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16. 승동교회

bonitahuh 2022. 10. 20. 07:57

브라질 이민 초창기부터 알고 지내던 이찬재 선생님께서  브라질 대사관 문화관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고 있어

경북궁 곁에 있는 브라질 문화관에도 갈겸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로 가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종로 3가에서 내려 탑골 공원을 돌아 인사동으로 접어드는 초입에 승동교회가 있었다

종로 쪽에서 바라다 본 인사동 거리 입구인데 물이 흘러내리는 커다란 분수 조각품이 인상적이다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좁고 교회 건물이 제법 먼 안쪽에 있는데다 낡은 다른 건물의 벽면이 앙편에 자리하고 있어

위에 걸린 승동교회 간판을 쳐다 보지 않고는 그냥 지나치기가 십상이다

우리도 탑골 공원 옆길로 나와 길 건너편으로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서 승동 교회를 찾아갔다

차 한대가 겨우 들어갈 만한 골목길 같은 길을 제법 걸어가야 주위 건물에 둘러싸인듯한 교회당이 나온다

제법 안쪽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왼쪽 벽면에 교회 역사를 담은 사진들이 유리로 된 진열장안에 전시되어 있다

들어가는 양쪽 벽은 아마도 교회 건물이 아닌듯 오래된 낡은 건물 벽면이 차지하고 있고

교회 뒷쪽도 높다란 빌딩들이 버티고 있어 꽤나 복잡한듯 하다

승동교회는 1893년 6월 곤당골 교회(승동교회 전신)라는 명칭으로 미국인 선교사 

무어(S. F. Moore, 1860-1906. 모삼열)목사의 인도로 첫 예배가 드려졌다

1905년 8월에 현재의 위치인 종로 한복판 '절골'이라는 동네에 한옥을 구입하여 에배를 드렸다

'절골'이란 동네 이름은 이 동네에 있던 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승려가 많다해서 ‘승동’(僧洞)이라고도 했다.

후에 승동 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던 길선주 목사의  “이웃 절골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이길 승(勝)자를 쓰기 시작하여‘勝洞’(승동)으로 표기하였다

승동은 나중에는 인사동에 편입되었으나, 설립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승동교회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약 200평 규모이며, 설계자와 시공자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주변 건물에 가려 본래의 당당한 위풍을 볼 수 없고, 또한 들어가는 입구도 주위 건물에 휩싸여 안타까운데

설립 당시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높고 당당한 건물이었다 한다.

현재의 승동교회 건물은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 5월17일에 기독교 역사 사적지 제 1호 지정 감사예배를 드렸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양옥 건물인 이 교회당은 1910년에 착공해 1912년에 준공됐다.

원래 정면에서 중앙부는 대형 아치창(현재는 현대적인 사각 창호로 개조됨)을,

그 좌우는 소형 아치 개구부(현재는 현대적인 출입구로 개조됨)를 두고, 박공에는 원형 창을 냈다.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 수리햇으면 좋았을걸 하고 너무 아쉽다 ㅠㅠ

동적인 구조를 갖춘 초기 개신교 교회당의 대표적인 건물로 그 규모가 웅장하다..

건물 1층 방들의 벽이 2층의 넓은 예배실 공간과 바닥을 받쳐주는 벽돌 조 건축의 전형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교회의 몸체를 두른 붉은 벽돌은 군데군데 색깔이 다른데  한양 도성 성곽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개보수를 한 흔적이다..

이 건물은 수리와 증축이 거듭되면서 건물의 외벽에 구조적 결함이 생겨.

외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철골로 보강하여 안전하게 복원했다..

건물의 벽체와 창호 주변, 지붕과 바닥 틀 등은 20세기 초 서양식 건축기술의 정착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로마네스크풍이라고 하는 반원형 아치 모양의 큰 창문이 붙어있는 붉은 벽돌이 눈에 띈다.

옛 종탐이 정겨운데 이 곳 역시나 수리 중이에서 교회 옆 마당이 어지럽게 건축 자재들로 널려 있다

1892년 32세의 나이에,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뎠던 무어(S. F. Moore, 1860-1906. 모삼열) 선교사는

당시 서울의 곤당골(현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곤당골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 안에 ‘예수 학당’을 설립해서, 조선인의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수 학당’에는 백정의 아들인 ‘봉주리’라는 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런데 봉주리의 아버지 백정 박씨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무어 선교사는

동료 의료 선교사이자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던 제중원 원장 에비슨에게 치료를 받게 하여 완쾌하였다

당시 사람 취급도 못받던  백정인 봉주리 아버비는 크게 감동하여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무어 선교사는 이름조차 없던 천한 백정에게 '박성춘'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박성춘은 열심히 신앙 생활하여 세례도 받고 백정들을 많이 전도하여 곤당골 교회로 오게 하였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이 천한 백정과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백정 교인들을 교회에 내 보낼것을 요구하면서

교회 출석들 거부하기 시작하였고 내 보낼수 없다면 양반 좌석을 앞자리에 따로 만들고

뒷 좌석에 백정을 앉힌다면 교회에 출석하겠노라고 까지 요구 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신분 차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곤당골 교회를 떠나  광교 근처에다 양반들 교회인 홍문숫골 교회를 설립하였다

본관 계단 앞 아래에 있는 교회 사무실

백정 박성춘은 자기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됨을 보고 더욱 열심히 전도하여 곤당골 교회로

백정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하여 곤당골 교회는 일명 백정 교회라는 웃지 못할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또한 승동 교회는 대가집 소실(小室)들과 장인들이 모여들어 '첩장교회'란 별명이 붙은 당시의 대표적인 민중교회였다

 

1898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홍문 삿골 교회가 불타고 말았다.그제서야 양반들은 자기네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곤당골 교회로 돌아왔고 결국 홍문 삿골 교회와 곤당골 교회가 합하여

 1896년 중앙교회가 되었다(지금의 승동교회 전신)

몇 해 후에 교회는 점점 부흥하고 백정 박성춘은 교회 장로가 되었고 얼마 후에 왕족 출신 이재형도 장로가 되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왕족과 양반. 천민들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는 진정한 교회를 세워나갔다

복음 안에서는  차별이 없다는 무어 목사님의 믿음이 승리한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계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셧느니라(고전 12:13)

무어 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남녀 차별, 부인학대 문화와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 문화를 개선하고자 애썼다

백정출신 박성춘 장로는 무어 선교사의 지도 아래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조정에 수차례 탄원서를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의 백정들은, 신분 차별에서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양반처럼 망건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법률적으로 다른 모든 국민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110년 전 조선 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가히 혁명적인 신분 평등 혁명이었다.

무어 선교사 한 사람의 말씀안에 바로 선 신실한 믿음의 위대한 승리였으며

조선에서는 무어가 최초의 민중 목회자의 창시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타 헌틀리(Mrs. Matha Huntly)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무어 선교사에 의한 조선의 백정의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고 명명하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조선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라고 기술했다.

이처럼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차별 없는 복음을 증거 했던 무어 선교사는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지 14년만인 191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로 소천 하여 양화진에 안치되었다.

 

또한 백정의 아들 봉주리는 후에 박봉출이란 이름이었다가 후에 박서양으로 개명하였다

봉출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살려준 에비슨이 원장으로 있는 제중원에서 1898년부터 허드렛일을  하다가

제중원 의학당에 학생이 된후 나중에 1908년에 제 1회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를 졸업하고 정식 의사가 되어

우리나라 제 1호 서양의술 의사 면허 소지자가 되었다

그는 또 황성 기독 청년회에서 학생 교육을 맡으면서 대한 국민회 군의가 되어

대한 독립군과 협조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정부는 2008년 8.15일에 박서양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 포장을 추서했다

일제 말엽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폐교되자

1939년 외국인의 주도권에서 벗어나서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신학교가 이 교회에서 출발하였다.

이 학교가 오늘날 한국 신학 대학의 전신인 ‘조선 신학교’이다.

1959년 9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나뉘면서 합동측의 총회가 이곳에서 진행되어

합동측 교단의 모체가 되었고. 흔히 합동측을 ‘승동파’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고신(高神)측과의 재 분열로 교회 건물과 대지를 둘러싼 법정 소송이 벌어져 혼란에 직면했으나,

1971년 문제가 일단락되었고 그 뒤 발전을 거듭했다.

헌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보수 합동측 교회인 승동 교회에서 탄생한 조선 신학교가

진보측 기독교 장로회 측 대표 신학교인 한국 신학 대학의 전신이라니?

1919년 2월 20일 연희 전문 학교의 학생이자 승동교회 면려회 회장이었던  김원벽(金元壁)을 중심으로

전문학교 대표들이 모여 제1회 독립 운동을 위한 학생 지도자 회의가 승동교회 지하에서 열렸으며,

2월 28일 거사 직전에에는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전달된 독립 선언서 1,500매가

각 학교 학생 대표들에게 배포되는 등 3.1 독립 만세 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는 교인들의 민족 정신과 함께, 교회의 위치가 탑골 공원에 인접해 있어서 거사 진행을 돕는 데 쉬웠기 때문이었다.

1919년 3월1일오후 2시경 민족 대표 33인 중 지방에 있은 4인을 제외한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후

일제 경무 총감부에 독립 선언 사실을 통고했고 곧바로 체포되어 구속된다.

본관으로 오르는 계단 바로 옆에 3.1 운동 기념터 표지석과 설명판이 자리하고 있다.

1993년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교회 마당 한 편에 서울시에서

 3.1 독립 운동 기념터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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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탑골 공원에서 민족 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끝내 그들이 오지 않자
포기하지 않고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모여든 군중에게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곧바로 시가 행진에 돌입하므로 3.1 만세 독립 운동에 불을 당겼다

학생들이 시위 행진에 나서자 수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큰 행렬을 이루웠다

 

지금 이 문제로 한국사 인기 강사인 설민석씨의 발언을 두고 유족들은 물론 각계 각층의 비판의 소리가 높다

그는 “민족 대표 33인이 3.1 운동 당일에 학생들이 기다리는 탑골 공원에 가지 않고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후,  자발적으로 일본 경무 총감부에게 연락하여 투옥된 점.

탑골 공원에서의 만세 운동이라는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점.

그러므로 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이끈 것은 학생들과 일반 대중들이었다 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러나 다양한 학계의 평가가 있으며 민족 대표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역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33인중 거의 절반이상이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렇게 만세 운동을 촉발한 것은 승동교회 청년 면려회가 주동했기 때문에 승동교회 역할은 대단히 소중하다

1919년 3.1일 독립 만세 운동에 교회적으로 참가하였고  3월 14일 차상진 김백원 목사, 조형균 등 목회자 12인이 연서한

“12인의 장서”를 작성하여 총독에게 제출 차상진 목사가 체포되고 투옥된다.

12인의 장서는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장서를 보신각 앞에서 발표하고 총독부에 제출한 사건이다

한일 강제 합병의 해인 1910부터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를 했던 일제는

3.1독립 만세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1919-1930)로 식민지 정책을 바꾼다.

또한 승동 교회에서는 대한 여자 기독교 청년 연합회(YWCA)가 창립돼.

여성들의 사회 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 때의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에 큰 역할을 했던 곳이기에,

민족의 아픈 역사 속 특별한 의미 때문인지 여느 교회당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본당 아래층 옆에 교회 역사 자료실인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마침 젊은 교인 한 분이 있길래.

온 사유를 말하고 교회 자료실이 있냐고 물어보니 부 목사님인 듯한 분을 모시고 와서 잠시 문을 열어 준다.

수리하려고 그러는지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된 상태인데 사진을 못 찍게 하여 몰래 한 컷 찍었더니 흔들렸다.

우리 처럼 관심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대로 정리하고 안내 팜플렛 한장 정도는 준비해주면 좋으련만.......

다행히 나가는 길에 벽면에 전시된 교회 역사 자료들이 있어 찬찬히 읽어 본다.

1대.2대 3대까지는 선교사님들이 담임 목사였으며 4 대째부터 한국인 목사이다.

1대 사무엘 무어(모삼열 S. F. Moore 1893.3~1901.11).

2대 레이놀즈(이눌서W. D.Reynolds 1902.9~1906.2).

3대 클라크(곽안련 C.A.Clark 1906.3~1924.6).
그러니까 교회 설립후 31년간은 선교사들이 대를 이어 담임 목사로 목회한 셈이다

일명 깡패 목사로 유명한 김익두 목사가 승동교회 제9대 목사이네.. 이제 알았음 ㅎㅎㅎ.

현재 15대 담임 목사이신 박상훈 목사님께서 27년간 사역하시다가 올해 2월에 소천하셨다.

교회 골목길에서 바라다 본 인사동.

인사동은 벌써 40여년전 한국 살때 가끔 가보곤 했었다.

거기 가면 옛 스런 분위기와 좁은 골목 골목 낡은 한옥도 은은한 맛을 주던 찻 집도 좋았고

그러다가 근처 고궁에도 들리면 마음이 평온해지곤 해서 좋아하던 곳이었다.

어쩐지 지금의 인사동은 외국인들도 많고 사람들이 바쁘게들 오가고 있어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옛스럽고 은근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분주하고 상업적인 거리가 된듯 하여 조금 쓸쓸하다.

인사동에서 제법 걸어가서 경북궁 뒤에 있는 브라질 대사관 옆 브라질 홀로 갔다

이 선생님은 브라질 35여년의 생활을 접고 영구 귀국하셨는데 70이 넘은 나이에 아들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는데 세계 각국에서 팔로우가 무려 40만에 육박하여.

한국은 물론 영국 BBC 방송에도 브라질 방송에도 나간 유명 인사가 되셨다.

주로 손주들과 가족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내어 누구에게나 편안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아내는 한글로 스토리를 쓰고 아들은 영어로. 딸은 풀투갈어로 번역하여 더욱 많은 팬들을 가지고 계신다.

나이 들어 이런 멋진 노후를 보내는 두 분께 찬사와 박수를 보내드리며 반가운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