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종묘((2012.02.06)

bonitahuh 2022. 11. 12. 09:27

궁궐 탐방의 마지막 코스로 종묘를 찾았다

종묘는 시간에 맞추어 해설사와 함께 들어가야 입장이 되므로 아침 11시 20분에 예약을 했는데

시간이 40여분 정도  여유가 있기에 종묘 근처를 돌아보았다

종묘앞 광장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군데 군데 긴 의자위에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놓여져 있어

파고다 공원처럼 노인들의 소일거리 장소로 되어 버렸고 여기 저기 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거나 장기를 두는  

무리들로 자뭇 어수선한 분위라서 조금 언짢아 보인다

종묘의 분위기에 맞게 비록 문 바깥이지만 주위 환경도 조금 엄숙하고 조용했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마침 종묘를 찾기로한 전날 내가 즐겨 보는 프로인 KBS의 명작 스캔들 프로에 종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방송에 나온 어느 분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종묘를 가리켜 당당하고 겸손하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마음에 담아 본다

또한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외국에서 온 손님이 우리나라 전통건축 하나를 보고 싶다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종종 듣는 이런 문의에 대해 나는 무조건 종묘(宗廟)를 보여주라고 권한다.

조선왕조 역대 제왕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는 건축사가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가들로 부터 무한한 찬사를 받고 있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전통건물로서 일반건축이 아닌 신전건축임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많은 현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종묘의 뛰어난 건축적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칭하여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오직 기둥과 지붕이라는 최소한의 건축 요소만으로 구성되었을 뿐 어떤 건축적 치장이 가해진 바 없음에도

이와 같이 장엄하고 적막감마저 감도는 고요의 공간을 창출해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입 모아 말하고 있다.

굵고 듬직한 기둥들이 동어반복(同語反復)하듯 열 지어 뻗어 나가는데 묵직이 내려앉은

맞배지붕이 수직의 상승감을 지그시 눌러주며

절제와 경건의 감정을 자아낸다. 그 단순함이 보여주는 고귀함이 이 건축의 본질이다.

종묘 건물을 떠받쳐주고 있는 넓디 넓은 월대(月臺)는 이 제의적(祭儀的) 공간에 긴장과 고요의 감정을 더해준다.

종묘의 월대는 눈높이가 여느 건축과는 달리 우리의 가슴 높이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공간적 위압감이 일어나

더욱 장엄하고 위대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다.

종묘의 정문

종묘의 정문은 남쪽에 사묘(祠廟)의 표문(表門)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 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소하고 단순하다.

.

시간이 되어 해설사와 함께 종묘에 들어서니  근처에 창덕궁. 창경궁이 월요일에는 휴일이라 그런지

일본인 관광객은 더러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은 별로 없어 동행한 우리 일행은 우리 부부와 나이 지긋난 남자분 두명이다

자주색 한복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예쁜 해설사는 약간 경상도 어투로 차분하게 상세하게 해설하며 안내해 준다

종묘는 규모가 간단하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 그렇겠지만 다른 고궁 해설과는 달리

제법 여유롭게 차근히 해설을 들으며 종묘를 돌아보니 차분한 종묘의 분위기를 흐트려뜨리지 않아 더욱 좋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으로서 가장 절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그 뒤 1546년(명종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 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외대문을 지나 종묘 안으로 들어서면 거칠고 널찍한 박석(薄石)이 깔린 길이 중앙과 좌, 우로 구분되어 쭉 뻗어 있다.

이 길을 삼도(三道)라고 하며 자세히 보면 가운데 길이 좌우의 길보다 조금 높음을 알 수 있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神)을 위한 길이라 하여 신향로(神香路) 또는 신로라고 부르며,

동쪽의 것은 임금님이 다니는  길인 어로(御路), 서쪽의 것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라고 한다.

이는 궁궐의 삼도와 형태가 비슷하나 의미와 기능이 다르다. 

신향로는 정전 신문을 통해 묘정 월대에 난 신로(神路)에 이어지는데, 신이 다니는 길로 마련되어

신주를 종묘에 모시거나 제사를 위해 향(香), 축(祝), 폐(幣)를 들여 올 때에 이 길을 이용한다.

왕은 동쪽의 어로를, 세자는 서쪽의 세자로를 이용하여 어숙실에 이른다.

그래서인지 함부로 신로를 밟지 못하게 군데 군데 주의 팻말이 놓여 있어 감히 신로에는 들어서지 못하고

어로와 세자로 위에서 한컷!

망묘루

종묘를 들어서며 오른쪽으로 처음 보이는 건물이다                                                                          

임금이 잠시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사당을 바라보며 조상님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한다 뜻으로 이름 지어진 건물이다.

서쪽 한 칸이 다락처럼 높은 누마루로 되어 있고, 누마루쪽만 팔작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맞배 지붕의 소박한 종묘의 다른 건물과는 구별된다.

 중지당

정문을 지나 망묘루 앞쪽에 있는 연못이 중지당 또는 지당이다 

사각형의 연못과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든, 전형적인 원도방지(圓島方池)형 연못이다.

이 원도방지형 연못이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 형태로, 사각형 연못은 땅을 상징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해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종묘는 제레 공간인지라 

연못에 연꽃 등을 심지 않았으며 물고기를 키우지도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 신당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향대청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지당(池塘)이 있고, 그 동쪽으로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일곽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향대청 내부는 우리가 갔을때는 공개하지를 않아 못 보았는데 이제 5월 첫째 일요일에 일년에 한번씩 한다는

종묘 제례때에 꼭 와서 보리라 생긱히며 아쉬운 발걸음을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어숙실이라고도 하며 국왕이 제사를 드리기전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역시 삼로가 있는데 임금은 가운데 세자는 오른쪽 신하는 왼쪽길이다

어숙정에서 삼로를 따라 정전 동축문에 이른다

왕이 정전으로 제사를 드리려 갈때 이 길을 따라 정전 동축문으로 정전에 들어갔다 한다

역시 가운데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이고 동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 왼쪽은 공신이 다니는 길이다

이왕이면 나도 어로를 따라 걸어보자 하며 남편이 어로 위를 활기차게 걸어가신당ㅎㅎㅎ

전사청

종묘 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정전 동문 입구에 잇으며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전사청 마당에는 제사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던 돌절구가 4개가 남아있고

네모 반듯한 석재단이 둘 있는데  정전 바로 문 앞에 있는 이층으로 된 것은

제수음식을 검사하는 찬막단이고 전사청 앞에 있는 한단의 단은

제물로 쓰이는 소, 돼지, 양등을 검사하는 곳으로 성생위 또는 희생단이라 하였다

전사청에는 제사를 관리하는 하급관리나 노비들이 지내는 수복방 등이 있다.

제청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고 한다.

네면을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팔작지붕의 일각문(一脚門)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우물이 있다는데 아쉽게도 건물안에는 못 들어가 보았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동축문과 수복방

가운데 사각 석재단은 왕이 정전으로 들어가기전 대기하는 곳

임금과 세자는 재궁에서 삼도를 따라 정전 동축문으로 들어와 제사를 드렸다

 종묘 정전                               

겨울의 차가움 속에 침묵하고 있는 정전을 바라보는 순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당당함과

절제된 엄숙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정전 내부는 굳게 문이 닫혀 있어  보지 못하였는데 이것 역시도 일년에 한번

종묘 제례때 열린다 하니 꼭 5월에 다시 와 보리라 다짐한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그 후 영조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신주의 봉안 순서는 정전의 경우 서쪽을 상()으로 하고 제1실에 태조가 봉안되어 있고

정전에는 19실에 왕19위 왕후 30위 하여 49위가 모셔있다

정전 마당은 울퉁불퉁한 박석으로 깔려 있는데 이것은 조선 궁궐의 정전 마당처럼 미끄럼을 방지하고

또한 햇빛이 날때 눈부심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하니 우리 선조들의 지헤로움에 다시 한번 감탄!

정전의 월대 앞 마당에 놓인 넓다란 석재단은 준비된 제수음식을 잠시 놓아두는 곳이라 하고

마당 군데 군데에 큰 쇠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눈비가 올때 천막을 칠때 사용하는 것이라 한다

전 지붕위의 잡상들은 잡귀를 쫓는다는 의미가 있단다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이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건평이 1,270㎡로서 동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되며, 종묘의 건축 양식은 궁전이나 불사의 건축이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반하여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 목적용 건축물임

정전  월대 모서리 옆에 놓여 있는 청동 항아리는 물을 담아 두어 화마를 막는 다는 드므다

 드므는'넓적하게 생긴 큰독'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불귀신이 물에 비친

자기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난다는 의미가 있다 한다

조선 궁궐의 월대 모서리에도 으례히 이 드므가 놓여 있음을 본다

 

정전에 모셔진 신위

제 1실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제 2실   태종대왕(太宗大王)    -   원경왕후(元敬王后)

제 3실   세종대왕(世宗大王)    -   소헌왕후(昭憲王后)

제 4실   세조대왕(世祖大王)    -   정희왕후(貞熹王后)

제 5실   성종대왕(成宗大王)    -   공혜왕후(恭惠王后).정현왕후(貞顯王后)

제 6실   중종대왕(中宗大王)    -   단경왕후(端敬王后). 장경왕후(章敬王后).문정왕후(文定王后)

제 7실   선조대왕(宣祖大王)    -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제 8실   인조대왕(仁祖大王)    -   인렬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제 9실   효종대왕(孝宗大王)   -    인선왕후(仁宣王后)

제 10실  현종대왕(顯宗大王)  -    명성왕후(明聖王后) 인경왕후(仁敬王后)

제11실 숙종대왕(肅宗大王)    -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제12실  영조대왕(英祖大王)   -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제13실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제14실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제15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제16실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제17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제18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제19실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정전 뒷뜰에  보이는 작은 아궁이는 제사에 쓰던 물건들을  불태우는 곳이다

뒤에서 본 공산당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동쪽에 있으며 창건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칠사당과 같은 구조 형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는데 왕의 신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일부러 그 형식을 낮추었다고 생각되며 16칸이라는 보기 드문 건축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전에 와서도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건물이다.

 

칠사당

종묘 창건 때부터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서쪽에 있던 것으로 봄에 모시는 사명과 사호,

여름의 사조, 가을의 국문과 공려,  겨울의 국행과 그밖에 중류의 7사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판문과 격자창을 두고 나머지 3면은 전돌로 벽을 쌓았다

정전 악공청

정전 담장 밖에 있는 건물로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영녕전 밖에도 소 규모의 악공청이 하나 더 있다

양녕전 정문 앞에서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지었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과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영녕전 정전에 모신 신위

1실 목조대왕(穆祖大王) 효공왕후(孝恭王后)
제2실 익조대왕(翼祖大王) 정숙왕후(貞淑王后)
제3실 도조대왕(度祖大王) 경순왕후(敬順王后)
제4실 환조대왕(桓祖大王) 의혜왕후(懿惠王后)

 

서협에 모신 신위

제5실 정종대왕(定宗大王) 정안왕후(定安王后)
제6실 문종대왕(文宗大王) 현덕왕후(顯德王后)

 

제7실 단종대왕(端宗大王) 정순왕후(定順王后)
제8실 덕종대왕(德宗大王) 소혜왕후(昭惠王后)

제9실 예종대왕(睿宗大王)  장순왕후(章順王后)안순왕후(安順王后)

 

 제10실 

인종대왕

(仁宗大王) 

인성왕후

(仁聖王后)

 

동협에 모신 신위

제11실 명종대왕(明宗大王) 인순왕후(仁順王后)  
제12실 원종대왕(元宗大王) 인헌왕후(仁獻王后)  
제13실 경종대왕(景宗大王)

단의왕후(端懿王后 )선의왕후宣懿王后)
 
 
제14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순소황후(孝順昭皇后)  
제15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제16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의민태자비(懿愍太子妃)

일년에 한번씩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 제례가 재현된다 한다

종묘 제례는 세계 무형 문화재로 등록된 500년 이상 전해 오는 것이다

정전과 양녕전의 내부도 또 재궁도 그때서야 일반에게 공개된다하니 명심해 두었다가 그 때 꼭 가볼 참이다

 

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에 나타난 의례 절차, 음악, 무용 등은 중국의 고대문명을 바탕으로 형성된

하, 은, 주 시대의 의례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고대 문화의 특징과 의의를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동양 고대문화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때 처음짓고 세조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육일무 등의 춤을 춘다.

신라향가나 고려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가 있으며,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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