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조선의 궁궐 3.(창경궁 2012-01-26)

bonitahuh 2022. 11. 12. 06:10

창경궁(昌慶宮•사적 123호)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창경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창경궁은 현재 조선시대 건물로 명정전(국보 제22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화문, 함인정, 환경전, 곽덕정, 등이 있고,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1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등이 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전인 창경궁 명정전(국보 제226호)

창경궁 명정전.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16년(광해군 8년) 재건된 창경궁의 정전이다.

국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하고 과거시험 공중연회등 공식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1484년(성종 15년) 건립됐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한 전각이다.

단층의 아담한 규모로 조선전기 궁궐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2층 건물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1층의 단아한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다 

명정전 앞 마당은 조정이라 하는데 좌우에 신하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계의 품계석이 있으며,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명정전 내부. 정전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해와 달,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봉병’ 등 공예류와 회화류 유물이 함께 소장되어 있다.|

천장 가운데에는 나무로 조각한 봉황 한 쌍을 매달아 놓았다.

창경궁 옥천교 (昌慶宮 玉川橋) 돌다리(보물 386호)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류천을 가로 질러 있는 것으로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르는 곳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반원아치형태의 홍예(紅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홍예가 이어지는 공간에는 억센 표정을 하고 있는 도깨비얼굴을 새겨놓아 주의를 끄는데,

공간에 맞추려는 듯 이마가 넓고 턱이 좁아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다리의 양옆에 두어 이 곳을 오가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다리 위는 중간부분이 무지개처럼 약간 둥그스름하며, 다리의 너비는 널찍하게 두었는데,

이는 임금님이 거동할 때 좌우를 옹위하는 의장대 행렬까지 고려한 것이다.

다리의 좌우로는 아름다운 난간을 세우고 양끝의 기둥 위에는 돌짐승을 둥글게 깎아 두었다.

궁궐 안의 다리인 만큼 각 부분의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궐의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이 다리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창경궁을 짓던 때와 연관지어 조선 성종 14년(1483)인 것으로 여겨진다.

뒤에서 바라본 통명전

통명전은 창경궁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내전의 으뜸 전각으로 왕비가 거처하던 곳이다

넓은 대(월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돌을 깔아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게 하였다.

규모는 앞면 7칸, 옆면 4칸, 지붕은 옆에서 봤을 때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원래 왕은 용을 상징하는데 왕이 머무르는 내전의 지붕에 용마루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왕비의 침전인 경복궁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에도 용마루가 없다.

한편 통명전은 비극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역관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희빈 장씨는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갔다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아들(훗날 경종) 균을 낳았다.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에 반대하던 서인들은 쫓겨나고 대신 남인이 정권을 잡는 등 당파 싸움이 치열했다.

그리고 숙종이 인현 왕후를 폐위시키면서 희빈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폐비된 민씨를 복위하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된다.

장씨는 다시 후궁 희빈으로 강등되고. 이에 분노한 장희빈은 인현 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통명전 주위에

죽은 쥐와 새를 묻고 저주한다. 인현 왕후가 승하하고 , 장희빈의 저주도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희빈 장씨의 처소는 취선당으로 통명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희빈 장씨는 나인에서 후궁으로, 그리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라 내명부 수장이 되었지만, 이후 다시 후궁으로 떨어졌다가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양화당은 통명전 동쪽에 있는 건물로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창경궁 풍기대(보물 제846호)

풍기대란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추정하는 깃발을 세운 대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28㎝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양각한 8각기둥을 세운 모양이다.

8각 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 배수 구멍이 뚫려 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으며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매어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풍향의 측정은 농업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측 자료로 세종 때부터는 제도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표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는 풍기대를 절의 당간 지주처럼 만들었으리라 추측된다.

풍기대는 지금은 없어지고 그림으로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측기의 실증적 유물로, 기록에 의하면 관상감(觀象監)과

각 궁궐(宮闕)에 세웠는데, 조선시대에 우리 손으로 만든 독특한 기상 관측기기의 하나로 기상관측기의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창경궁 안에 있는 이 천문 관측소는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조선 숙종 14년(1688)에 만들어졌다.

높이 3m, 가로 2.9m,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 위에 조선시대 기본적인 천체관측 기기의 하나인

간의를 설치하고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간의는 없고 석대만 남아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를 소간의대, 또는 첨성대라고도 불렀다.

관상감의 관원들은 이 관측대에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측하였다.

17세기의 천문 관측대로서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며,

상감에 세워졌던 조선 초기의 또 하나의 관천대와 함께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1909년에 지어진 창경궁 대온실은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설계된 한국 최초의 온실이다.

처음에는 식물원과 동물원이 함께 지어졌으며 2004년에 복원되어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이곳에서는 향나무, 팔손이나무, 꽝꽝나무 등 천연기념물 후계목과 식충식물류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을 볼 수 있다.

일본 신주쿠어원의 식물원 책임자이자 일본에 최초의 서양식 온실을 도입한 일본의 원예학자인 후쿠바 하야토가

식물원을 설계하였는데 춘당지의 북쪽에 대온실을 위치시키고 그 사이에 프랑스식 정원을 조성해 식물원을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