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19. 제암리 3.1 운동 순국 기념관 (1)

bonitahuh 2022. 10. 21. 09:44

화성에 있는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을 갈려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로 수원역에서 내려 9.10 번 출구로 나가 제암리 행 버스 정류장을 찾으려니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몇 사람에게 불어보니 각각 말이 달라 몇번이나 왔다 갔다 하다가 더위에 지쳐 죽을 지경인데

어떤 분이 화성행 버스 터미널이 수원역 환승센터로 얼마전 바뀌었다고 일러준다

수원역 환승 센터로 찾아가니 제암리 직행버스는 보이지 않아 우선 발안행 버스를 타고 봉담역에서 내렸다

덥기도 하고 배도 고픈지라 정류장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아들어가 멸치 국수 한그릇 비우고 나서

여기서 제암리 가려면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 마침 손님 중에 한 분이

제암리 교회 가느냐고 물으면서 바로  앞 정류장에서 '9802번'를 타고 제암리에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된단다

다행히 정류장이 바로 식당 앞이라 더위에 지친 남편은 식당 창문가에 앉아 내가 손짓 하면 나오라하고

나만 정류장에 서 있으니 5분정도 지나니 제암리행 버스가 와서 타고 제암리에 내렸다

제암리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 바로 전봇대에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란 팻말이 높다랗게 보인다

10여분 정도 걸어 들어가는 길에 무궁화 꽃 나무가 심겨져 있고 태극기도 펄럭인다

이왕이면 무궁화 꽃을 좀더 풍성하게 질서있게 심고 태극기도 간격을 일정하게 달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순국 유적지 정원 모습 인데 순국 기념탑 뒤에 하얀 건물은 3.1 정신 교육원이고

왼쪽 저멀리 제암리 교회 빨강 뽀죡탑과 순국 기념관이 보인다

유적지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3.1 운동 순국 기념탑(1), 23인 순국 묘지. 23인 상징 조형물.

3.1정신 교육관. 3.1운동 순국 기념탑(2). 스코필드 박사 흉상 등이 있다.

국가 지정 문화재로 사적 299호로 명칭은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이다(1982.12.21 지정)

3.1운동 순국 유적지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제암리 322-4번지)이다

화성 지역 3.1운동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써 있다.

유적지 정원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두 손에 카메라를 들고 너럭바위에 앉아 있는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석호필 1889. 3. 15. ~ 1970. 4. 12.)선교사의 동상이다

스코필드 선교사의 동상은 2015년 3,1일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제암리 학살 소식을 듣고 그는 열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화성 제암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 왔다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그는 일본 헌병 몰래 현장 사진을 찍고 기사를 써서

"수원에서의 일본군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캐나다 선교부로 보내 여론화 하였고.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스코필드 선교사의 보고는 장로교 기관지인 ‘장로교 증인(Presbyterian witness)’에 실려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일제의 악랄한 만행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자 당시 일제 식민 통치에 우호적이던 해외 언론들은

일제히 등을 돌리며 거센 비난 여론을 몰아왔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본의 야만적인 압제 행위를 비판하는 글들을 언론에 기고하고,

하세가와 총독이나 야마가타 정무총감 같은 책임자들을 직접 찾아가 항의하는 등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의기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인사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등의 행동으로 일본에게는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우리 동포들에게는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려졌다.

 

남편과 나는 왜 카메라를 들고 있지? 동상 옆에 왠 자전거를 누가 갔다 놓았나?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카메라는 학살 현장을 찍어 세계에 알리고자 한 카메라였고 자전거는 일제의 눈을 피해 타고온 자전거다.

햇볕이 따갑지만 그래도 이런 귀한 분 곁에 앉아 보는 것도 영광이지 ㅎㅎ.

일제의 추방으로 1920년 강제 출국했던 그는 해방 후인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육영사업과 언론활동 등에 힘쓰다 1970년 이 땅에서 별세했다.

대한 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0년 대한 민국 문화 훈장(1960년)과 건국 공로 훈장(1968년)을 수여했고,

그의 시신은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현충원 충열대 96호.국립 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묘비명에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 이다.

 

2016년 3월에는 국가 보훈처로부터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동상 뒤 대리석 벽면에 스코필드 박사의 업적과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일지를 새겼다

대리석이 하도 매끈하여 사진 찍고 있는 내 모습이 대리석에 다 비치고 있구먼 ㅎㅎㅎ.

스코필드 선교사의 경력.

1919년 4월 17일 제암리 학살 사건을 목격한 스코필드는 엉클어진 유골들을 들것에 실어 2㎞ 정도 떨어진.

향남읍 도이리 공동 묘지 입구에 안장하기도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면서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의 처참한 현장을

사진으로 찍고 글을 써서  세상에 폭로한 것이다

ㅎㅎㅎ 여기도 사진 찍는 내 모습이 반사되어 있네

스코필드 박사가 세계에 알린 제암리 보고서 중 일부

스코필드 선교사의 보고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신속하게 본국 카나다 선교부에 보고하여

이로 하여 국제 사회에 일제의 침략적 만행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제암리와 같은 학살을 당한 마을이 14개 군데나 더 있다고 한다.

비단 스코필드 박사뿐 아니라 현장을 방문하여 국제 사회에여러 모양으로 참혹한 학살의 증거들을 알린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 당시 수원 지방 감리사이던 감리교 선교사 노블(Noble, William Arthur. 魯普乙, 1866-1945)도

(노블 선교사의 딸 루스 노블 아펜젤러(Appenzeller, Ruth Noble)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아들 아들 H. D. 아펜젤러와 결혼였다)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미국 영사관에 일본의 만행을 조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한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5)의 적극적인 조사와 항의가 있었다

이렇게 선교사와 외국 언론인을 통하여 수원 화성 지구와 제암리 학살사건이 국제적으로 폭로가 되었다

 

이번에 순례기를 쓰면서 매번 느끼고 감사한 것은 조선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 뿐 아니라

교육, 의료, 구제, 사회 봉사는 물론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도 온갖 위험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복음화는 바로 이들 선교사들의 공로가 컸음을 새삼 느낀다

그들은 진정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인을 사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을 실천한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었다.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오늘이 백 십일년 만에 찾아온 더위란다

그러니 얼마나 더웠는지 남편은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냉방시설이 되어 있는 순국 기념관으로 곧장 향했다

제암리 사건의 연대표를 정리해놓은 신문에서 잠간 실례 ㅎㅎㅎ

제암리 3.1 운동 순국 기념관 전경인데 기념관 윗층에 제암 교회가 자리하고 있고

앞에 순국 기념탑이 서 있으며 뒷동산에 순국 합동 묘소가 있다

3·1운동이 진행되던 때 수원과 화성군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고 치열한 만세 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더욱이 3월 28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시위와 4월 3일 우정면 화수리 시위 때에는

시위 대원들이 발포하고 도주하는 일본 순사 2명을 처단한 바 있다.

 

이에 일제는 수원군 일대 주민들을 학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는 등 대대적인 보복 조치를 취했는데 그 일환으로

4월 15일 오후에 3.1 운둥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제암리에 출동하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교회당 문을 잠근 후 총을 무차별 난사하여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였고 짚더미에 석유를 뿌려 불까지 질렀다

1982년 9월에 이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 할머니의 고증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고,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에 따라 불에 뒤엉켜 있는 23위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

9월 29일 합동 장례식을 거행한 후 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고, 불탄 교회 자리에 순국 기념탑을 세웠다.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은 2001년 3월 1일에 개관하였다

총 1만7455 ㎡의 제암리 성역 단지내에  기념관은 1천300여㎡ 이다

화성리 사람들에게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이' 바로 1919년 4월15일 이리라.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발생한 제암리. 고주리 학살과 그 실상을 알리고

화성 지역 애국 선열들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불굴의 정신을 기리며 추모하기 위하여  현장에 세워졌다

3.1 독립 운동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교육하는 장으로 세웠다

시원한 실내에 들어서니 이제사 살 것 같다.

우선 좀 쉬어야 겠기에 물 한 병을 마시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순국 기념관 로비 중앙 벽에 걸린 "제암리 뒷동산 만세소리" 그림.(김 태 작품)

김 태 교수의 작품인데 일본인들도 잘 보라고 영어와 일어로도 번역해 놓았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기 이 분 참 친절하시다.

더운데 어르신들이 오셨다고 물도 갖다주시고 나중에 기념관 다 둘러보고 나오니

두 분만 오셔서 같이 사진도 못 찍으셨죠? 하며  잠간 나와서 사진까지 찍어 주시면서

나갈때 버스 정류장에 길가 작은 공원에 있는 제암리 주민들이 세운 순국비도 보고 가시라며 친절하게

알려 주었는데 안 그랬으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해마다 삼일절과 광복절에는 이 곳에서 특별 기념 전시와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가 있는 모양이다

젊은 부부들 아이들과 이런 곳에 와서 같이 보고 느끼고 공부하면 좋겠다 싶다

우리나라 역사를 알면 나라 사랑이 저절로 생길텐데...

로비에 들어서서 잠깐 땀을 식히고 나니 먼저 시청각실로 안내한다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영상 소개와 당시 증언자들의 증언들이 담긴 영상과 설명을 들었다

참으로 몸서리치게 끔찍하고 참담한 심정인데 내 짧은 역사 지식으로는 아마도 근대 세계 역사 속에서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인권 탄압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캄보디아 크메르 정권의 킬링필드. 일제의 만행이 아닌가 싶다

하나 더 붙이자면 지금 현재 진행형은 김일성 3대 세습 북한 정권일것 같다

전시실은 제 1 전시실과  제 2 전시실로 나뉘어 있다

제 1 전시실로 들어가는 복도 양편 벽면 왼쪽엔 "멈춰진 시간 4.15를 기억하다"라는 글귀가

오른쪽엔 박목월의 시 " 제암리의 참살"이 읽는 이의 심정을 숙연하게 한다

제암리의 참살/ 박목월 시

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그들이 지른 제암리의 불은/이제 와서 끌 수 없고

교회 안에 모였던/스물 여덟명의 형제를/살려 낼 수 없다.

 

왜병 중위가 이끄는/악마의 한 떼거리가 어진 백성을/교회당 안에 몰아 넣고

난사했다. 살해했다./이유도 간단했다.

 

우리 나라를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제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형제가 제암리의 그분들 뿐이랴마는

나는 죽지만 이 어린 것만은 살려달라고/죽음의 창틈으로 내미는

 

천진한 어린 아기의/무심한 눈을 겨냥하며/방아쇠를 당기는 놈들의 손

모성애의 마지막 애원조차/귀에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의

 

미친 악마 귀머거리의 악마/무슨 소리를 해 보았자

죄과는 죄과/상처는 상처/씻을 수 없다.

 

왜족이 어떻다는 것을/그들의 불거진 이마와/튀어나온 관골[顴骨]과

미간[眉間]에다 붙은/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눈이

어떻다는 것을/우리는 안다.

 

제암리를 태운 불이/제암리만 태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지금/우리는 의젓한/자주국의 백성으로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할 수 있음은/협량하지 않기를 다짐하는/아량과 냉대와

내일의 찬란한 앞날이/우리를 밝게 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를 해보았자

 

그들이 지른 제암리에 불은/이제 와서 그들이/끌 수 없으며

죽음 당한 우리의 형제가/살아날 수 없다.

 

뉘우치는 것은 그들의 덕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자주국의 백성으로서/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대할 수 있음은

지난 날보다 오는 날이 소중하고/어제보다 내일이 귀하고/과거를 되 새기기보다

내일의 꿈에 부풀고/조국의 산하에/철철 넘쳐 흐르는/오늘의 햇빛이 밝기 때문이다.

 

전시실 문을 여니 정면 벽에도 "멈춰진 시간 4.15"을 기억하다"고 써있고 "학살의 증언 '이라는 조형물이 보인다

그날 1919년 4.15일에 제암리 주민 23명 (감리교인 12명, 천도교인 11명)을

교회안에 가두고 일제의 잔학 무도한 총칼에 살해 당하고 교회에 불을 질러

시체마저 못 찾게 타 죽였으며 고주리 주민 6명이 학살 당한 그 날을 기억하라다

 

제1전시관은 몇가지의 주제로 구성되었는데, 화성 지역의 3·1 운동 전개와 배경과 진실.

제암리 학살사건의 증언자들의 증언, 후손들의 삶. 유해 발굴. 에필로그 둥이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각종 자료들로 제암리 사건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 위치한 제암리는 ‘두렁 바위’로 불리던 씨족 중심의 농촌 마을이었다.

전체 서른 세 가구 중에 두 가구를 제외하고는 순흥 안(安)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와 천도교 신도 들이었고 주민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마을이었다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은 평화롭고 조용하던  마을을 한 순간에 죽음의 마을로 바꾸어 놓았다.

3.1 운동이 벌어지기 전 제암리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 수원, 화성 지역 민족 운동 세력들이 협력해 시위 운동을 논의했다.

1919년에 3·1운동과 함께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면서, 제암리 일대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마을 청년을 비롯한 제암리 사람들은 장날을 이용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경찰은 총칼을 희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으나 주민들은 계속 장날에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자, 일본은 수원·안성 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 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했다.

 

이때 1차로 수촌리·화수리, 2차로 부근 우정·장안 양면 내 25개리, 그리고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방화와 학살 등이 자행됐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 군중들이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 순사 두 명을 처단한 사건은

  4월 15일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일본의 무자비한 보복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지도자들에 대한 정보는 3.1운동 당시 제암리에 살다 발안으로 이사한

조희창이라는 자가 일본 경찰에 정보를 넘겼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인 사사카와 조희창이 군인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왔다.

이 사건에 앞잡이가 같은 조선 동족이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나라가 어려울때는 꼭 이런 기회주의적인 매국노들이 설쳐댄다

그들은  지난번 수원에서의 과격 진압을 사과 하려 한다며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제암 교회에 불러 모았다.

처음에 몇 마디 사과하는 척 하더니 갑자기 교회 문을 걸어 잠그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햇다.

일제는 민족 운동의 중심축 역할을 한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들을 근절하기 위해 천인 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제암리 교회에 이들을 모아 놓고 먼저 문을 걸어 잠근뒤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고

이어 고주리에 가서 일가족 6명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23 명이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한 덩어리로 엉켜 최후를 맞아야만 했던 것이다.

교회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고 일본 군인들은 교회 안과 밖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고.

이어 그들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가옥 30여 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도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살육의 자리"(화성시 출신 작가 장인탁의 작품)

작품 제목 그대로 멋지면서도 가슴을 후벼파는 듯 잘 표현했다

화성지구 독립 운동가들의 사진과 설명. 그들에게 내린 엉터리 판결문.

제암리 학살사건의 배경과 실상

사진과 더불어 설명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1905년 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 교회는 동족 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 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의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불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전한다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 묘지 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됐다

일제가 애써 은폐하여 묻혀버릴 뻔 했던 이 사건은 외국인 선교사와 언론인들에 의해 알려졌다.

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 감리교 노블 선교사 (한국명 노보을).스코필드 선교사

미국 AP통신 서울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언드우드 와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 운동에 적극 협조하며 기사를 보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테일러 일가족은 가택 연금 되었고,

이듬해 5월 조선 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되어 1948년 70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별세했는데.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한국으로 이송되어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 판결문,

제암리의 무자비하고 악랄한 학살사건은 당시 스코필드를 비롯해  언더우드.노블 선교사와  커티스,

테일러 외신 의해 이 끔찍한 학살사건이 폭로가 되어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국제적인 비난에 휩싸인 일제는 허는 수 없이 아리타를 군법 회의에 회부했지만,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결국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결국 아리타를 재판에 회부한 것은 형식적인 제스쳐로  국제적 기만이었을 뿐이였다

 

아직까지 일본 정부의 인정과 공식적인 사과는 없다.

오히려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에 주둔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일부 군인이

일본인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제암리가 아닌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까지 파악해 살해한 점 등을 봤을 때, 신빙성이 부족하다.

발안 주재소 일본 경찰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일본 군경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이

정미소 주인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한건 1919년 4월 15일 오후 두 시경이었다

아리타는 가증스럽게도  ‘만세 운동을 진압하면서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고 말하여,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고 처음에는 사과하는 척 하다가

교회 문을 걸어 잠그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 후 끝내 불을 질러 교회안에 모인 사람 23명 전원을 죽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불을 질러 제암리는 화염에 휩싸이는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최근에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대장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우쓰노미야는 1918년 7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약 2년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그 일기서 그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공식 명칭은 '조선군') 사령부가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견된 15년분의 일기 등 사료 중에는 독립 운동의 진압 실태와 민족운동가에 대한 회유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당시 발생한 제암리 사건에 대해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가둬 놓고

아기까지 죽이고 방화했지만 일본군이 거짓 발표를 통해 이를 부인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쓰노미야는 그해 4월 18일자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을 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되어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간부들과 협의한 끝에

'저항을 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 회의를 끝냈다"고 적혀 있었다.

아사히 신문 2007년 2월 28자 보도 내용이다. 자기 나라 신문보도이니 이거야 또 부인 못하겠지?

우쓰노미야는 1918년 7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약 2년간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불로 페허가 된 제암리 마을

제암리 학살의 증인

“4월 15일 오후, 일본 중위가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인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23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그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병사들은 내민 어린 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제암리 학살 사건의 증인 전동례 권사(안진순의 아내)의 증언의 말 중에서

사건 63년이 지난 1982년 9월 25일, 23구의 시체가 발굴되고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유해 발굴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한 달여간 유해 발굴이 진행되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고, 마지막에 최응식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해 발굴한 곳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1965년 일본의 오야마 레이지 목사가 일본 대학생 사죄 여행단을 이끌고 방문하여 사건 관련자들에게 사죄하고

현장 체험 학습을 하는 모습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하여

그 돈으로 제암리 교회를 다시 세운 과정을 담은 사진 자료들이 있다

1970년 일본 기독교인들이 보내온 속죄 헌금으로 지었던 제암교회 4번째 지은 예배당 모습이다

도쿄 니쇼대 세리카와 데츠요 교수는 이곳을 답사한 뒤 “조상의 죄를 사죄하는 의미에서 양심 있는

일본 기독교인들이 보내온 헌금으로 지은 예배당을 아예 없앤 것은 약간 섭섭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제암교회 원로 목사인 강신범 목사는 “70년에 지은 예배당은 너무 낡아 비가 새고 벽이 갈라지는 등

그대로 둘 수 없는 지경이어서 일본 측과 합의 하에 2001년 헐고 다시 지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인들이 지은 예배당에서 이제껏 예배드리며 사용했다는 것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용납이 안되는데

이왕 헐어 버렸으니 이제는 사진과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다면 일제의 만행으로 불타버린 초기 제암리 초가 예배당 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으면 좋으련만...

일제의 만행에 비분강개한 애국 청년이 쓴 혈서

1919년의 3·1운동은 기독교가 한국 민족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기독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 시위 중 상당 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 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군의 제암리 교회이다

제 1 전시실 마지막 에필로그

교회안에서 순국한 23명의 제암리 주민과 고주리 주민 6명의 이름

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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