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동안 준비하여 드디어 참가한 해외 교민들을 위한 한 민족 축전의 일주일간의 일정중 오늘이
그 첫번째로 경복궁 관광이다
우리 부부는 한국 방문에서 경복공을 3번이나 갔었다
처음은 가을에 한민족 축전팀과 함께 갔었고 다음은 겨울에 현민이네 부부와 함께 였고 다음은 햇살이 뜨거운 봄날에
브라질에서 오신 이 장로님 부부와 함께 였다
고궁은 갈때마다 계절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회가 일어나서 난 고궁을 참 좋아한다
드높고 맑은 가을 하늘아래 먼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보고
궐안으로 들어가니 우리 일행 400여명과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섞인 관광객들로 궐안이 가득 붐빈다
경복궁에 들어서니 문화재 해설사(궁궐지킴이)들이 여러명이 있어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중국어.영어등으로 구분되어 각기 매 시간마다 안내와 해설을 해주니 한결 관람에 도움이다
경복궁 수문 교대식
지난 가을에 이어 두번째 온 경복궁에서 마침 수문장 교대식 시간이어서 보았다
지난주 덕수궁 교대식과 비교할때 오히려 덕수궁 교대식이 더 화려하고 의상도 색갈이 다양해 보였는데
경복궁 교대식은 의상이 조금 더 웅장하다고나 할까?
경복궁은 조선의 5대궁궐인 창덕궁. 창경궁.덕수궁 경희궁과 함께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북으로는 북악산을 뒤로하여 자리 잡았고 정문은 광화문이다
너른 평지 위에 주요 건물들이 죄우대칭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위엄과 권위 질서와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궁궐이다
경복궁이란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여 1592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다가 1867년 고종때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며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는데 다행히 1990년에 들어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다시 복원하여 궁굴의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감히 조선의 임금이 계신 궁궐을 가리고 그 앞에다 총독부 건물을 짓다니 그 뻔뻔스런 오만함에 기가 막히다 못해 치가 떨릴 지경!
이왕 말 나온김에 나도 한마디!
김영삼 정부가 1995년 총독부 건물을 철거힐때 학계와 문화계 일반인 할것 없이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한다
철거 반대론자는 역사의 유물이니 부끄러운 과거라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찬성론자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엄격히 말해 청와대도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경복궁의 연무장과 과거 시험장이
있던 자리에 지은 것이니 완전한 경복궁 복원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수 밖에 없다
철거 반대론자들의 이론대로라면 서울역과 시청청사들도 일제 잔재이니 철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총독부 철거는 청와대 서울역 시청들의 철거론과는 다르다고 본다
일본의 본심은 조선 총독부를 경복궁 앞에 짓고, 뒤에는 총독부 직원의 숙소인 경무대를 지어
조선의 상징인 궁궐 앞뒤를 모두 가로막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못된 의도였다.
앞뒤가 막혀버린 조선은 기와 맥이 모두 끊겼으니 운도 끝났으므로 독립할 꿈은 꾸지도 말라는 속셈으로 지은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시꺼먼 속셈으로 지어져서 조선의 임금이 계신 궁궐 앞을 가리고 조선의 자존심을 짓밟은
총독부는 마땅히 철거해야 한다고 본다
굳이 조선 총독부 건물이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해야 한다면 다른 장소로 이전하여 보존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쨋던 경복궁 앞에서 철거된 것만은 너무 너무 통쾌하게 잘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무 잘한것 없는 김영삼 정부의 제일 잘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속이 다 시원하다!!!
흥례문 앞에선 남편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된 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고종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파괴한것을 1990년대에 만 85년만에 다시 복원하였다
영재교와 금천
궁궐 안에 있는 어구(御溝)를 금천(禁川)이라고 하고 그 위에 놓인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禁川橋)라고도 불렀는데,경복궁의 금천교를 영제교(永濟橋),
창덕궁의 금천교를 금천교(錦川橋), 창경궁의 금천교를 옥천교(玉川橋)라고 하는 별도의 이름이 있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건설할 때 만들어진 다리이며, 세종 8년(1426) 영제교라고 이름지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립하면서 해체되었고, 해체된 석재 일부가 수정전(修政殿) 앞에 방치되어 있다
1965년 근정전 동행각과 건춘문 사이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후 흥례문 일곽을 중건하면서 원래 자리에 이전 복원하였다.
금천은 이 외에도 궁의 배수로 역할을 했으며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궁에서 위급시 소방수 역할도 했다고 한다.

근정문과 뒤에 근정전이 보인다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중건하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이 문의 남쪽에는 금천교(錦川橋),·흥례문, 그리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궁 정전의 남문 중 하나 밖에 없는 2층 건물로,
위엄을 갖춘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근정전을 뒤로 하고 품계석을 잡고서
경복궁의 근정전으로 정도전 이 ‘왕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지은
근정전은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조회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요 의식이나 공식적인 대례을 행하는 곳이다
중층으로 높은 월대 위에 자리 잡고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를수 있는 넓은 마당에 근정문 방향으로
좌우에는 정1품에서 종9품까지 품계석(品階石)을 세웠다

근정전 내부 용상과 일월 오병도
내부를 들여가 보니 임금이 앉는 용상이 중앙에 높이 있고 좌우로 신하들이 앉는 마루가 있다
용상 뒤에는 일월 오병도(일월 오악도) 가 그려져 있는데 조선 궁궐의 임금이 앉는 용상 뒤에는 반드시 이 병풍이 있었다
생존해 있는 임금은 물론 죽은 임금의 재궁(관)과 신주(위패)의 뒤에도,
그리고 임금의 초상화 뒤에도 반드시 일월오병도가 있다
또 임금을 대신하여 일월오병도를 보여, 왕의 존재를 나타내기도 했다.
일월오병도에는 해와 달, 다섯개의 봉우리, 소나무와 폭포, 물보라 등의 그림이 있다
(1) 해와 달은, 우주의 음과 양의 조화를
(2) 다섯개의 봉우리는, 우리나라 5 대명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삼각산)을 표현한 것으로,
오행(木, 火, 土, 金, 水)의 상생과 상극을 표현하는 원리 仁義禮智信 을 의미한다.
(3) 붉은 소나무 두 그루는 땅과 하늘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4) 땅과 폭포 그리고 물보라는, 산과 강 그리고 하천을 표현한 것으로 조선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쉼없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조합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근정전과 사정전 사이에 있는 출입문으로 삼간으로 이루어진 솟을 대문이다
경복궁안에 있는 편전으로서 근정전의 뒤 사정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사정전은 임금이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고 종친•대신들과 주연(酒宴)을 베풀던 곳이며,
임금이 친림하여 문•무과를 보이던 곳임
조선 초기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에 중건된 것이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이라 하였다고 한다

만춘전

천추전
경복궁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사정전 동쪽(왼쪽)에 만춘전. 사정전 서쪽(오른쪽)에 천추전 이 나란히 지어져 좌우 대칭을 이룬다.
크기와 모양은 정면 6간, 측면 4간의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고종 2년에 붕건되었다

강녕전
강녕전 왼쪽 내부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였으며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근정전 서쪽에 있으며 경회루 앞에 있는 수정전은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어졌다.
수정전이 들어선 곳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 세종대왕이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던 장소이다.
세종 때는 집현전으로 성종때에는 홍문관으로 고종 때에는 군국 기무처로 사용되었다

눈 오는 날 다시 찾은 경회루에서
현판의 글씨는 도승지에까지 오른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글씨에 조예가 깊었던. 조석원(曺錫元, 1817~?)이 당시에 썼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청명한 가을날씨 아래서 본 경회루는 연못에 그 자태가 그대로 그림자 지어져 더더욱 아름다웠다
역시 옛 사람들이 은근한 멋쟁이야!!!
허지만 경회루 안에는 일반인 관람 불가라 못 드러가 보아 못내 섭섭했슴!
경회 누각 사방 트인 공간으로 보는 경복궁의 풍경은 가히 일품!

교태전 앞에서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으로 불렀다.
1553년 명종 때 경복궁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555년(명종 I0) 8월에 다시 지었으나
이것 역시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1869년(고종 6)에 새로 창건하였으나 창덕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이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서 재목으로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과 아름다운 굴뚝
구중 궁궐에서 외롭게 지내는 왕비를 위로하고 왕비만의 바깥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정원이며 옛 궁중의 굴뚝은 아궁이를 아래로 빼고 굴뚝을 바깥에 두었는데 그 또한 아른다운 건축물이었다고나 할까?

자경전(慈慶殿) 뜰에서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민 엄마와 함께 자경당의 아름다운 꽃담 곁에서
단풍이 곱게 물든 아름다운 향원정(香遠亭)을 배경으로 우리 부부가 다정하게 한 컷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뜻의 향원정은 내전 뒤편에 있는 후원으로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땅을 상징하는 내모난 연못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동그란 섬을 두어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다
조선 궁궐의 연못은 거의 네모나고 그 안에 동그란 섬을 두는게 특징인듯..
정자는 둥근 섬 한복판에 네모난 기단을 두고 그 위에 돌기둥을 낮게 세운 다음 2층의 누각으로 꾸민 것이다.
1층에는 평범한 난간의 툇마루를 두었고 2층에는 닭다리 모양의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각 칸마다 예쁜 나무 창살들을 달아 멋을 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각형의 지붕을 올린 다음 가운데 꼭대기에 추녀 마루들이 모이는 곳에
절병통을 얹어 마무리 장식을 하였다.
향원지를 가르질러 향원정에 이르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을 지닌 취향교이다
경복궁 향원정은 맑은 연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한폭의 그림을 보는듯 한데
가히 한국 고궁 정원의 백미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단풍이 곱게 국물들어 더욱 아름다운 향원정의 풍경에
우리 부부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눈물나도록 감동 또 감동!!

곤녕각 댓돌에 앉아 이곳에서 왜놈들에게 시해당한 명성왕후를 생각해 본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나서게 되고,
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던 명성황후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군, 일본 자객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찔러 죽이고,
시신은 이불에 싸고 석유를 끼얹어 녹산에서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주인을 잃은 건청궁은 1909년 완전히 헐렸다가 2007년도에 복원 되었다.
해설사에게 건청궁의 내력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속에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끓어 오른다
그리고 이 건청궁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전기를 사용했던 건물이기도 하다.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은 처음에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건청궁 서쪽으로 옮겨졌다.
집옥재는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의 봉안장소, 서재 또는 외국사신의 접견장으로 사용하였다.집옥재는 경복궁의 대부분 전각들과는 다른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팔우정은 팔각 누각으로 기둥 상부에 청나라풍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궁궐의 빈전인 태원정은 경회루 왼쪽길을 돌아 들어가 경복궁의 후원 서북쪽 공간 나지막한 함지(盆地)에 자리 잡고 있다.태원정 정문인 달숙문을 지나서 중문인 경안문을 들어서면 지붕이 있는 아름다운 긴 천랑(복도)를 지나 태원정에 이른다
처음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들을 봉안하였으나 주로 왕실의 제사(國忌)와 관련된 제례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궁궐 뒷편 조용한 곳에 넓게 자리한 태원정 일곽은 숙연한 느낌이 드는 엄숙함마저 감도는 것 같다
임금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빈전(殯殿)인 이곳 태원전에 재궁(梓宮: 관)을 안치하였다가
도성 밖 산릉에 재궁을 묻는 절차가 끝나면 혼전(魂殿)에 3년간 신주를 모셔 놓은 후에
종묘로 신위를 옮겨가게 된다고 한다.
태원전의 일곽은 태원전, 재실역활을 했던 영사재, 공묵재가 한 덩어리를 이루고
동서 양쪽에는 세답방(洗踏房: 빨래와 청소를 담당하는 나인들의 처소)]이 자리하며
그 둘레를 나지막한 담장과 花階가 감싸고 있다.
태원정 우측 뒤편에 돌아가신 이의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숙문당(肅聞堂)이 있다

일제는 강점 초기(1910년대)에 태원전 경내의 제사와 관련된 여러 전각들을 소리 소문 없이 없애 버려
왕조의 정기를 철저하게 말살하였던 것이다.
일제가 물러가고 빈터로 남아 있던 이 자리에는 1968년 1.2사태로
대신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여단이 들어와 진주하였다
2002년부터 [태원전] 권역 복원공사를 하여 2009년 1월에 개방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자선당
자선당은 이후 몇 차례 소실을 거친 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어 고종 4년(1867)에 이르러 경복궁 중건때 다시 복원된다.그러던중 1915년 일제가 시정 5주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 개최를 앞두고, 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1914년 동궁 일대를 완전히 철거한다. 이때 자선당은 경복궁 철거업무를 맡아보던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져
'조선관(朝鮮館)' 간판을 달아 미술관으로 쓰였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불타 없어지고 기단석만 남는 비운을 맞게 된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자기네 나라 박람회 때문에 남의 나라 귀중한 문화재를 철거해 버리다니,,,
무지막지 한 놈들은 말이 안 통하니 지금까지도 독도며 위안부 문제들을 떼거지를 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후 자선당 기단석은 오쿠라호텔 경내에 방치되어오다가, 1996년 반환되어 1999년 12월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정면 7간 측면 4간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자선당 현판 글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 선생이 썼다
동궁에는 자선당과 비현각이라는 두 건물이 있다.
비현각은 그 부속건물이며 세자가 공부를 하던 곳이다. .
그 비현각 주위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업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춘방)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세자 익위사(계방)이라고 하는 관서 등이 있다.


한국을 방문한 이재익 장로님 조정희 내외와 함께

궁의 장을 보관하던 경복궁의 장고
경복궁 함화당, 집경당 서쪽에 있는 장고는 궁중의 장을 관리 보간하던 장독대이다
경복궁은 해마다 장고를 개방하는 시기가 있는데 개방 기간에는 궁중 장과 관련된 궁중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기회를 제공하며 이때 고기와 생선을 넣어 담근 궁중 최고의 장인 어육장 맛도 볼수가 잇단다
장독대를 좋아하고 동경하는 나는 그 소바갛고 정겨운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조선의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내전(內殿), 외전(外殿) 동궁(東宮), 주거공간,
궐내각사(闕內各司),후원(後苑)등으로 분류한다
빠르게 걷고 빠르게 해설을 진행하는 해설사들을 좇아 다니기도 바빠서 정작 궁궐을 차분히 볼 여유가 없는 점이 아쉬운데
아마 정한 시간내에 해설을 마쳐야 하는 고충이 있나보다
고궁관람은 사전 지식을 준비하여 시간을 느긋하게 가지고 차분하게 역사를 음미하며 하는 것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광화문 담 밖 길가에 있는 경복궁의 망류 동십자각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돌려 삼청동 방향으로 꺾어 올라가는 길모퉁이에
문루 하나를 만나게 된다.이것이 바로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망루이지만 궁궐 부속건물답게 위엄이 있다.
지붕은 네모뿔 모양의 사모지붕이며 위에는 용두와 잡상이 놓여져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이라고 하는 병모양의 장식이 있어 화려한 느낌도 든다. .
동십자각은 국내에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궁궐 망루다
원래는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조성된 경복궁 외궁성이 건춘문을 향하여 꺾이는 곳에 세워진 것으로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에는 원래 궁궐 전면 담 양쪽 모서리에 궁궐내외를 감시하는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 십자각이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동십자각의 반대쪽 지금의 효자동길 입구에는 동십자각과 꼭 같은 서십자각이 있었다.
이 건축물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로 올라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1926년 왜놈들이 전차 선로 깔면서
아예 철거해 버렸다.이래 저래 일본놈들의 무식한 처사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
제자리를 잃어버린 채 외롭게 서 있지만 동십자각이 이런 식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수도 있겠다
*십자각의 상징적인 의미
십자각은 망루로서 옛날부터 전해져온 궁궐 조영 제도에 따라 설립된 건물이다.
궁궐이란 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로 궁은 임금이 사는 규모가 큰 건물을 뜻하고
궐은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되었던 망루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궐에 해당하는 동 십자각이 서 십자각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지금의 경복궁은 궁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궁궐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지금은 왜곡된 모습으로 남았지만, 동 십자각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국내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궁궐 3.(창경궁 2012-01-26) (0) | 2022.11.12 |
---|---|
조선의 궁궐 2. (창덕궁 )2012.01.06 (0) | 2022.11.11 |
광화문. 광화문광장 (2011-10.27 ) (0) | 2022.11.11 |
경복궁 고궁 박물관.민속 박물관.(2011.3) (0) | 2022.11.11 |
국립 중앙 박물관(2012.3) (0) | 2022.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