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 교회를 방문하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 역에 내렸다
한국에서 다닐때는 가능한한 지하철을 이용하니 여러모로 편리하다
우선 지하철 노선 지도를 보고 타니 길 찾기가 편하고 왠만한 곳은 지하철로 다 연결이 되고 넓고 빠르다
또한 무엇보다 경로 우대를 받아 공짜다 ㅎㅎㅎ(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이것부터 해결했다)
광화문역에 내려 15분 정도 걸어가니 새문안 교회가 보인다
번화한 도로변에 우뚝선 빌딩에 새문안 교회라고 쓰인 판이 보인다
현재 예배당으로 쓰고 있는 이 건물은 새 성전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 예배당으로 쓰고 있는 언더우드 교육관이며
사무 공간과 새문안 교회 사료실은 인근 광화문 빌딩을 임시 사용하고 있다
새문안 교회는 초기 한옥에서 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6번이나 예배당 이름과 모습이 바뀌어 왔는데
초기에는 정동 예배당(貞洞禮拜堂) 또는 정동 교회(貞洞敎會)로 불렸으며,
1895년 서대문안 대로변으로 옮긴 후 부터는 정동교회 혹은 서대문 교회(West Gate Church)가 혼용되어 쓰이다가,
1907년 이후 현재의 위치인 염정동으로 교회를 옮긴 다음부터 새문안 교회(Saemoonan Presbyterian Church)로 불렸다.
옛날 돈의문(敦義門)을 세워 그것을 ‘새문’이라 했기 때문에 그 안쪽을 새문안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 후 일제 시대에는 한문으로 신문내 교회(新門內敎會)로 또 한번 교회 명칭이 변경 되는 등
1세기의 역사만큼 교회 명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교회 안내판이 붙어 있다
건물은 지하 1.2층에서 부터 지상 5층까지 교회에서 각종 예배실과 사무실 교육실로 사용하고 있다
새성전 건축이 완곧되는 2018년도 말까지 이 건물과 광화문 빌딩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새문안 교회 부설 기관으로는 새문안 교회 사료관,
새문안 교회 음악 교육원, 새문안 복지재단, 새문안 수양관, 새문안 동산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3층 언더우드 홀 대 예배실로 올라갔다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의 언더우드 목사 한옥에서 세례교인 한국인 14명과
주로 만주지방에서 선교하던 로스(John Ross, 1842-1915) 목사와 언드우드 선교사가
참석한 가운데 창립 예배를 드리고 한국인 2명을 장로로 선출했다.
그동안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영어 예배 집회만 있었으나, 이제 한국인들에 의해 한국 말로 예배를 드리는
한국 최초의 장로교 조직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정동 감리교회는 그해 10월에 설립되었으며 반면,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 소래교회는 최초의 미 조직 교회이다)
이날 참석했던 14인 중 13명은 서상륜과 다른(봉천에서 로스가 파송한) 전도인에 의해 전도 받았던 인물들로
(백홍준, 서상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과 서울의 노춘경으로 서북 출신들인 이들은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또한 장로로 선택된 2명은 봉천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1887. 10.2 일 주일에 장로 안수함으로
명실 상부한 조직 교회로서 새문안 교회가 창립되어 한국 교회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활을 감당해 나가게 되었다
한편 서상륜은 의주 출신으로 1878년 중국 영구(營口)에 장사차 나갔다가 열병에 걸려 죽을 뻔 하였으나,
로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나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1882년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로스와 함께 한글 성서 번역에 참여하여 1882년 최초의 쪽 복음서인 누가 복음을
번역 출판하여 국내에 반입, 자립적 전도 사업과 권서 활동을 한 한국 최초의 전도자이자 권서인이었다.
(순레기 13. 소래교회 편 서상륜 참조)
새문안 교회의 설립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그를 도운 초기 한국인 전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 최초의 권서였던 서상륜(徐相崙)의 역할은 중요했다.
요컨대 새문안 교회의 창립은 외국 선교사 언더우드라는 ‘씨줄’과 한국인 서상륜이라는 ‘날줄’이
마치 베를 짜듯 서로 어우러져 새문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에배실 입구에 지금 한창 신축중인 새 성전 조감도가 걸려 있다
새문안 교회가 짓고 있는 새 성전은 연면적 29,352.83㎡(약 8,900평), 지상 13층 지하 5층(본당 2,840석) 규모로
2018년 12월에 완공 할 예정이다
새문안 교회의 설계와 건축은 교회 전문 건축 기업인 서인 종합 건축 사무소에서
설계자는 최동규 소장과 이은석(51·코마건축) 경희 대학교 교수가 맡았다.
새 성전은 규모보다 상징과 은유, 공공성에 초점을 맞췄으며 기능성도 배제하지 않아
교회 건축사에 새로운 장을 열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세계 명품 교회를 가보면 규모가 크거나 실용성만 강조한 교회는 하나도 없어요. 기능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건축물 자체에 성경적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라고 하니
후세에 남길만한 아름다운 교회 유산으로 빛나기를 기대하며 축복한다
다행인 것은 서울의 가장 중심부인 광화문의 빌딩 숲 속에서 그나마
교회다운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과
새 성전이 완성되면 교회 측면과 세종 문화 회관 사이에 시민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교회는 새문안 길과 공원을 연결하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사용될 것이란다
한창 공사 중인 새 예배당 건축 현장을 광화문 큰 길 건너편에서 찍었다
너무 아쉬운 것은 정동 교회나 승동교회 처럼 유서 깊은 초창기의 옛 예배당 모습은 이미 없어졌다 해도
최근까지 예배드렸던 마지막으로 남은 1972년에 지은 예배당만은 보존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새문안 교회 에배당은 여섯번이나 그 모습이 변화되어 왔다
첫번째 예배 처소는 정동의 언드우드 선교사 한옥 사랑채에서 30여명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언드우드 선교사 사랑채가 비좁아 근처 돈의동(서대문) 근처 살림집으로 잠시 옮겼다
두번째 에배당은 (1895년!1910년) 신문로에 20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선 교인들이 처음으로 건축을 주도하고 헌금하여 12칸 한옥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세번째 예배당은(1910~1946년) 현재 새문안 교회 터인 염정동에 빨간 벽돌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이 예배당은 세브란스 병원‧‧종교 교회의 설계자인 캐나다 건축가 헨리 고든(Henry B. Gorden)이
500명 수용의 로마네스크 양식 벽돌 예배당으로 설계했는데, 당시 명동 성당과 함께 장안의 서양식 건물로 명물이었다.
네번째 예배당은(1948~1957년) 종탑 에배당으로 연면적 300평(지상 3층 좌우 종탑의 고딕식)의 700명 수용 규모로
1948년 봄 준공해 1949년 7월 31일 헌당한 예배당이다.
다섯번째 예배당은(1957) 엄격히 말하면 신축이 아니라 개축 종탑 예배당으로 전면적으로 리모델링 한 예배당이다
건축가 김중업(金重業)의 설계로 예배당의 정면 입구를 세 개의 붉은 벽돌 조적(組積)의 아치 구조로 바꾸고
외부에서 2층 예배당으로 진입하는 옥외 계단을 만들었으며 2층 창을 출입문으로 개조하였으며
보일러 난방으로 개량하고 본당 내부를 모더니즘식으로 단장하였다.
여섯번째 예배당은 (1972~2014) 모더니즘식 에배당으로 지금 새 성전 기공예배를 드리기 전까지 사용하던 예배당이다
새 성전 건축으로 말미암아 2014년 11월에 철거되었는데 교회측은 고민과 논의 끝에
건물이 너무 노후하고 보수하기에도 문제점이 많은데다 새성전 건축 부지가 좁아서 부득이하게 철거하기로 결정했단다
세개의 십자가와 옛 종탑. 정면의 십자가 격자 무늬 창
참 고전적이면서 교회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교회당이 역사속으로 사라짐에 너무 아쉽다
이 모더니즘 예배당은 1972년 대한 제국 마지막 황태손이자 건축 설계사였던 이구가 설계 건축한 작품으로
서양 교회 양식에 전통미를 가미하여 한국적 전아(典雅)의 풍취로 단아하고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교회당으로 교회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은 예배당이다
그러기에 엣 교회당 건물 철거를 두고 교계 안밖이나 사회에서도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 또한 높고
아쉬움이 많지만 당사자인 새문안 교회 측에서 더 큰 아픔과 고민을 감수하고 결정한 일이라 믿기에
더 이상의 왈가 왈부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나마도 다행스런 것은 이번 새 성전 건축 설계를 담당한 이은석 교수는 현대 건축물이지만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옛 교회당의 그 소중한 가치를, 장기를 이식하듯 새 성전에 녹여내겠다고 다짐했다
“새문안 교회의 특징인 벽돌과 스테인드 글라스 등 버리기 아까운 소재를 활용할 겁니다.
그래서 교인이 새 성전에 들어서서 ‘우리 교회구나’라 느낄 수 있어야 하니까요.” 라고 말한다
>언더우드 기념관 예배당을 나와 길 건너서 약간 돌아 100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광화문 빌딩이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교회 사무실등과 복도 맨 끝 209호실이 교회 사료실이다
새 성전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 사료실로 사용하는데 소규모 전시장과 임시 수장고를 마련하여 보존하다가
새 성전이 완공되면 일층에 사료실을 재 개관할 예정이란다
사료관으로 들어가는 복도 벽에는 교회 역사를 말하는 사진과 설명들이 붙어 있다
사료관에 들어서니 시원한 방에 간사님이 반갑게 맞아 주시며 우선 의자에 앉아 쉬라시며 물 한컵을 주신다
땀을 식히며 남편도 나도 "아이고, 이제 좀 살 것 같네!" 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방문자가 우리 뿐이어서 편안하게 앉아서 먼저 영상을 통해 교회 역사와
사료관 소개 영상을 본 후에 천천히 여유롭게 사료관을 둘러 보았다
감사하게도 사진도 마음껏 찍어도 좋다하시고 또 질문에 친절하게 답도 해 주시고 안내 책자도 주신다
정동 감리교회는 수리 중이어서 사료실을 못 보았고 승동 교회 역시 어수선하고 사진조차 못 찍게 하여
엄청 속 상해 했는데 새문안 교회 사료관에 와서 그동안 막혔던 한 다 풀었다!!! ㅎㅎㅎ
사료관에는 유물 약 15점과 문헌류가 약 90여점 있다는데 임시 사료관인지라 수장고에 보관된 것도 있다
교회 설립자 안더우드 목사를 비롯한 역대 담임 목사님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교회 역사가 130년이 넘는데 담임 목사님이 지금까지 일곱 분이라니 참 건강한 교회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나마도 한 분은 한국 전쟁때 납북되셨고 또 한 분은 임기 중에 병으로 소천하셨고
한 분은 원로 목사로 추대되시고 한분은 정년 은퇴하셨다
참으로 오랜 교회 역사에 비하여 목사님이 자주 바뀌지 않은 것이다
1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 1916) 목사 *시무기간 (1887.9.27~1916)
2대 차재명(1881 ~ 1947) 목사 *시무기간 1920.12.26~1941)
3대 김영주(1896 ~ ?) 목사 *시무기간1944.2.6~ 1950년 6.25 때 납북 당함
4대 강신명(1909 ~ 1985.6.22) *시무 기간 (1955.12.1~1980 은퇴.980.6.1 원로 목사로 추대됨
5대 김동익(1942 ~ 1998.4.1) *시무기간 1981.4.25~1998.4.1일 지병으로 소천
6대 이수영(1946 ~ )목사 *시무기간 2000.9.27~ 2016.12.28 정년 은퇴
7대 이상학(1964 ~ )목사 *시무기간 2017.9.1~ 현재)
물론 중간 중간 다음 담임 목사가 올때까지 공백은 임시 목사나 동사 목사가 감당하였다
새문안 교회 창립 예배때 모습인듯 하다
양복입고 서 있는 두분은 언더우드와 로스 목사님이시고 한복입고 서 있는 두 사람은
이날 장로로 선출된 사람이고 앞에 앉은 사람은 세례받는 사람인듯 조선사람이 모두 14명이다
1996년 6월18일 기네스 협회에서 발급한 증명서
1887년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시작된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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