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운현궁 (2012.02.07)

bonitahuh 2022. 11. 12. 09:40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12세까지 자라던 잠저(潛邸)이며 흥선 대원군(1820-1898) 의 사저이며,

한국 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 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 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 정치로의 개혁 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노안문의 상량문이 1994년 5월에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이 쓰여 있었다

노안문이라는 현판은 대원군이 직접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달았다

"공자가 노자를 안지하며" 란 논의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대원군이 아들인 고종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의 이념을 갖고 있다

또한 대원군의 호칭을 왕의 존칭어인 '전하' 다음의 합하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맞은 편 하인들이 사용하는 행랑채의 댓돌은 긴 댓돌이 한 겹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외벌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격조에 따라 댓돌을 높이기도 하고 낮게도 하는데 외벌대가 가장 격이 낮고 세벌대면 격조가 높다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이다

명성왕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기도 하며 고종3년에(1886년)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레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부대부인이 기거하는 운현궁의 안채였으나 명성왕후의 가례거 치러진 후에는

가족 모임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안채를 이로당으로 옮겨 갔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건축미를 느낄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붕의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보여 주고 있다

   노락당 안채를 들여다 보니 명성왕후가 두 아들을 데리고 부대부인 민씨의 생일축하를 하러 온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이로당

고종과 명성왕후와 가례가 치러진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가 어려워지자

1869년(고종6년)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지었다

명이 8칸 측면이 7칸으로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바깥으로는 출입문이 없고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전체가 ㅁ자형 집이다.

건물의 정면 왼쪽에는 흥선대원군이 붓글씨를 쓰기 위해 먹을 갈 때 물을 떠오곤 했던

운하연지(雲下硯池)가 있고 오른쪽에는 햇불 받침석인 요거석(燎炬石)이 놓여 있다.

요거석 오른쪽에는 뒤뜰로 들어가는 문이 작고 화려하게 세워져 있어 여성의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뒤뜰에는 아직도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우물이 하나 있고 돌절구와 함께 담장 아래로 경백비(慶栢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고종이 어린 시절 여기에 있던 소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나무를 타고 놀았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왕위에 오른 후 나무에게 2품의 품계를 하사하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은 1관 및 2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관 안쪽에 2관이 있다.

유물 전시관. 사진과 그림, 유물 몇가지로 운현궁의 건물 소개와 당시 정치 상황, 복식등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흥선 대원군의 초상화  흥선대원군의 적색 조복 및 부대부인의 녹색 원삼.

고종의 현색 면복과 명성왕후의 홍색 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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