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20.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관 (2)

bonitahuh 2022. 10. 21. 09:51

제 1 전시실을 내 딴에는 신경쓰며 보고 복도를 지나 제 2 전시실로 들어갔다 

들어서자 바로 20세기 세계의 제노사이드 표시 지역들이다

나치의 대 학살극. 캄보디아 킬링필드. 일제의 만행들.... 천인공노할 것들..

이 중에 진정으로 사과하고 화해한 나라는 몇이나 될까?

제2전시실 입구쪽에 걸려 있는 3.1 만세 운동을 표현한 조형물

제 2 전시실은  20세기 세계의 genocide(인종 대 학살)1937년 그 날의 기억. 1919년 제암 고주리의 기억.

1944년 사죄로 얻은 평화와 용서.회생자에게 바치는 메시지 들이 주제별로 잘 전시되어 있다

20세기의 제노사이드 (집단  인종 학살)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에서 중국에서 한국에서 필립핀에서 캄보디아에서....

일본 놈들 참 죄 많이 저질렀다. 참으로 악랄하고 극악 무도하기가 이루 말 할수가 없네

그러기에 왜놈들은 자살마저도 활복 자살을 하는 잔인한 인간들인데

세상의 온갖 잡신을 다 섬기는 우상 나라이니 하나님이 복 주실 수가 없지.

위 왼쪽 가와바다 검시도, 위 오른쪽 순사부장 노구찌 검시도,

아래 왼쪽 송산면 사강리 순사 부장 노구찌 살해약도, 아래 오른쪽  장안, 우정면 만세운동도

이들이 먼저 평화적이고 애국적인 만세운동을 하는 선량한 양민들을 무참히 진압했기에

성난 군민들이 저들에게 행한 것은 어쩜 정당 방위인지도 모른다

고주리 일가족 살해장면들

왼쪽 사진 (안종락, 현낙화 부부), 오른쪽 사진  (안종락, 안상옥)부자

만세운동 피살자 명부와 이재민 목재 배급표.

1991년 "제암리(경기도화성군향남면)학살 사건"의 희생자 유족 대표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 배상및 공식사과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때 일본 신문에 난 기사.

사건 당시 증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함께 잃은 안용웅씨(48·서울·회사원)와 할아버지를 잃은 안형헌씨(47·서울·학원경영)

소송 지원 단체 관계자들로 구성된 이들 유족 대표는 도쿄 지방 재판소에 소장을 제출하였다.

유족들은 소장에서 일본 정부는 1.제암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를 현장에 건립할 것

2.일제 만행에 대해 사과하고 양국 신문에 광고문을 게재할 것

3.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상당한 손해 배상을 지불할 것 등을 요구했다

故 안용웅 전 유족 회장은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기 위해 일본에서 재판을 추진하며

작성한 편지에 제암·고주리 학살 사건 당시 일본군의 안내자였던 사사카와 아들이 재판 청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고 안용웅 회장에게 돈 봉투를 전달했다 거절당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민족 대표 33인들의 모임

나라를 팔아 먹은 매국노들인데 사진엔 3명만 나와 있네

을사오적(외부대신 박제순 .내부 대신 이지용, 군부 대신 이근택. 학부 대신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지금 대한민국에 이런 자들이 없을까?  하나님!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 주소서!

아는 지식이 짧아 부연 설명은 할 수 없고 사진에 있는 설명만으로 이해하시기 바람 ㅠㅠㅠ 

제 2 전시실 에필로그가 의미 깊다

어휴! 전시실에서 일일히 사진과 설명을 보고 읽고 다 둘러보고 나오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전시실 윗층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경사길로 올라가니 바로 제암교회다 

1905년 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 교회는 동족 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처음 초가에서 시작했는데 바로 이 교회가 1919.4.15에 일제가 만행을 저질르고 불태운 교회당이다

장소는 현재 유적지 정원 한 가운데 있는 " 3.1운동 순국 기념탑" 자리에 있었다

1939년에 현재 제암교회 자리에다가 기와 지붕의 예배당을 건립하였는데 기피 지역이어서

오시는 목회자가 없어서 해방후 까지 성도들만이 교회를 지켜 왔다

1970년 일본 기독교계 사죄 위원회가 모금한  1천만엔 속죄 헌금으로 1970년 9월에 예배당을 준공했다

2001년에 일본인의 속 죄 헌금으로 지어진 예배당을 헐고  화성군에서

현재의 자리에 제암 교회와 목사관 기념관들을 지어 준공하였다

제암리 교회라는 명칭이 지금은 제암교회로 바뀌었다.

교회서 단체로 오는 경우엔 이 제암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목사님께서 친히 설명도 해 주시는 모양인데

남편과 둘이만 갔으니 휑하니 텅빈 교회에서 잠시 기도만하고 사진 두컷 찍고 나왔다.

제암리 교회는 지금 제암 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념관 바로 앞에 있는 '3.1 운동 순국기념탑'이 서 있다

1959년 4월 22일에 세웠는데 전면에 "3.1 운동 순국 기념탑" 이라는 한문 글씨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쓰신 글씨인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 탑을 세운지 1년 4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셨다

뒷면에 쓰인  비문은 "월탄 박종화"가 짓고 글씨는 여초 김응현이 썼다

월탄 박종화(1901-1981)는 해방 후 한국 문학가 협회 초대회장, 서울 신문사 사장,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했고,

1966년엔 제1회 5.16 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월탄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한 문학계의 거두이다.

허지만 과거 그의 친일 행위 때문에 과연 3.1 운동 순국 기념탑 비문을 쓸 자격이 있는가에 비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 정치계는 물론 문회계 심지어 종교꼐 까지 친일 부역를 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독교계도 신사참배 가결을 예장 총회에서 가결할 정도였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이 순국 기념탑은 이승만 박사 글씨와 비문을 그대로 옮긴채로 유적지 중앙에 더 크게 하나 더 새로 건립해 놓았다

사진 한장을 찍고서 남편은 땀을 너무 흘려 병날까 겁나서 일단 기념관으로 들어가 있으라 하고

일단 나 혼자 뒷동산 순국 열사 합장 묘소에 올라갔다

기념관 옆을 돌면 순국 선열 23인의 합동묘소로 오르는 이런 계단길이 나온다

양쪽에 태극기가 도열한 층계를 올라서면 바로 기념관 뒷동산에  순국 열사 23인의 합동 묘소가 나온다

일제의 만행으로 붙에 타서 교회안에서 서로 뒤엉킨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서 4km떨어진 인근 공동 묘지에다

임시 묻었던 사람은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던 카나다 의료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였다

마을 주민들은 일제의 눈치롤 보느라  감히 시신 수습할 엄두도 못내고 있었을때 스코필드 박사가

나서서 시신을 수습하고 이런 천인 공노할 만행을 선교부와 세계에 알렸다

사건이 난지 63년이 지나서야 유골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합동 장례식을 거행하고

1982년 9월 25일에사 23인의 순국열사들은 합동 묘소를 마련하여 이곳에서 편안히 안식하게 되었다

비석에는 "堤岩里三·一運動殉國二十三位之墓"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안정옥(安政玉)· 안정린(安正璘)· 안종락(安鍾樂)· 안종엽(安鍾燁)· 안종환(安鍾煥)· 안종후(安鍾厚)· 안유순(安有淳)·

안무순(安武淳)· 안진순(安珍淳)· 안봉순(安鳳淳)· 안경순(安慶淳)· 안필순(安弼淳)· 안명순(安命淳)· 안관순(安寬淳)·

안상용(安相鎔)· 조경칠(趙敬七)· 조태성(趙泰成)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 홍원식(洪元植)과 그의 부인 김씨(金氏)·

홍순진(洪淳晉)· 김정헌(金正憲)· 김덕용(金德用) 23인의 이름이 쓰여 있다

>날씨가 워낙 더워서인지 묘에 잔디가 듬성 듬성 해서 조금 안타까워 직원에게 관리는 누가 하느냐고 물어보니 

화성시에서 정성껏 가꾸고 있다는데 워낙 날이 더워 요즘 잔디가 그렇다한다

덥지만 혼자 묘소를 둘러 보면서 잡초도 몇개 뽑고 잠시 기도했다

하나님! 이렇게 피흘려 지켜낸 우리나라와 교회들을 지켜 주소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삼키려 하고 있으니 저들의 악행을 그냥 두고 보지 마옵소서!

옆에 세워 놓은 비석 뒷면의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제 민족 혼을 더욱 새롭게 인식하고 민족적 자각을 높이기 위하여 민족 수난의 현장도

국민 교육의 도장과 민족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뜻에 따라

문화 공보부에서 유해를 찾아 여기에 유택(幽宅)을 마련하였다."

이제 돌아가는 길에 아까 못 둘러보았던 야외 유적지를 둘러보고 가려고

시원한 로비에서 쉬고 있는 남편을 부르니 직원이 따라 나오며 두분 기념 사진을 찍어 주겠단다

합동 묘소를 내려오자 바로 유적지 정원에 있는" 23인 순국 기념 상징 조형물" 앞에서 한컷 날린다

매끈한 검은 원추형 돌로 길이가 각가 다른 길고 짧은 기둥으로 세워진 23인 추모 상징 조형물로 멋지다!

돌기둥의 길이가 크고 짧음은 순국열사의 나이를 상징한다는데?

내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 제법 잘 나왔네 ㅋㅋㅋ

23인 군국 선열 추모  상징 조형물에 대한 설명은 이 돌에 새겨져 있으므로 생략

유적지 정원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3;1 운동 순국 기념탑이다

이 자리가 바로 1919년 4.15일에 있었던 그 참혹한 날 제암리 교회가 자리했던 바로 그 곳이란다

1959년에 세워졌던 순국 기념탑은 순국 기념관 앞에 그대로 두고 이 순국 기념탑은 1983년에 건립되었다

기념탑의 글씨와 비문은 처음것과 같이 이승만 박사 글씨를 그대로 옮겨 왔고

비문도 월탄 박종화의 글과 야초 김응원 글씨를 그대로 옮겨왔다

3·1 운동 순국 기념탑 뒷면에 둥글게 병풍처럼 빙 둘러선 29개의 돌과 태극기는;

제암교회 희생자 23명과 고주리에서 희생자 6명을 포함한 애국 선열 29인을 상징한다

마치 지금도 우리 대한 민국을 지키는 애국 선열들의 넋이 힘차게 나부끼는것 같다.

기념탑 아래에 쓰여진 추가 설명

추가 설명에 보면" 원래 이곳에 향남면 삼일 운동 순국 기념탑 위원회에서 일천구백오십구년 사월 이십이일에

건립한 기념비가 있었으나 비신이 작고 모양이 초라하여 선열을 현양하기에 부족하므로 제암리 유적지 정화 사업을 수행하면서

원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규모를 크게 하여 이 비를 세우다.1983년.4월15 일 경기도 세움"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것을 헐고 새것을 좋아하는데 그나마 옛 원조 순국 기념탑을 없애 버리지 않고

현재 기념관 앞에 그대로 모셔다 놓았으니 그나마도 다행이다 싶구먼...

기념탑 뒤에서 찍은 사진

옆에서 찍은 사진

 야외 유적지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이제 서서히 뜨거운 한낮 길을 걸어갔다

아까 직원이 버스 정류장 작은 공원에 있는 순국 기념 탑을 꼭 보고 가라고 일러 준 말이 있어

생각하고 유심히 가는 버스 정류장 근처를 살펴보니 공원같지 않은 다듬지 않은 풀섶에 기념비 하나가 서 있다

기념관 직원이 일부러 일러 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뻔 했다

너무 마음이 안좋았던 것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이 의미 깊은 기념비가 너무 볼품없이 버려지듯

잡초가 우거진 길가 풀섶에 방치되듯이 서 있어서 잘 정리된 유적지와 대조적이었다

화성시에서 좀더 신경쓰고 관리했으면 싶고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가 무궁화꽃 나무도 예쁘게 다듬고

태극기도 질서있게 세워졌다면 훨씬 더 보기 좋고 품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길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기념비가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비 바람 지나간 뒤 스물 여섯 해/두령바위 들꽃엔 이슬이 방울방울

불에 타고 총칼에 쓰러진 /임들의 한 맺힌 넑이드뇨

 

조국을 찾으려던 장한 그 뜻/이제 겨례의 산 힘이 되었기에

왜놈은 망하고/ 인민의 나라 섰으매

거친 밤 촉새되어/울던 노래 그치라

1946.6.4. 박세영 시

 

이 시는 해방이 되고 난 후인 1946년 6월 4일 제암리 주민들이 세운 기념비에 새긴 추모시로

월북 작가 박세영의 추모시이다

이 시의 내용 중의 ‘한민의 나라’는 본래 ‘인민의 나라’였던 것을 좌익 척결에 나선 군인들에 의해

기념비가 파괴될 것을 염려하여 면(面) 서기가 기지를 발휘하여 ‘한민의 나라’로 바꾸어 놓아

화를 면하고 현재에도 마을 입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