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17.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

bonitahuh 2022. 10. 20. 08:21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을 가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길눈이 밝은 남편에게 찾아가는 길은 완전 맡긴지라 먼저 지하철을 세번 갈아타고서 부발역에 내렸다

버스로 갈아 타야 하지만 날도 덥고 전에 총신 신대원 갈때 혼난지라 아예 택시를 타고 한나 요양원을 가자 하니

얼마 안가서 요양원과 붙어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은 1955년 "한국 기독교 문화 창달" 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향산(香山) 한영제(韓永濟, 1925∼2008) 장로가 설립한 기독 교문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56년 기독 교문사로 출판 등록을 한 후, 1958년에는 교문사로, 다시 1967년에는 기독교 문사로 개칭하였다.

기독 교문사는 초 교파적 문서 선교 기관으로 198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기독교 대 백과 사전" 16권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독교 서적을 출판해 왔다

이렇게 문서 선교에 헌신한 한영제 장로는 그동안 모은 교회사 관련 10만여점의 자료들을 모아

1955년 "향산 기독교 역사 자료실"을 설립하여 1977년 "향산 기독교 문화 연구원"으로 체계화 시켰다

그러다가 일반인들에게도 이 자료들을 공개하여 상설 전시하기로 하고 2001,11,11일에

경기도 이천에 현재의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역사관 뒤 부지에 2007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맞아 평양 장대현 교회를 5분지 1 크기로 축소 복원하고

교회내에 장대현 교회는 물론 각종 사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가 조금 지저분한데 한나 요양원도 함께 운영하는 모양이다

현재 운영은 한영제 장로님의 아들인 한동인 기독 교문사 사장이 맡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지만, 산재해 있던 한국 교회사 초기 자료들이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에 모여 있어 연구자 뿐 아니라 일반 신도들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 본관 옆 작은 뜰에 장독들이 정겹다.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은 2001년 10월 11~20일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기독교와 한글, 한말 기독교 고문헌 자료 전시회” 주제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한 이후

 

거의 해마다 특별 기획전을 여는데 2017년도에는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 개혁이 연 새 세상" 란 주제의 기획전을 열었고

올해 2018년도 10월에는 제 15회 특별 기획 전시로 " 경기 이천 기독교 1919" 라는 주제로

경기 이천 기독교 3.1 운동의  역사 기획전을 열 계획이다

역시 예약 없이 갔는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하는 사람도 사무실도 없고 아래충 문들을 닫혀 있다

이충인가 하여 올라 가보니 텅빈 방들에  수리중인지 여기 저기 어지럽게 물건들이 널려 있는데다 인기척 조차 없다

이 더운날 여기까지 애써 찾아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싶은데다 뭔가 이상하기도 해서

다시 아래충으로 내려와 "아무도 없어요" 하고 큰 소리를 내니 그제서야

현관 안쪽 왼쭉 문이 열리며 직원인 듯한 여자 분이 어떻게 오셨냐고 묻는다

어이가 없어 박물관 뱡문하러 먼데서  찾아 왔다 하니 방으로 들어 오랜다

맙소사! 바로 전시실인데 목사님들인듯한 분들 대 여섯 분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계신다

아니 문을 꼭 닫고 인기척도 없고 문에 아무런 표시하나 없으니 방문자가 와도 모르고 갈 수도 있겠다 싶다

일단 시원한 냉방 시설이 되어 있어 땀을 식히며 잠시 쉬고 전시실을 둘러 보는데 촬영은 불가란다

다만 한 부분 한영제 장로님 관련 부분만 촬영해도 좋다나...

설립자 향산(香山)은 1925년 6월 4일 평안북도 구성군 사기면 향산동(香山洞)에서 태어나

1944년 1월 4일 신시교회에서  고화일(高化一)과 결혼하여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큰 할아버지 한득룡(韓得龍,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의 영향으로 향산의 가족은.

조부모로 부터 3대째 구성군 신시 교회에 출석하였다.

해방 직후 선천의 평북 노회 고등 성경 학교에 입학했지만 북한의 공산화로 1947년 4월 월남했다.

6ㆍ25전쟁에 참전한 향산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1952년 대구 평북 교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55년 5월 대구 평북 교회 이성호 목사ㆍ정학선 장로ㆍ정영록 집사 등과 함께 ’정문사‘를 설립하고

1956년  ‘기독  교문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로 등록하면서 1958년에 서점 ‘교문사’를 열었으며,

 1985년 ‘기독교 대 백과 사전’ 등 수 많은 서적들을 출판했다..

또한 향산은 1985년 사회 복지 법인 '한나 요양원'을 설립하여 1백여 무의탁 노인들을 ‘북에 계신 부모님처럼' 섬겼고,

2001년 평생 모은 10만여 점의 교회사 관련 자료를 한국 교계에 헌납하고자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을 설립했다..

또한 20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백주년'을 기념하여 장대현 교회를 복원한 그는

이를 통해 초대 교회의 신앙이 회복되고, 평화 통일이 이루어져 북한에 교회가 복원되기를 소망했다.

향산은 1964년 5월 신흥교회 장로, 1973년 보성 여자 중 고등학교 재단 감사ㆍ이사, 1985년 한국 장로 성가단 초대단장,

1990년 한국 기독 공보 사장, 1991년 이북 4개 노회 협의회 회장, 1992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장,

1993년 한국 장로교회 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리고 1985년 한국 출판 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전시실에는 원만희 화백(1941~2004)의 초기 교회 모습을 그린 동양화가 걸려 있었는데

평양 장대현 교회.소래교회. 평양 남삼현교회. 안주 중앙 교회. 신의주 동부교회.원산 중앙교회 등이다

또 혜촌 김학수 화백의 '호산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린 동양화로

예루살렘 성문을 남대문으로 묘사하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환영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그려져

사진을 꼭 찍으려 했으나 못 찍고 구하려 해도 못 구했다 ㅠㅠㅠ

잠시 속으로 기도하기를 이 나라가 복음으로 통일되어 제 2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에서

호산나와 할렐루야가 메아리 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다린다

퍙양 장대현 교회 모형인데 기와 담장과 소슬대문. 기와 지붕ㄱ자 예배당과 격자 무늬 창이 고전적이다

전시실에는 1920년대 부흥 사경회에서 사용한 묵시록 도해 설명도와 말세도가

전시되어 있어 가장 인상 깊게 유심히 보았는데 이런 자료들은 프린트해서 널리 알리면 좋을텐데...

주기철 목사가 1931년 부산 초량교회 목사 시절 장로교 탈퇴를 한 윤치병 목사에게 보낸 편지와

양피지 성경 사본과 대나무를 배경으로 그린 예수상도 있었다

선교사가 사용하던 전도지와 1950년대 전도지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14C 양피지 성경 낱장도 있었다

앞에 걸린 그림이 묵시도 도해 설명이다

찬찬히 들여다 보니 요한 게시록이 한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길선주 목사의 친필 병풍이다

길선주 목사는 독립운동과 목회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관계로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아 한시를 남겼다.

돌로 조각된 포도 접시다 진짜 그릇으로 사용은 안 했겠지?

한옥 예배당 곱새 기와 십자가 문양

신사참배 증명록인데  1938년 일본 교토와 나라, 도쿄 등지를 순방하며 신사와 불교 사찰을

참배하면서 그 증표로 받은 기념 도장들

이 증서 가지고 신분 안전이 되어 마음이 진정 편안했을까?

언더우드 타자기.

1885년에 내한한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버지와 형은 타자기 회사를 경영 하였다.

언더우드는 이들의 선교 후원을 많이 받게 되었고 일찍부터 타자기를 사용 하였다.

1930년대에 한글 타자기를 생산 하였다

역사관 본관 전시실 사진은 빌려오기도 하고 몰래 찍은 것도 있다.

본관 정문을 나와 옆길로 돌아가니  복원된 장대현 교회 입구 소슬 대문이 보인다

1백년 전 한국 교회 부흥의 역사를 재발견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장대현 교회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들어가는 대문은 물론 예배당 외관과 내부까지 그대로 5분지 일 크기로 축소 복원하였다

(현재 평양시 중구 효자동에 있었던 옛 장대현 교회 터에는 김일성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오! 하나님. 하루 속히 이 가증한 것을 쓸어버리고 다시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그곳에 서게 하소서!

박물관 부지에 복원된 장대현 교회의 외부 형태는 ‘ㄱ’자 형태로 내부 구조 역시 동일하다.

이덕주 부관장(감신대 교수)은 “1백년 전 당시 장대현 교회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며.

“크기만 120평에서 5분의 1 크기인 25평으로 축소했다”고 밝혔다. .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500여명이 모인 이 집회는 그래함 리, 스왈른, 번하이젤, 윌리엄 헌트, 블레어 등이 강사였다.

길선주 또한 이 사경회의 강사이자 이때의 부흥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뜨거운 집회의 열기를 막지는 못했다.

ㄱ자 형 예배당에 남자 성도 여자 성도 출입문이 각각 다르다 ㅎㅎㅎ

물론 예배당안에도 강대상을 중심으로 남녀 석이 구분되어 있고 가림막으로 가려 놓았다

다행히 이곳 장대현 교회 실내에서는  마음껏 사진을 찍으라 하니 다행이다

다 같은 전시실인데 한 곳은 사진 촬영 불가이고 한 곳은 촬영 허락이라니 이해하기 어렵네?

ㄱ자 모서리에 강대상을 중심으로 ㄱ자로 남녀 구분석을 만들었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자주색 커텐으로 한쪽이 보이지 않게 가림막 역활을 한다

강대상이 기억자의 모서리에 있어서 남 녀 모두 볼 수 있게 하였다

목사님도 남자인데 여자 성도들이 보아도 되남? ㅎㅎㅎ

이렇게 복원된 장대현교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옛날 찬송과 성경책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으며 .

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회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단다

사실 나는 가끔 나는 옛날 합동 찬송가 가사가 더 은혜스럽게 생각될때가 있다

아예 옛날 그대로 마이크 시설도 없었으면 좋으련만...

장대현 교회 강단에 서서 기도하는? 손형준 장로 ㅎㅎㅎ

영상 시설이 없던 시절 한지에 붓글씨로 쓴 찬송가 가사를  한 사람이 지켜서서 긴 막대로 일일히 넘겨 주었다

마루 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리던 그 때가 그립다

장대현 교회 초대 목사님이신 마포 삼열 선교사님이 강단에 서 계시네...

전시실은 예배. 성경번역. 교육. 사회봉사. 여성. 한국의 근대화.이런 주제별로 잘 전시되어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 구령 운동이다.

특히 1907년에 일어난 평양 대 부흥운동은 한반도의 오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남문밖교회(1903), 창동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 등이다.

이런 점을 보면 장대현 교회는 평양의 중심 되는 교회였다


장대현 교회 설명은 사진에 있는 설명을 잘 보시기 바람.

1935년도 것이라 그런지 한글이 제법 현대화 되어있다

서서평 선교사 이야기는 얼마전 영화로도 나왔다

교회 마당에 세워진 마포삼열 목사. 길선주 목사. 이길함 선교사, 한석진 목사 기념비가
한 돌비에 면마다 이름을 새겨 기념비로 세워져 있다

사무엘 머펫 선교사( Samuel Austin Moffet. 마포삼열1884.1.25~1939.10.24)

1890년 1.25일  미 북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서 활동하다가 1893년 이후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01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지냈으며 장대현 교회 초대 담임 목사로  재직하였다.

자신의 사랑방에서 김종섭, 방기창 2명을 데리고 신학반을 시작한 것이‘대한 야소교 장로회 신학교’의 시작이었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로서 ‘평양 신학교’로 불린 이 학교는 오늘날 총신대, 장신대, 고신대, 한신대 등의 전신이다,

1918∼1928년에는 숭실 중학교와 숭실 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매큔(George Shannon McCune,윤산온 1872~1941.12.1)

에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1860 6.30~ 1956.8. 29일)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 무근의 날조 사건이며 고문 등 비 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 하여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항의하고

미국의 북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1936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한지 3년만에

캘리포니아 몬로비아에서 병으로 소천하였다

이제 한국을 떠난지꼭 70년만에 평소"나를 조선 땅에 묻어 주오" 라고 말했던 그의 소원대로 그의 유해가 돌아왔다

서울 광장동 장로회 신학 대학교(총장 김중은.)는 2006년 5월 9일 개교 105주년 기념일에,

교내 이상조 기념 도서관 앞 동산에 마포 삼열 목사의 유해를 이장했다

또한 장신대는 묘소 앞에 홍익대 박석원 교수가 제작한 마포 삼열 선교사의 흉상도 세웠다

.

1936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가방 두 개만 들고 쫓기듯 한국을 떠난 지 꼭 70년,

그가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지 67년 만에 그가 설립한 장로회 신학 대학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아들 중 사무엘 휴 모펫 목사는 장신대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미국 프린스턴 신학 대학원 석좌 교수로 있으며

넷째 하워드 모펫 박사는 대구 동산 병원 원장으로 오래 재직하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날 이장 예배에는 마 목사의 셋째아들 새뮤얼 모펫 목사(마삼락∙91)와

 넷째 아들 하워드 모펫 박사( 마포화열∙89) 내외가 참여했다.

마삼락 목사는 아버지가 하늘에서 ‘샘, 내가 조그맣게 시작했던 신학교가

이렇게 훌륭한 대학으로 발전한 것을 보니 너무나 행복하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나 멋진 사람들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포 삼열 목사의 일화 중에 평양의 시장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깡패에게 얻어맞아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는데.

당시 마 목사에게 돌을 던져 턱을 부순 깡패가 훗날 한국 교회 첫 선교사가 된 이기풍 목사였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道)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했다.”

(한기총 편 ‘한국교회 120인 설교집’ 중).

그는 실로 위대한 전도자요 목회자요 또한 교육자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도 노력한 사람이었다.

 

*105인 사건

1911에 일어난 일본이 한국의 민족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건들 중 하나이다.

1910년 독립 운동가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사소한 충돌로 인해 밀고당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단순한 모금 활동에 불과한 것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 사건으로 확대 조작하여

그 빌미로 신민회 간부 및 기독교 지도자와 교육자들을 160여명 대커 투옥시켰다

증거 불 충분한 이들을 제외하고 128명을 기소하여 1심에서 유죄 판결 받은 이가 105인이라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 1869.3.25-1935).11.26)

길선주 목사는 젊어서 선도(仙道) 수행을 하다가 기도하던 중,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27세때 그레이엄 리 (이길함) 선교사로 부터 세례를 받고 1901년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다

 

1907년 평양 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최초 장로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평양의 모 교회인 장대현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였고 '해타론', '만사성취','말세학' 등 저술을 남겼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1920-30년대에는

 '재림신앙'을 강조하는 부흥사로 활동하다가 1936년 10월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 교회에서 열린

평서노회 사경회 새벽 기도를 인도하던 중 쓰러져 소천하였다.

 

민족 운동과 관련하여, 1911년 선천 신성 중학교 교사로 있던 그의 맏아들 길진형이 105인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1914년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1919년 삼일 운동 때 그는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1년 반 옥고를 치렀는데

같은 시기 둘째 아들 길진경 역시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함께 옥고를 치렀다.

길선주 목사는 독립 운동과 목회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관계로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아 한시를 남겼다.

한석진(韓錫晋 1868.9.6~1939.8.20)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의 양반가 문인

청주(淸州) 한씨 한지운(韓祉云)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9세 때부터 19세까지 한학(漢學)을 공부했으나, 종교적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유교에 염증을 느끼고

의주에 있는 석숭산(石崇山)의 금강사(金剛寺)에 다녔으나 생명력(生命力)이 없음을 깨닫고

또한 도교(道敎)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부친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만주에서 돌아온 백홍준과 서상륜을 만나면서 그들로부터 기독교에 관한 생명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1891년 의주에 온 마팻 선교사를 만나 정식으로 기독인이 되기로

서약과 문답을 하고 세례(洗禮)를 받게 되었다

세레를 받은 후 1893년 서상륜과 함께 마포삼열. 이길한, 소완론 선교사가 평양 선교를 개척할때

동역하였고 장대현 교회를 건축하였다

 

<1901년 마팻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장로회 신학교(처음엔 신학반)에 입학,

190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 길선주)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국 장로교에서 최초로 안수를 받은 교역자가 되어 한국 교회 성장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목회하였고

"부디 싸우지 말고 주 안에서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시오" 라는 말을 하며 교회 연합을 소원했다

그제나 지금이나 교회 싸움은 항상 있는 모양이다 ㅠㅠㅠ

이길함 선교사(Graham Lee 1861~1916 .12.2).

그레이엄 리는 1861년 미국 일리노이 록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레이크 퍼리스트 아카데미,

프린스턴 대학,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레이엄 리는 1894년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아내 웹(Blanche Webb)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그레이엄 리와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그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하디의 평양 선교사 사경회와

9월 하워드 애그뉴 존스턴의 서울 사경회는 그들 모두에게 ‘벧엘’이었다.

평양 선교사들은 교파와 연령을 초월해 매일 기도회를 가졌다.

평양 교인들도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매일 1시간씩 기도하기로 약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07년 1.6~14 동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부흥 사경회에 그레이엄 리 선교사는 말씀을 전했는데

무려 성도들이 3000여명 이상 몰려와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임하여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07년 2월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도 강력한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모인 무리들이 자신들의 죄를 통회 자복하며 기도할때 성령의 부으심이 문자적으로 뜨겁게 임했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임재였으며 그 다음날도. 성령의 역사는 더 뜨럽게 임했다

이렇게 장대현 교회에서 발흥한 평양 대 부흥은 평양 전역과 전국의 주요 도시로,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부흥이 임하는 곳마다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다.

성령께서 평양에 모인 부인 사경회 때 임하셨고, 평양 숭실대 개강 수련회 때도 임하셨다.

1904년 9000명이던 교세는 1907년 12만명으로 급증했고 개인의 각성이 사회변혁으로 이어졌다.

기생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다

1907년 1월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사경회 때 평양대부흥을 견인한 사람도 그였다.

새뮤얼 마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 선교부를 개설하고 장대현 교회를 개척, 담임했으며

 평양 전역에 많은 교회를 분립했고  평양 선교의 기적을 창출했다

 

1907년 한국을 방문해 여러 선교지를 둘러본 미국의 잡지 ‘아웃룩’의 기자 윌리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필자가 미국을 떠나온 후 만났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선망하는 한 사람,

그의 여러 면이 어떤 다른 사람보다 더 탐날 가치가 있는 듯한 그 사람은 평양의 그레이엄 리다.

수백명이 그를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라 부른다. 그는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우는 일을 힘차게 돕고 있는 중이다.”

다른 글에서는 이렇게 썼다. “한국 평양의 그레이엄 리가 신었던 신발보다 더 닳아빠진 신발을 신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주님! 우리 대한민국 교회에 다시 한번 1907년 평양의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평양을 복음으로 수복하는 그 날을 주옵소서!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개인과 교회와 국가가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옵소서!

이 악한 세대에 하나님이 보내신 능력있는 영적 지도자를 보내 주옵소서!

외침 전도의 대명사인 최봉석 (권능)목사님의 기념비

평양 신학교를 세번이나 낙제하여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어거지로? 졸업장을 받아낸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예수를 전하는 거리의 확성기가 되어 평양 시민들은 날마다 '예수천당'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지냈다는데

그 능력은 실로 위대하였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실로 많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다

순례기 소래교회편 참조

이 성봏목사 (1900.7.4-1965.8.2)

  평안남도 강동군 간리에서 감리교 권사 아버지 이인실과 어머니 김진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가난했던 이성봉 목사의 집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05년 그가 여섯살 때였다

믿음이 신실했던 어머니에게 이성봉은 신앙 훈련과 기도를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가 황해도 신천 장로교회 김익두 목사의 초청으로

신천 소학교 교원으로 봉직하게 되자 성봉도 따라가서 신천의 경신 소학교에 다녔다

거기에서 성봉은 김익두 목사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고 자기도 장차 훌륭한 부흥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이것 저것 돈벌이에 나설수 밖에 없었고

청년시절 불공평한 세상과 하나님도 원망하며 잠시  방탕한 길로 접어 들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한다.

 

21세가 되던 해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단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은 청년 이성봉으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 선교회 성서 신학원(현 서울 신학 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또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다

이성봉 목사의 회개의 글을 읽다보면 애기때 어머니 적꼭지를 문 것 까지 회개했다는 어거스틴의 회개가 생각날 정도로

그의 회개는 구체적이고 세밀했으며 또 회개한즉 꼭 회개의 보상과 열매를 맺은걸 볼 수 있다

이성봉은 1925년 동양 선교회 성서 신학원(현 서울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고 성서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수원에서의 목회 사역과 부흥 사역,1931년부터 6년 동안 목포에서의 목회 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다.

 

1932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6년 신의주 동부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937 년 이 목사님은 성결교단 총회에서 전국교회 순회 부홍 목사로 임명받은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부흥사로 헌신하셨다

이성봉 목사님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 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으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하였고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라고 가르쳤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며 구령 운동보다는 교회 확장과 명예에 매달리는

현대 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사역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목사가 생전 행했던 부흥 집회의 현장은 성령의 불길이 맹렬히 뜨겁게 타오르던 집회,

 회개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는 집회.걱정과 근심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던 집회,

 삶의 변화가 가시적으로 증거되는 집회

심령을 쪼개는 능력의 말씀과 불치의 환자들이 고침받는 신유가 동반된 집회 였다.

그는 한국의 무디였고 한국의 빌리 그레함이었다.

역사 박물관 입구 길 오른편 정원에 세워진 한영제 장로와 정학선 장로 공로비.

한영제 장로 공로비 오른쪽 상단에 기독교문사, 한국 기독교 역사 박물관. 이천 하나원 설립자라고 새겨져 있다.

공로비 뒷면

점심때가 지났는데 이천 쌀밥을 먹으리라는 기대감에 쌀밥집을 찾으려니

쌀밥 집은 커녕 근처에 변변한 식당 하나 없다

직원이 차로 전철역까지 태워다 주어 이천 쌀밥 집 잘하는데 어디냐고 물으니 이 근처는 없고
이천 시내로 들어가야 한단다

배도 고프고 가는 길도 몰라 기대는 접고 결국은 집 근처까지 와서야 점심겸 저녁겸 콩 국수 한그릇으로 대신했다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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