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조선의 궁궐 2. (창덕궁 )2012.01.06

bonitahuh 2022. 11. 11. 11:25

제법 쌀쌀한 날씨지만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을 보러 나섰다

한달전에 넘어져서 다친 손에 기브스를 한 채로 고궁관광을 하러 나갔으니 나도 꽤 극성인 셈이다

먼저 창경궁과  해설사의 시간에 맞추어 후원을 보고 나서 궐 밖에 나가 점심을 사먹고 다시 창덕궁을 보러 갔다

지난번 경복궁 관람때는 아무 준비없이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도 잘 모르는지라 나중에 여행기를 쓸때도

여기 저기 자료들을 찾아보고 후에 기회가 되어 두 번이나 더 가 보고야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아예 먼저 자료조사를 하고 사전 지식을 가지고 창덕궁 ,창경궁, 후원을 둘러 보러 갔다

그러함에도 창덕궁 해설사는  어찌나  빠르게 걷고  말을 빠르게  하는지 따라 다니기에

숨이 다 찰 지경이고 알아듣기도 힘들다.

어휴! 준비 없이 그냥 또 왔으면 어쩔뻔 했누?

창덕궁은 원래 이궁(離宮)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로 줄곧 정궁(正宮) 구실을 하였다.

 창덕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성 500년 다섯 궁궐 가운데 그런대로 옛 규모와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눈길을 끌 게 한다.

호암 문일평은 "호암전집 제 3권"  "고건물 순례"에서 창덕궁의 특징을 손꼽아,
첫째로 조선왕조 초기의 건물인 돈화문을 유지하고 있고,
둘째로 후원과 같은 서울 제일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대원지(大苑池)를 지녔으며,
셋째로 궁궐 규모가 굉장히 화려하고,
넷째로 각 시대의 신구 건물이 들어 있으며,
다섯째로 궁궐 제도가 그대로 구체적으로 남아 있으니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1405년(太宗 5년)에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된 궁궐이다.

세종(世宗) 때 집현전과 장서각 등을 세웠고, 1459년 세조(世祖)가 옮겨오면서 규모를 15만여평까지 넓혔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버렸는데, 1606년(宣祖 39년)에 복구하기 시작하여

1610년(光海君 2년)에 끝마쳤다

이 후에도 여러 차례의 화재와 정변이 있어서, 1623년 인조반정으로 궁궐일부가 소실되었고,

1803년에는 인정전이 전소되어 그 다음 해에 다시 지었으며,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을 비롯한

여러 내전(內殿)이 불에 타는 등 피해가 컸다.

그러나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건축의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궁이며, 광해군 이후 고종까지

13대에 걸쳐 258년간 본궁으로 쓰였던 곳으로서, 경복궁보다도 더욱 궁궐다운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모든 넓이는 135,212평이고 궁궐 건물 13동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으며, 나머지는 복원공사중이다.

거의 일직선으로 건물을 배치한 경복궁과는 달리 산자락을 따라 주요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자유롭게 지그재그식으로 배치하여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나고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점이 인정되어 조선 5대 궁궐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뒷 모습만 보이는 저 남자는 바로 내 남편이랍니다 ㅎㅎㅎ

정문인 돈화문의 중앙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사용하였고 신하들은 옆의 금호문으로 드나 들었다 한다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대문중 가장 오래된 문이다  1611년 (광해3)에 중건된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조선 궁궐의 대궐문은 어느 것이든지 중앙은 임금 만이 드나들었고 신하들은 그 옆 문으로 드나 들었다 한다

경종 원년 (1721)에 보수시킨 기록이 있고 1890년대에는 왕실에 자동차가 나타나면서 차량의 진출이 가능하도록

문지방을 끼우고 뺄 수 있도록 하였으며 현재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문지방이 없는 상태이다.

진선문 앞 금천교 다리에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이 바로 진선문이다.

조선의 궁궐은 정문을 지나 임금인 계신 편전으로 들어가기 전 으례히 이런 금천교를 지나야 한다

다리 아래 흐르는 냇물은 금천, 그 위에 다리는 금천교라 한다

다리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1411년(태종 11)처음 지을 때의 그 다리가 참 고맙게도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돌다리 중에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궁궐의 마당 금천교 밑에  흐르는 냇물은 궁궐을 출입하는 신하들이나 사람들이 나쁜 마음과 이기심을

깨끗이 씻고 들어가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고 다리밑에는  악귀를 물리친다고 여겨지는 

상상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어 금천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쪽에는 해치 한 마리가 남향하여 앉아있고 , 북쪽에는 거북이(玄武) 한 마리가 북향해 앉아 있다

 해치는 앞서 말한 바처럼 정의를 수호하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상상의 동물로

명당수를 타고 침입하는 악귀를 방어하고 있고, 현무는 사방위신 중 북방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해치와 함께 벽사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인정문

인정문은 인정전의 정문으로 태종 5년(1405)에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경 재건 되었다.

영조 20년(1744) 10월 승정원 화재 때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어 이듬해 3월에 재건되었다.

순조 3년(1803) 12월에 선정전 서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2월에 재건하였는데

 이 문도 그 때 재건 된것으로 여겨진다. (보물 813호)

인정문의 편액은 검정바탕에 흰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 때의 명필인 북악(北嶽) 이해룡의 글씨라 한다.

용마루에 붙은 오얏꽃 문양은 일본인들이 해 놓은 그대로다.

 인정문과 인정전 품계석이 늘어선 마당에서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이단 월대 위에 세워진 이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통으로 단층이다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태종 18년(14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세종 즉위년(1418년) 9월에 준공되었다.

이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 된 것을 광해군때 중건하고, 정조 1년(1777) 9월에 조정에 품계석을 설치한다.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1908년 탁지부 건축소에 의해 인정전 내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한다.

 

그 뒤 일제시기에는 인정전은 물론, 그 주변과 조정마당까지 심하게 왜곡되었었다.

현재 인정전의 모습은 1999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인정전은 창덕궁 외전(外殿)의 중심인 법전이며, 국왕의 즉위식,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

신하들의 하례 등이 거행되던 공간이다.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외국사신접견등. 국가의 주요 행사와 의식이 이루어진 곳이다

인정전 마당에서  연산군, 효종,현종, 숙종, 영조,순조,철종,고종등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한다

품계석 동쪽은 문관이 서쪽은 무관들이 중앙을 향해 도열하였다

인정전의 현판 글씨 '인정전'은 죽석 서영보의 필체이다.

 인정전 내부

내부는 다른 정전처럼 어좌가 있고 어좌 뒤에 삼 단으로 만들어진 나무 병풍인 삼절병이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도가 걸려 있다.

 인정전은 다른 궁의 정전과는 달리 1908년(순종 1년)에 서양식으로 일부가 개조되어 전기가 들어오고

샹들리에와 커튼 등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나는 어쩐지 조선 궁궐다운 옛 정취나

고풍스런 멋이 없는 점이 어색하고 아쉽다.

인정전의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오얏꽃, 즉 이화(李花) 문양이 들어 있다.

이는 1908년 창덕궁을 개조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실의 문장처럼 쓰던 문양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황실의 성씨인 이 씨를 의미하는 오얏꽃을 여러 곳에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이화 문양에 다른 의견도 있는데 일본놈들이 조선이 백성들의 나라인 대한제국이 아니라

일개 이 씨 집안이 다스리는 나라로  그 의미를 격하시키기 위해 만들어 넣었다는 의견도 있다.

숙장문

창덕궁의 중문인 숙장문. 내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475년(성종 6)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어차고

인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내전으로 이어지는 숙장문이 있고 숙장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어차고(御車庫)가 있다.

본래는 정승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던 빈청(賓廳) 건물이었는데, 후에 순종 황제의 차고로 쓰였다.

궁궐에 드나들던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고위 관원들의 공간이요, 그런 점에서 궐내각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그런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은  조선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는 일제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예전에는 어차고에 순종 황제의 차였던 캐딜락과 다임러 그리고 평교자(종2품 이상 대신들의 가마)와

초헌(대신들의 외바퀴 수레), 주정소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모두 경복궁 앞에 있는 고궁박물관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기념품 가게와 카페로 변해 있어서 참 기분이 언짢았다

일본이 우리를 능멸하여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도 억울한데 하필이면  

그곳을 기념품이나 카페를 파는 가게로 만들다니...

고궁 복원 공사는 좀더 신중하게 옛 모습 그대로를 살리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선정문과 궁궐중 유일한 청기와 지붕인 선정전

사진에 보이는 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이르는 긴 복도를 천랑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선정전과 선정문을 잇는 천랑을 없애고 마당에 잔듸를 깔고, 선정전의 문을 유리로 장식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부터 시작된 복원으로 마당에 잔디를 걷어내고

선정문에서 선정전에 이르는 길에 천랑을 만드는 복원을 하였다.

.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웠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현존하는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지붕에 값비싼 청기와가 올려진 곳이기도 하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옯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죽은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선원전 일곽

선원전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한다.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친히 분향전배(焚香展拜)하고 생신날에는 차를 올리는 다례(茶禮)를 행한다.”고 되어 있다.

 

구선원전과 신선원전으로 나눠 부른다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 7년(1656)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셔 놓고초하루, 보름, 생신이나 기일 등 수시로 왕이 직접 가거나

혹은 대리인을 보내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었다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왕이 궁궐을 옮겨갈 떄는

반드시 선원전의 어진부터 챙겨갔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궁궐을 잡아먹은 일제로서는 그런 선원전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927년 총독부에서는 창덕궁 후원 서북편에 있던 대보단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짓고 어진들을 옮겼다.

이른바 신 선원전이요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만 남아 구 선원전으로 

지금도  구 선원전은 저렇게 신주없는 사당으로 설렁하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긴 왕의 초상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아쉬움을 더 한다.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희정당 일곽

희정당은 회랑과 연결되어 있어 앞으로는 남행각의 협양문(協陽門)과 선양문(宣陽門)을 통해 들어오고,

뒤로는 대조전 행각과 연결되어 선평문(宣平門)을 통해 대조전으로 들어간다.

임진왜란 당시 창덕궁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어 광해군이 1609년에 재건하였고

인조 반정으로 다시 화재를 당해 인조 25년(1647)에 대조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그 후 또 다시 순조 33년 대조전과 함께 불에 탄 것을 1834년에 재건하였으나,

그후 1917년 11월 19일  대조전에서 화재가 나서 희정당, 대조전 등 내전이 불타 없어졌다.

일제는 창덕궁을 재건하기 위한 목재 조달 명분으로 강녕전을 창덕궁으로 옮겨 와서 1920년 희정당을 다시 지었다.

경복궁 파괴 정책의 일환으로 고의적인 방화로 보는 설이 있는데 그 근거로 경복궁과 창덕궁의 내전

모두 크게 훼손된 점과 그 당시 이루어지던 조선 궁궐 계획적 훼손과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희정당을 짓는 과정에서 옛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근대식 형태의 구조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때 희정당은 본래의 건물과는 다르게 칸수가 크게 늘었을 뿐만 아니라,

정면에 현관을 만들어 차를 세울 수 있게 하였다

내부는  내부에 응접실을 만들어 카펫을 깔고 서양식 가구를 들여놓고 유리창을

이 응접실 동 서 벽에 걸린 그림은 조선 말의 대표적 서예가인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금강산 만물 초승경도’와 ‘총석정 절경도’라 한다 

지금의 희정당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로 사용되는 부분이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중앙부의 3칸은 전체를 응접실로 꾸미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이 되고

동쪽의 3칸은 여러칸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희정당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복도로 사용하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희정당 내부

내부는 내부에 응접실을 만들어 카펫을 깔고 서양식 가구를 들여놓고 유리창을 만들었다

이 응접실 동 서 벽에 걸린 그림은 조선 말의 대표적 서예가인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총석정절경도’라 한다

지금의 희정당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로 사용되는 부분이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중앙부의 3칸은 전체를 응접실로 꾸미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이 되고 동쪽의 3칸은

여러칸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희정당은 원래 침전이었으나 선정전이 공식집무실(편전)의 역할을 하기에 좁고,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사용되면서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연산군 때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대조전

희정당의 뒤의 선평문을 지나면 내전 서뽁에 대조전이 자리하고 있다.

희정당과 대조전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대조전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고,

북쪽에는 서편에 경훈각, 동편에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된 누각이 있으며, 그 동편에 청향각이 있다.

경훈각과 청향각 뒤쪽에는 각각 후원으로 가는 문이 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내전, 즉 침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건물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동쪽에 왕의 침실을 서쪽에 왕비의 침실을 만들었다.

왕비의 생활 공간이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고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대조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복원했고.인조반정 때와 1833년(순조 33년) 그리고 1917년에 각각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경복궁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을 헐어 그 목재로 복원했으며 이때 일부가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이므로 뒤에 화계가 있어야 하는데 대조전 뒤로 여러 전각들이 자리하고

맨 뒤에 있는 경훈각 뒤에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이 대조전의 화계는 경복궁의 아미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화계이다.

 대조전 뒤의 경훈각은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대조전의 부속 건물이다.

본래 2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후 복원 시 단층으로 복원했다.

중궁전 뒤에는 화계가 있어야 하는데 대조전 뒤로 여러 전각들이 자리하고

맨 뒤에 있는 경훈각 뒤에 화계가 조성되어 있다.

이 대조전의 화계는 경복궁의 아미산 못지않게 아름다운 화계이다.

 대조전 뒤의 경훈각은 대조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대조전의 부속 건물이다.

본래 2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후 복원 시 단층으로 복원했다.

성종, 인조, 효종,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흥복헌

 대조전 동쪽에 딸려 있는 전각이다.

1917년 창덕궁 내전 일대에 큰 불이 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교태전을 비롯한 내전 건물을 모두 뜯어내 그 목재로 창덕궁의 희정당,·대조전·흥복헌·경훈각 등을 재건하였다.

흥복헌은 1910년 8월 22일 국권을 일제에 이양하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린

경술 국치의 현장이며,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운명한 장소이다.

성정각

대조전 일원을 돌아나오면 성정각의 정문(남문)인 영현문迎賢門.

( ‘영현’은 ‘어진 사람을 맞이하여 공부에 힘쓰라’는 의미)을 들어서면 희정당 동쪽 곁에 있는 건물이 성정각이다  

왼쪽으로 바로 보이는 건물들이 성정각 일원이다

성정이란 말은 “성의와 정심”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순수하게 뜻을 집중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디

 

이 성정각은 본래 동궁전 영역이었는데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 토론, 곧 경연을 열거나 왕세자가 선생님들 과 공부를 하는 곳,

곧 서연을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성정각 뒤 관물헌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이라 한다

 

과거 동궁전은 현재 후원으로 향하기는 길에도 중희당이란 건물이 있어,

건너편의 육각 정자인 삼삼와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 그러나 현재 중희당 자리에 후원으로 넘어가는 길이 생겨 동궁전이 잘리고 말았다.

일제시대에는 이 성정각 일원이 내의원으로 쓰였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안내판에는 내의원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궁궐 본연의 모습을 알리지 못하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쓰였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의식이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의 궁궐에까지 남아 있음을 보니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번듯하게 솟아 있다.

 남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동쪽에는 또 “보춘”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일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편액은 정조의 어필이다.”라고 되어 있다

낙선재로 들어가는 장락문

문 안으로 낙선재 일곽이 보인다. 내가 사진을 제법 멋지게 잘 찍었네 ㅎㅎㅎ

장락문이라는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다

멀리 보이는 6각형의 6모지붕을 한 전형적인 누각형 건물이 상량정이다.
동궐도에는 육우정(六隅亭) 평원루(平遠樓)로 표기되었다고 하네요.
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며 이름 그대로

삼복 더위에 납량(納凉)을 하기에 적합한 위치와 규모이다.

상량정 북쪽으로는 낙선재 북행각 일부가 남아 있다.

 낙선재 일곽

12칸의 낙선재 남행각에 있는 “장락문”이 정문이 되며, 장락문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성정각 동남쪽에 있는 낙선재 영역은 .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있는데 이를 통칭해 낙선재라 부른다

일반 궁궐건물과는 달리 일반 한옥의 형태로 지어져 친근감이 가고 단청을 입히지 않아 더욱 단아하며

소박한 멋스런 옛 모습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참 마음에 든다

 

낙선제 현판은 청나라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고 기둥의 글씨는 김정희 선생의 스등인 옹방강이 쓴 글씨라 한다

. 낙선재는 조선의 24대 임금 헌종이 즉위한지 13년 (1847)되던 해 낙성을 본 건물이다.

헌종이 사랑하는 여인 경빈 김씨를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고 전해 오며.수강재와 석복헌은 그 다음해 세웠다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바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4면에 亞자분합문 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로 쓰였고, 석복헌은 헌종의 후궁 경빈의 처소로 쓰였고,

수강재는 순조의 비였던 순원왕후가 썼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고종과 순종이 이곳에서 머물던 적이 있었고,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낙선재에서 머물다 돌아가셨고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한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머물다 생을 마감했고.

또 고종의 고명딸이었던 덕혜옹주도 일본에서 귀국해 이곳 낙선재에서 머물다 1989년 숨을 거두어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 거하던 곳이다.

화계와 꽃담, 문창살 등이 아름답다고 알려졌다. 낙선재 뒤쪽 언덕에는 상량정(上凉亭)이라는 정자와 행각이 있는데,

상량전의 이름은 평원루라 한다. 현재 낙선재 영역에서는 낙선재만 일반 관람이 허용되고,

석복헌과 수강재는 매일 두번씩 진행되는 낙선재 특별관람 때만 볼 수 있다.

낙선재 마루에 앉아서 조선 왕조 한 많은 왕손들의 일생을 생각해 본다

나는 낙선재 마루에 앉아 낙선재에 얽힌 슬픈 조선 왕조 최후의 왕손들의

한 많은 일생을  생각하니 잠시 숙연해 졌다

황태자였던 영친왕이 1907년 이곳 낙선재 뜰에서 불과 11세의 나이로 강제로 이또 히로부미에 이끌려

일본에 불모로 잡혀갔고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되어 1926년 4월 25일에 43세를 일기로

대조전 흥복헌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순종황제의 계비였던

순정효황후( 윤비)도 장장 43년이라는 긴세월을 홀로 낙선재에서 그 비운을 달래며 유명을 달리 했다

 

순정효 왕후는 1906년 13세에 동궁(순종)의 계빈이 되어 다음 해에 융희 황제(순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1910년 한일 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 회의때 옥새를 치마 속에 움켜 쥐고 통곡하다가

숙부 윤덕영에게 강탈당하는 통분을 겪기도 했으며 6.25동란 때는

공산당에 의하여 낙선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나라의 비운과 자신의 고독 속에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73세로 영욕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영친왕 이은도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무려 56년간이나 무국적자로 있다가 곧바로 환국하지 못하고

1963년 12월 가까스로 귀국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말을 못하는 기억 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의 병원 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함께 돌아온 왕후인 이방자 여사도 그 후 낙선재 생활 27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에 역시 이 곳에서 운명하였다

 

고종 황제의 고명딸이었던 덕혜 옹주도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다가

독감으로 1989년 4월에 낙선재에게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덕혜 옹주는 1912년 복녕당 양씨의 몸에서 태어난 마지막 옹주로서,

일본인들이 옹주마저 볼모로 데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1918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시종이던

김황진의 조카와 부랴부랴 약혼까지 맺었지만 고종의 이런 배려에도 불구하고

10세 난 옹주를 납치하여 우리나라의 지위를 낮춰 버릴 셈으로 일개 대마도 도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대마도 도주 아들과의 동거 생활 3년 만에 덕혜옹주는 그 동안의 시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쳐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폐인으로 전락하고 영친왕에 이어 귀국하여

낙선재에서 보내다가 1989년에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창덕궁 카페에서  따끈한 유자차를 천천히 마시고 창덕궁을 나가면서  회화나무 아래서 한컷!

조선의 궁궐을 돌아보며 느낀 점은 그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일본어 해설사들는 정말 일제의 만행을 사실 그대로 잘 설명했을까???....

아직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 우기다 못해 교과서에다 거짓 역사를 기록하고

위안부 문제는 내몰라라 하는 그들의 배짱은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아직도 제국주의 우월주의에다 우리나라를 은근히 깔보는게 아닌가 말이다.

여기 저기 거짓 신들이 많고 못된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사과도 없는 그들을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