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덕수궁을 보고 옛 추억을 떠 올리며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분위기 좋은 정동길을 걸으면서 경희궁까지 걸어갔다
옛 고궁의 사적지로서의 느낌보다는 동네 공원같은 느낌이다
경희궁에 대한 내력을 사전조사 하고 갔는데 옛 궁궐의 웅장함은 간데 없고
또 한번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훼손 파과되어 버린
황폐하고 초라한 궁의 모습에 분노하기 보다는 차라리 가슴 아픈 허탈감이 밀려온다
서궐인 경희궁은 조선의 이궁으로 전신은 경덕궁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10년(1623년)에 건립한 이후,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으며 인조는 경운궁(현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경덕궁(현 경희궁)으로 모시고 자신도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고 후에 숙종과 경종이 경희궁에서 태어났고
정조. 헌종. 철종이 경희궁에서 즉위하였다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 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여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2002년에사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공개 하였다.이왕 엣 궁궐을 복원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다 하나 복원해 나갔으면 하는게 내 개인적인 간절한 바람이다
경희문의 정문인 흥화문
흥화(興化)’는 ‘교화를 북돋우다’라는 의미로 경희궁의 정문이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처럼 ‘화(化)’자를 사용하였다.
흥화문의 현판은 이신(李紳)이 썼다.”고 나와 있다.
흔히 경희궁을 야조개[夜照峴], 야주개 궁궐이라 불렀는데 이는 현판의 글씨가 빼어나 밤에도 광채를 발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흥화문은 경운궁의 대한문과 같이 중층이 아닌 단층인데 창건 당시 정궁이 아닌 별궁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생김을 보면 원형 초석에 둥근 기둥을 세웠고 세개의 출입문 중 가운데 칸은 연등 천장으로,
좌우 협칸의 천장은 우물 천장으로 만들었다
처음에 흥화문은 경희궁의 동쪽 모서리에 있었으나 1915년에 도로 건설에 따라 경희궁 남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절 정문으로 사용하다가 광복 후에는 영빈관의 정문으로
그 후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일제는 비단 흥화문뿐 아니라 여러 문화재의 건축자재들이 박문사 건립에 동원됐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1988년에는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 사업에 따라 경희궁으로 옮겨왔으나 흥화문 옛 자리에 이미 도로가 나고
구세군회관이 들어와 있어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다. 구세군회관 앞에는 옛 흥화문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아무리 왜놈들이지만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이 계시던 궁궐의 정문을 일개 자기의 개인 사당의 문으로 사용하는
무례를 범 할 수가 있었는지 그 무레함에 새삼 기가 막힌다
정사를 드높인다는 뜻의 숭정문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며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돌계단의 양쪽에는 왕궁을 지키는 서수(瑞獸)를 만들어 두었다.
경종.정조 헌종등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정문 좌우로 이어진 행각이 마치 곤룡포 자락처럼 화려하다.
그 행각은 동서쪽 행각과 이어져 있는데 동서행각도 물론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숭정전(崇政殿) 뜰에서 남편과 다정히 서서
경희궁의 정전으로 광해군 19-12년 (1617-1976년)사이에 에 건립된 건물로 경희궁 중에 가장 오래된 전각이이며
경희궁에 있던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정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
역시 다른 궁의 정전들과 마찬가지로 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공식행사.외국 사신접대.궁중연회가 열리던 곳이다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그 후 1926년에 ,지금의 동국대학교 자리인 조계사의 본전으로 사용되기 위해 이전되었다
광복 후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지면서 1976년 9월 현재 위치로 옮겨져 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너무 낡아 완전 이전할 수가 없어서 1985년부터 다섯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된 숭정전 2중 기단을 근거로 현재의 숭정원은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경희궁의 본래 숭정전 자리인 현 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
자정문
숭정전 뒤를 돌아가면 2단의 높은 계단 위에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자정문이 덩그렇게 올라 앉아 있다.
자정전 영역이 법전인 숭정전 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이곳 지형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정문의 좌우 행각도 지형의 높이에 따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경희궁의 전각배치는 마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는 향교의 전각배치를 연상하게 한다.
정문 계단의 기단석 일부는 한눈에 세월을 읽어볼 수 있는 옛 것 들이다.
새로 깍아 앉힌 것보다 색깔이 붉은 까닭은 오랜 풍화로 돌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정전
경희궁의 편전으로 왕이 평소에 거처하면서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고 공식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왕이 승하할때는 임시 빈전으로도 선왕들의 위패를 잠시 모시기도 하였다
자정전 역시도 일제가 헐어버린 것을 서궐도안에 따라 서울시가 발굴하여 확인한 자리에 복원하였다
서암
태릉전 뒤로 돌아가면 작은 언덕같은 대지에 기이한 바위가 있다
바위속에 암천이라는 물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곳에다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 (숙종34년)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점 서암이라는 글짜를 새겨두게 하였는데
서암이라 새겨진 사방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태릉전 뒷뜰에 서서 무엇을 가리키는지 남편을 모델로 한컷!
특별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년)에
이곳을 중수하여 영조의 어진을 모셨다
이 건물 역시 일제때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으나 2000년에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어 달았다 한다
경희궁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마음이 씁쓸하고 몹씨 아팠다
창경궁을 보고 난후에도 그러하였지만 일제에 의해 너무나도 처참하게 훼손된 휑한 모습에
첫째도 둘째도 나라가 부강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힘이 없던 민족이 당한 수모와 짓밟힘을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요!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한 경희궁 자리에 들어선 역사 박물관이며 시립 미술관들과 공원 조성이 하나도 반갑지 않고
이왕이면 옛 궁궐터를 그대로 보존하여 나중에 천천히 하나씩 건물들을 복원해 나가면 얼마나 좋았을꼬 싶다
옛 궁궐들을 되도록이면 많이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되고
또한 복잡한 도시인들의 마음의 안식처는 물론이고 관광 사업적으로도 큰 수익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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