줄로 묶고 돌멩이를 달아서 수장시켰다
1939년에 세워진 염산교회는 일제 치하에서는 계량 학교를 설립해 문맹 퇴치 운동을 벌렸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예배당 종을 빼앗기는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악랄한 공산 잔당의 횡포로 예배당이 불타 없어지고 교인 대다수가 희생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순교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성도 43명이 사건 이듬해 1951년 2월 염산 농업 창고에 모여
항아리 속에 숨겨 두었던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내 수요 예배를 드리면서 무너진 제단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마을 신학생으로 겨우 난을 피한 안종렬 전도사가 인도한 그 예배는 눈물과 통곡으로 진행됐다.
크나큰 시련을 겪은 염산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됐다.
김방호 목사의 가족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둘째 아들 김익 전도사가 부활절에 염산교회 4대 교역자로 부임한 것이다
부임 후 그의 첫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나는 이곳에 내 부모 형제들의 원수를 갚으러 왔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예수 믿게 해서 천국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원수 갚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여러분도 저와 함께 이 일에 힘을 합쳐주세요.”.
이후 염산 교회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감싸 안는 사랑의 교회로 불리어 지게 되었고
슬프고도 자랑스러운 순교 유산을 간직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익 전도사는 .시력이 점점 떨어져 더 이상 목회할 수가 없었고
실명한지 11년만에 42세의 젊은 나이로 하늘 나라로 갔다
어느새 염산 교회는 전국 곳곳에서 순교 신앙을 배우고자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고 있다..
터틀리안의 말대로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가 실현된 곳이었다
지금 교회당 앞에 "오직 예수" 돌비가 보인다<
교회 마당으로 들어서자 입구에 세워진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돌탑 십자가
돌맹이로 맞아 죽고 돌을 목에 매단채 설항 앞 바다에 빠뜨려 죽인순교자들을 기리는 듯 하다
77명의 순교자가 수장된 설항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염산교회 앞마당
1997년 순교 기념 사업을 추진하여 2,000여 평의 종교 용지를 마련하고 순교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순교 자료 전시관과 순교 교육관을 개관하여 200여점의 자료 및 유물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77인의 순교사’ 책자와 DVD를 제작해 이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두고 있다
마당에는 돌탑 십자가. 77인의 순교비, 순교자 합장 묘소. 우리는 천국간다 시비.
허상 장로 부부 묘. 김방호 목사 가족묘. 노형기 집사 가족묘등이 있고
담장을 따라 순교 당시 사용되었던 설항 수문의 녹슬은 개폐기가 진열되어 있다
당시 목에 돌을 매달아 수문을 열어 둑에서 밀어 수장시켰을때 사용했던 수문 조절기 기계들이다
1950년 10월 7일부터 26일 사이에 일어난 77인의 순교자를 추모하는 기념비
영광은 6.25 전쟁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이 더 우세하다는 오보로 전쟁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전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지역이다.
그러던 중 7월 23일 주일에 갑자기 공산군이 몰려들었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영광 군수도 피살되었으며
. 공산군들은 우선 교회를 공산군 인민 위원회 사무실로, 사택을 숙소로 빼앗고 김 목사 가족을 내쫓았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피난을 거부한 김방호 목사가 성도들 집을 오가면서 비밀리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국군과 UN군이 나주와 함평을 거쳐 영광 읍내로 진격한다는 소문을 들은
이 지역 기독 청년과 우익 청년들이 영광서 열리는 국군 만세 환영 대회를 주도했다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공산군 잔당들이 이 사실을 알고서 대대적인 보복 행위를 시작했다
그 해 10월 7일 환영 대회를 주도했던 기삼도(당시 23세.목포 성경학교 학생)는 죽창에 찔려 교회 앞에서 첫번째 순교 당했고,
두번째 순교자는 노병재 집사로. 그들은 노집사를 수문 뚝방까지 끌고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집사는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했고 그의 일가족 까지 9명이 순교했다.
이어 노 집사의 두 동생들의 가정까지 수장당해 무려 22명의 가족이 순교하였다
세번째 순교자는 허상 장로님 부부로 봉덕산 골짜기로 끌려가 매를 맞고 죽창에 찔리며 결국은
설항 둑방으로 끌려가 성도들과 함께 묶인채로 설항 둑방 아래로 공산당들이 밀어 버릴때
모두 함께 '내 주를 가까이" 찬송을 부르며 물에 빠져 들어갔다 한다
마지막으로, 장병태 성도 집에 거했던 김방호목사를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창과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이어서 김목사 사모를 그리고 또 다섯 아들과 손주까지 일가족 8명을 때려 죽였다
물론 장병태 성도 가정도 다 순교당했다
염산교회 성도들은 새끼줄로 굴비처럼 묶여 설항 수문으로 끌고가서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고
끝내는 무거운 돌맹이를 목에다 허리에다 감고 한꺼번에 물속으로 밀어넣어 수장하였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그 이유 만으로......한국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염산교회에서는 당시 1대 교역자 역할을 한 허상 장로님., 2대 원창권 목사, 3대 김방호 목사 등이 모두 순교하였다
이렇게 하여 77인의 위대한 순교자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쾌활하시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시는 추미호 사모님과 함께.
순교자를 기리는 추모 시비
교회 마당에 있는 추모 시비로 시인이신 박종구 목사님의 시이다
2014년 7월 25일에 한국 기독교 역사 문화관 관장이신 박경진 장로님께서 건립하셨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행렬에 어린 동생이 무서워하며 울자 동생을 업고 가던 언니가 어린 동생을 다독이며
"울지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단다”라고 말한것을 추모하며 이 시의 제목이 되었다하니
가슴이 뭉클하며 순결한 믿음에 가슴이 시리도록 찡해온다.
비록 순교적 신앙을 따라 가려면 어림 반푼도 없는 작고 연약한 믿음이지만
남편과 내가 동시에 마주 보며 소리친 말 "우리도 천국 간다"!!!
순교자 77인의 명단
77인의 순교자 중 32명의 순교자가 교회 앞마당에 조성된 공원에 합장되어있다.
77인 순교자중 합장된 32인의 명단
우리 주님 오실때까지 승리의 V자를 치켜 세우고
허상 장로님 부부와 김방호 목사님 부부 묘소 오른쪽 멀리 노병기 집사 묘도 보인다
다른 곳에 있었던 묘소를 2014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염산 교회 초대 교역자로 전도사로 부임한 허상 전도사는 9 년동안 사역하다가 은퇴후 장로로 장립 받았다
1950년 10월에 허상 장로와 부인 이순심 집사는 김삼순 집사집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던 중
공산 당원들에게 끌려가서 뭇매질을 당하고.설도항 수문 위 제방으로 끌려가 목에 돌을 매단채 바다에 던져졌다
허 장로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찬송하며 순교 하였다고 한다..
염산 교회 3 대 목회자인 김방호 목사님의 시무 중에 염산교회 77인이 순교를 당했다
김방호 목사님은 독립 투사였던 아버지로 부터 그 정신을 이어 받아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 운동가로
일제의 눈을 피해 만주로 피신해 있다가 잠시 국내에 들어왔을때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후에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벽지와 오지만을 섬기다가 1950년 3월 10일 염산 교회에 부임했다.
그가 부임 후 불과 석달만에 6.25가 나고 공산군이 이곳에 진입하면서 교회당과 목사관을
강제로 점령해 버리자 김 목사는 교인들의 가정을 전전하면서 비밀 예배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결국 공산 당원에게 끌려가 1950년 10월 27일 일가족 8명이 몽둥이에 맞아 순교하였다.
공산군은 자녀들에게 아버지를 장작으로 때려 죽이면 너희들은 살려주겠다는 등
악랄하기 그지 없는 제안을 했다는데 생명을 구걸하려고 어찌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으리요 !
결국 목사님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창과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도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절대로 이들을 미워하지 말라,이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라고 외치고.
찬송을 부르며 영광된 순교의 길을 가신 것이다
이어 사모님 .다섯 남매. 어린 손주가 차례로 몽둥이에 맞아 순교했다
김방호 목사의 장남 김 휼은 목포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기독청년 연합회장으로 있었는데
좌익 학생의 고발로 야산에 끌려가 순교하였다
둘째 아들 김익 전도사는 그 당시 비금 덕산교회로 피신해 있은지라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목사님은 평소 성도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은 반 기독교 적이라고 철저히 신앙 교육을 시키고.
그들의 허구와 실체의 잔인함을 교육하여.공산 주의에 대해서 경각심으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면서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와도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것을 알아채린 공산 당원들은 김 목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 우리 대한 민국에 이런 신앙관과 국가관을 가진 목회자가 얼마나 될까?
노형기 집사의 아버지 노병재 집사는 공산 당원들이 수문 뚝방까지 끌고가 수장시키려 했으나
노집사는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찬송을 부르면서 순교했고 부인과 어린 자녀들 까지 9명이 순교했다
이어서 노 병재 집사의 두 동생들 가족들까지 모두 수장되어 온 가족 22명이 한꺼번에 순교하였다
이 묘는 노병재 집사의 장남 노형기와 그의 자녀들의 묘이다
옛 예배당은 교회를 점령한 공산 당원이 불을 질려 소실됬으나 제100 회 총회에서 대지 위에 159.84㎡ 규모의 건물로
2016년 9월9일 옛 예배당을 복원 헌당하였고 총회에서 한국 기독교 순교사적지 제 1호로 지정되었으며
최근 국가 사적지로 지정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교회 문이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 보고 있다. 노인네들이 참 궁굼한 것도 많으셔 ㅋㅋㅋㅋ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노끈에 묶인 돌맹이들을 쌓아 두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직접 돌을 목에 걸고 그 때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체험을 하도록 해 놓았다
나는 고개만 살짝 숙였는데 남편은 완전 허리까지 굽혀 그것도 모자라 내 팔까지 붙드니 힘이 없나? ㅋㅋㅋ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염산교회 순교 역사를 말하는 영상 소개실이 있는데 우린 개인적으로 간지라
영상을 보지 못하고 곧장 이층 순교 역사관 전시실로 올라갔다
피신을 권유하는 김영호 장로님과 거부하시는 김방호 목사님
9.28 수복 후 국군과 유엔군 환영 대회를 준비하는 청년들
불타는 염산 교회당과 죽창으로 찔려 순교하는 기성도 성도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순교하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기도하는 장병태 성도
죽창과 대검 몽둥이로 처참하게 살육당하며 무거운 돌을 메고 수장되는 순교장면들.
죽일 놈들 같으니라구... 이런 경험을 하고도 지금 이 나라에 공산주의 추종자들이 있다니 정말 어쩌자고 그러는지?.
김방호 목사 일가족 8명이 순교할 당시 둘째 아들인 김익 전도사는 비금 덕산교회에 있었던지라
유일하게 화를 면했고 4대 교역자로 부임한 후 서로 사랑의 사역을 통해 염산교회를 사랑의 교회로 변화 시켰다
그러나 시력을 상실하고 결국 42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법성 교회 당회장으로 있던 김준곤 목사님의 헌시로 1953년 10월 26일이니 순교가 일어난지 불과 3 년 후에 쓴 시
김준곤 목사님은 (1925년 3월 28일 ~ 2009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나셨다
후에 목사님은 미국 유학을 거쳐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Korea Campus Crusade for Christ)를 설립하고
국가 조찬 기도회를 시작하셨으며 군 선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58년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요 오늘의 민족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라는 구호로 시작된
C.C.C는 지난 50여년간 40만여명의 대학생과 350만여명의 평신도를 배출했다
아니 이상표 목사님은 비켜 서셨고 중앙에 손장로가 차지 했네 ㅎㅎ
이 참에 나도 강대상 앞에 한 번 서 보네 ㅎㅎ
우리도 순교자의 반열에 사진은 찍었으나 감히 이름까지야 기입못하지...
>순교자들의 유품들
붓글씨 본다고 사진 많이 자세하게 찍으라고 남편이 신신 당부 해서.. 글씨 사진이 엄청 많네
뉴저지 필그림 선교 교회 손형준 장로라고 발자취를 남기고
염산 교회서 30M쯤 내려와 오른쪽에 영광군에서 세운 기독교인 순교탑이 있다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194명의194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인 이곳에 순교탑을 세우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탑은 예수님이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과 마치 천사의 날개와 같은 의미를 조형화 했고
상층부의 세 개의 타원 구조는 성부, 성지, 성령의 삼위일체를 머리의 관은 고난을 상징하는 가시관을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랑의 형상을 리듬감 있게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탑 양 옆의 부조 벽화는 목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키고 몽둥이와 죽창으로 신자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순교지역의 현장성과 영속성을 부각시켰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나 필경 기독교인의 작품임엔 틀림이 없는 듯 하다
탑 아래 순교탑의 설명이 검은 대리석에 쓰여 있다
2003년 6월 16일에 세운 것인데 아쉽게도 누구의 작품인지 설명이 없다
몽둥이와 총부리로 때리고 죽창으로 찌르는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는 공산당원들 모습을 부조로 새겼다
탑 아래 좌측으로 부조 벽화 옆 검은 대리석판에 요한복음 11장 25~27절 말씀이 한글과 영어로 새겨져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은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나이다" 아멘!!!
몽둥이와 총부리로 때리고 죽창으로 찌르는 잔인무도하기 짝이 없는 공산당원들
죽창과 칼로 찌르고 돌을 가슴에 안고 수장시키려는 극악무도한 공산당원들 모습
탑 오른쪽 부조 벽화 오른쪽 검은 대리석판에 순교자 195명의 명단이 교회 별로 새겨져 있다
염산 교회 77명. 야월교회 65명. 백수읍 교회 36명. 묘량교화 9명. 법성교회 6명.영광대교회 2명으로 195명인데
불규명된 23명도 있다고 하니 순교자는 더 많을 듯 하다
순교탑 앞쪽으로설도 개문이라 새겨진 돌과 수문 조절기가 진열되어 있다
순교자의 넑이 깃든 설도항은 70여년전의 그 끔찍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롭기만 하다
드디어 목사님 사택에 도착하였다
교회 아래층 하얀 자동차 있는 곳이 목사님 사택인데 방이 4개고 그런대로 넓은데 자유시장 분위기? ㅎㅎㅎ다
목사님께서 일주일 이상 묵어야 전라도 지방 성지들을 둘러 볼 수 있으니 목사님이 스케줄을 잡아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너무 시간이 없어 3일만 묵을 계획이라 우리는 물론 목사님도 매우 서운해하시고 아쉬워 하신다.ㅠㅠㅠ.
목사님, 사모님, 꽤 오랜 지인처럼 스스럼 없이 소탈하게 대해 주시고 우리가 묵을 방도 하나 비워 놓으셔서 내 집처럼 편안하다
저녁에 굴비의 고장 영광에 왔으니 굴비 실컨 잡숫고 가라시며 무려 중간 크기 굴비를 20마리나 구워 내 놓으시고
팔둑만한 보리 굴비를 4 마리나 쪄서 내오신다
목사님께서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식사 담당은 목사님이시다
맙소사! 손도 크셔라 ㅎㅎㅎ. 헌데 정말 믿지 못하겠지만 그것을 다 먹어 치웠다는거 아닙니까? ㅋㅋㅋ
사모님께서 교인들이 하다가 그냥 둔 굴비판매를 인수하셔서 밴드에 올리셔서 판매하신다는데 그래도 그렇지
그 비싼 굴비를 이렇게나 많이 굽고 보리굴비까지 내오시다니...
피곤도 하고 배도 부르고 마음도 편안한데 무더위에 집을 시원하게 해주셔서 잠도 잘잤다
맛있는 음식과 친절함에 너무 행복해요.감사해요 이상표 목사님. 추미호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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