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요르단 성지 순례기

성지순례 28.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Western Wall)

bonitahuh 2022. 10. 14. 09:21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Western Wall)

 

먼저 영상을 보면서 이 노래를 들으신 후 순례기를 읽어 주세요

 

황금의 예루살렘 (Yerushalim Shel Zahav) 

1,포도주 처럼 맑은 공기 은은한 종소리,  서늘한 저녁 바람 타고 오는 솔잎 내음.

졸고 있는 나무와 돌들 꿈꾸듯 한가해, 적막한 옛 도성 그 안에 벽 하나.

 

후렴: 황금빛 예루살렘아 구리빛 찬란한 성아, 나는 너를 노래하는 수금이다. 

황금빛 예루살렘 아,구리빛 찬란한 성아, 나는 너를 노래하는 수금이다

 

2.샘들은 다 말라 버렸고 장 터도 텅 비고,  예루살렘 옛 성전 터 찾는 이도 없구나,

바위에 뚫린 굴을 지나 바람은 오가는데,  사해 길 행인없고 여리고 길 적막하다.

 

3.나 너를 노래 하리라 관 씌워 꾸미리라 ,나 비록 보잘것 없는 시인이어도

너를 노래하는 내 입술 천사의 입맞춤, 어찌 널 잊겠느냐 황금빛 찬란한 성아

 

4.우리의 샘으로 돌아왔다 저자와 광장으로, 성전 터 위에서 나팔 울려 퍼진다

바위에 뚫린 구멍마다 햇빛 찬란하다. 여리고 길 지나 사해로 가리라.

 

이 노래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맨 뒤에 설명을 붙여 놓았다

성묘 교회를 나와 우리 일행은 걸어서 통곡의 벽으로 가고 있다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좁고 복잡한 상점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보니 드디어 Western Wall 이란 안내 표시가 나온다

들어가는 입구 계단인데 앞에 보이는 하얀 파라솔아래서 남자들이 쓰고 기도하는 키파를 빌려준다.

키파는 유대인 남자들이 머리에 쓰다기보다 얹고 다니는 작은 빵 같은 모자이다

키파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로 머리에 쓰는 거란다

남자는 모자를 쓰야 하고 여자는 옷을 단정히 입어야 한다는데

우리 일행들은 거의 모자를 쓰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들어갔다.

솔로몬 왕이 세웠던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당한 후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BC 515년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일부 귀환하여 다시 성전재건을 하는데 .

스룹바벨 성전이라고도 하는 예루살렘 제 2 성전이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헤롯대왕이 제 2성전을 증축하고 개축하였는데 .

이것을 가리켜 헤롯 성전 또는 제 3성전이라 한다.

제 3성전 크기는 남쪽 벽이 280m, 동쪽 벽이 460m  북쪽 벽이 315m,서쪽 벽이 485m 의 거대한 성전이었다

헤롯(BC37~ 4) 은 BC 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 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물론 성전개축을 시작한  헤롯은 죽고 그  손자 헤롯 아그립바때에야 완성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종교 의식의 중심지였고 성서 및 민족 문화의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도 하였으며

로마 시대에는 유대인 최고 법정이고 공회기관이던 산 헤드린의 집회소이기도 했다

AD 66 년부터 다시 시작된 로마의 압제에 대한 유대인의 반란은 곧 이런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거의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성전은 완공된지 불과 수 년 후인 AD 70년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만 것이다. (요13:2)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유대인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모든 것의 중심이었던 성전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깥 서쪽 벽 일부 약 450m 정도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를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라고 부른다.

이 서쪽 벽은 헤롯때에 것이 아니라 제 2 성전시대때 부터 있어 온 벽이다

성전을 파괴한 티투스는 이렇게 큰 성전과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로마제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며 과시하고자

서쪽 벽의 일부를 남겨 놓았다 하니 교만함의 극치가 아니고 무언인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마태복음 23:37

그 후에 이 성벽은 원래의 성벽 위에 계속해서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통곡의 벽은 밑부분부터 단계적으로

벽돌의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르게 쌓아져 올라감을 볼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를 함께 보여준다

오늘날 남아 있는 벽의 지상부분은 길이 약 57m, 높이 약 19m. 모두 43단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로 땅 속으로 훨씬 더 깊이 들어가 있다.

그 중 상부 17단은 후대에 쌓았으나 하부의 26단은 헤롯왕 시대 특유의 테두리가 있는 길이 4∼5m, 높이 1m의 규모로

다듬은 돌로 쌓은 것이며  벽의 하부 15단은 아직도 지하에 매몰된 채로 있다 한다.

현재 지상에 보이는 아래 7단은 제 2 성전시대로부터  헤롯 대왕이 성전을 개축할때 쌓았던 성전벽이고

위에 4단은 우야마드 왕조 시대에 쌓아진 것이며 위에 자잘한 돌로 쌓아올린 14단은 오스만 터키 시대의 것이다

헤롯 성전이 완전히 파괴 된 후 또다시 132년에 유대인 반란이 있었는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진압되고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지역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예루살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이런 로마 시대를 지나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서 전 세계에 흩어져서 사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파괴 된 날

1년에 단 한 번 예루살렘에 올라와 이 벽 앞에서 기도할 수 있게 특별히 허락되었다.

2000년의 세월 동안 통곡의 벽은 나라 없이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번 이곳에 와서 다 무너져버리고 조금 남아 있던 이 서쪽 벽을 붙잡고 잃어버린 약속의 땅과

무너진 성전을 생각하며 통곡하면서 기도하였으므로 그 때부터 이 벽의 이름이 '통곡의 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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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독립후 1948~1967년 까지는 이곳이 요르단에 속해 있었으나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되찾았았고

1800년 만에 옛 예루살렘을 유대인들이 관활하게 되어 비로소 지금과 같이 유대인들에게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자 최고의 성지가 되었으며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지난 2000년 동안 '통곡의 벽'은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귀향의 꿈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 왔다.

나라없는 백성으로 수난과 박해를 받으며 살아온 유대인들은 이곳을 찾아와서 고난과 한 많은 그들의 삶을

눈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곤 했는데 그래서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런 반면에 또한 이 벽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교도들에게는 메카,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의 3대 성지이자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이기도 하다

632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슬람 교도들은 이곳에서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믿고

이곳에 황금돔 사원을 지었는데. 이슬람 신자가 아니면 사원안에 들어갈 수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통곡의 벽이 서로 자신들의 성지라고 주장하며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오고 있다.

 

AD 70년 로마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제2.3성전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의 신빙성은 전승이나 역사·고고학 등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이스라엘 구 시가지에는 이렇게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을 심심잖게 볼 수 있다

비록 긴 총을 차고 무장을 했으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신 목사님 역시나도 ㅎㅎㅎ

아마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지역이다보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겠지

오른쪽에 보이는 중간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바위돔 사원 내에 있는 '알 아크사  모스크' 사원에 이른다.

또한 통곡의 벽 광장의 북쪽 건물에 가면 지하로 내려가 헤롯 대왕이 성전지대를 확장하기 위해 쌓았던

엄청난 크기의 돌들을 볼 수 있다는데 가이드가 생략을 해버렸는지 보지 못하였고

또한 지하 벽을 따라 가면 비아돌로사 출발점까지 연결된다는데 너무 아쉽다

묻혀 있는 성전 벽을 보려면 윌슨 아치(Willson Arch)안으로 들어가 서쪽 벽 터녈로 들어가면 본다는데

우리는 역시 일정에 쫓기느라 이것도 생략하여 보지 못하고 왔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가이드에게 졸라 들어가 보는건데...... 여기까지 와서도 몰라서 그냥 가다니....

미리 알았으면 들어가보자 졸랐을텐데.....내 무식을 탓해야지 ...

 

돌 틈새마다 빽빽하게 종이들이 끼워있어 간신히 끼워넣고 기도했다.

어쩐지 하나님이 잘 들어 주실 것 같은 예감으로 ㅎㅎㅎ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그 간구하는 것을 들어 주신다는 말씀에 의거하여(왕상 8:29)

유대인들은 기도하기 원하는 기도제목을 돌 사이 사이 틈에 끼워넣고 기도한단다.

목사님도 키파를 쓰고 두 손을 벽에 대고 간절히 기도중이시다

통곡의 벽은 두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은 남자들이, 그리고 남쪽은 여자들이 기도하는 장소이다.

이곳에 들어가는 모든 남자들은 키파라라고 하는 조그만 모자로 머리를 가려야 하고.

 여자는 어깨와 무릎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려야 한다. 저마다 기도제목을 벽틈에 끼워넣고 간절히 기도한다

헌데 우리 남편은 모자라도 썼건만 다른 일행은 맨 머리로 있구면 ㅎㅎㅎ 예의도 없이.....

벽의 틈새가 기도쪽지로 가득 차면 이 곳을 책임지고 있는 랍비들이 일일이 그 쪽지들을 수거하여

부대자루에 담아 감람산 쪽에 있는 묘지에 묻는다.

이 때 아무도 그 내용을 읽지 않는데 이는 기도자와 하나님과 단둘만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줄서서 선생님과 함께 통곡의 벽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너무 귀엽고 이 나라의 교육이 부럽다

이스라엘은 어려서 부터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고 이스라엘 민족사를 가르치는데

비록 어리다 하더라도 철저한 신앙과 민족성이 투철하단다.

이 작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아마도 이런 교육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젊은 부부들이 명심해야 될 일인것 같다. 통곡의 벽에서 심심찮게 성년식도 이루어 진단다

통곡의 벽에서 나와 벽에 붙어 보이는1세기 2층구조로 된 부유층 집인듯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부유한 상류층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집 안에 정결의식을 행할 수 있는 미크베가 있었고 목욕탕이 따로 있었으며, 로마식 주거 생활

크고 넓은 방, 모자이크, 회반죽으로 칠한 고급 스런 방등)을 했던 상류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 황금의 예루살렘(Yerushalim Shel Zahav) *

1967년 이스라엘  독립기념일 전야에, 연례적으로 진행되던 이스라엘 노래 축제에서

 나오미 세메르(Naome Shemer)라는 여인이 부른 '황금의 예루살렘'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예루살렘이 요르단에 속하여 거의 20여년간  엤 성전터가 있는

예루살렘에 다가갈 수 없었던 이스라엘인들의 한을 달래며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황금의 예루살렘은 아직 차지하지 못한 지역인 예루살렘에 대한 그리움을 간절히 표현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민들 사이에 퍼졌는데 이 노래를 발표한지 보름 뒤 6일 전쟁이라는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런데 전장으로 진군하는 병사들 사이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황금의 예루살렘”을 부르고 있었고

“황금의 예루살렘”은 어느덧 전 이스라엘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국민의 노래로 되어 있었다.

최전방 병사들은 이 노래를 통해 위로와 희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요청에 의해 나오미 쉐머는 최전선에서 노래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진군을 도왔었다

.

마침내 이스라엘 최정예 특공대가 아랍군들의 저항을 뚫고 예루살렘 스테반 문을 통과하여

성전산과 통곡의 벽을 함락하고  성지를 회복한 이스라엘 전투병들은 수도 없이 이 노래를 합창하였고,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국민의 입가에서는 환희의 눈물과 함께 황금의 예루살렘이 울려 펴졌다.

또한 황금의 예루살렘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 해방된 유대인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모여든다

분명히 쉰들러 리스트 무척 감명 깊게 보긴 했는데 그 때는 이 노래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ㅠㅠㅠ

이 노래를 들으며 순례기를 쓰다보니 유대인 대한 짠한 마음과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의 연민이 내 마음을 적셔온다

멜로디도 너무 애잔하여 좋지만 가사의 시적 표현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다

아무런 관게도 없는 사람이 이런데 유대인들은 얼마나 애잔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