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29. 부산진 교회. 일신 여학교, 일신 기독병원

bonitahuh 2022. 10. 21. 12:11

오늘도 남편은 쉬라하고 나 혼자 길을 나섰다. 날은 여전히 햇볕이 쨍쨍 무지 무지 덥다 ㅠㅠ

역시 지하철을 타고 좌천역에서 내려 얼마 안 걸어가니 부산진 교회에 도착했다

부산 선교를 말하면 미 북장로교 배어드 선교사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의 데이비스 선교사를 먼저 떠 올린다

호주 장로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4대 장로교 선교부 중 하나다.

부산 선교라는 꿈을 안고 찾아온 첫 번째 선교사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가 파송한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1856~1890)와 그의 누이 동생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Davies)다

데이비스는 영국 성공회 교회에서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이적했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신학을 한 후

1889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8월 17일 멜번에 있는 스카츠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고

일본과 인접해 효과적인 선교가 가능하다고 판단해서 부산으로 향한 것이었다;

 

여동생은 서울에 두고 어학 선생과  하인과 약간의 책만을 가지고 도보로 내려오다 천연두와 폐렴에 걸렸다.

그는 여행 중에도 매일 몇 시간씩 공부를 했으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은 음식 등으로 어려움을 계속 겪었다

도착하기 전 5일간은 폐렴과 천연두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극도로 허약해진 채로

서울을 떠난지 20여일만인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제임스게일의 도움으로 일본인 병원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보내었지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음날 1890년 4월 5일 부산에서 순교하였다

한국에 온지 183일만이었고 그의 나이 불과 33세였다

데이비스의 순교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후일 126 명의 호주 선교사가 한국에 찾아오는 길을 열었다

 

데이비스의 순교 소식을 들은 호주 장로교 청년 연합회와 여 선교사 연합회는 호주 선교사 제 2진으로

 제임스 맥카이 부부(Rev and Mrs James Mackay)와 미혼 여선교사 멘지스(Miss Bell Mezies),

포세트(Miss M. Fawcett), 페리(Miss J. Perry)를 파송하여 이들은 1891년 10.12일에 부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맥카이 목사의 아내인 사라는 한국에 도착한지 3개월 만에 페렴으로 32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였고 맥카이 본인도 건강 악화로 제대로 된 사역을 할 수 없어 결국은 2년만에 호주로 돌아갔다

 

맥카이의 건강으로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호주 선교사 제 2 진은 1893년 5월 초 외국인 거류지역 밖의

현재 초량교회 자리에 선교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이곳은 훗날 부산 선교의 또 하나의 기틀을 잡는다

또 여선교사들은 오랫동안 기도한 결과로 그들의 어학 선생을 통해 부산진의 현재

일신 병원 자리에 있는 한국인 가옥을 매입하게 된다

결국 호주 선교부는  멕케이 목사는 초량 지역에 여선교사들은 부산진 지역에  선교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된다

1894 년 12 월에는 여선교사들을 위한 주택이 건립되었는데, 이곳은 선교사들의 숙소만이 아니라

고아원,최초의 일신 학교로도 사용되는 등 용도가 다양했다

후에 무어, 브라운양 등 계속된 여 선교사들이 조선을 찾아와 여성교육과 인권 향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초량교회와 부산진 교회를 방문하니 각자 자기들 교회가 영남 지역 최초의 교회라고 자랑? 한다

순례기를 쓰면서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부산진 교회 연혁에 나와 있는 배위량 선교사에 대한 사역이 초량교회와 사뭇 다르다?

부산진 교회 연혁에는 미 북장로교  배위량(William M. Baird, 1862~1931)선교사가

미국 공사 헤어드(A. Heard)의 도움으로 부산진에 약 80평 대지의 한옥을 구입하고

11월에 부인과 공관의 미국인 가족,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첫 예배를 드렸으며

이듬해인 1891년 1월 15일 정식으로 출범한 부산교회는 후에 부산진 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산진 교회 홈페이지 P. 129)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배위량 선교사는 1892년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선현교회'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초량교회의 전신이므로

1891년에 출범한 부산진교회가 1892년에 출범한 초량교회보다 먼저 설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던 중 선교지 분할 정책으로 호주 선교부가 부산·경남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교회로 올라가는 담벼락에 붙어 있는 안내판엔 윌리엄 베어드가 부산진교회의 설립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배당 마당에 있는 멘지스 선교사의 기념비를 보면 멘지스가 부산진 교회 설립자임을 말하고 있다

초량교회에서는 베어드 선교사가 1892년에 영선현에 설립한 교회가 초량교회 전신으로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라고 하는데...

누가 먼저든 그게 무슨 큰 문제거리가 되나?

초량교회는 미 북장로교 배위량 선교사에 의해 부산진 교회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멘지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는게 내 개인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베어드는  1894년에 첫 세례자인 3명(남자 1명, 여자 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04년에 왕길지 목사가 첫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비로소 조직교회로 출범한다

분명한 사실은 베어드가 부산 지역을 개척한 첫 선교사라는 것이다.

교회 담벼락에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주제로 글과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부산진 교회 앞 마당에 세워진 데이비스 선교사 순교비와 멘지스와 무어 선교사 공로비

Joseph Henry. Dsvies(1856-1890)

교회 입구에는 데이비스 선교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그의 무덤이 있던 복병산에 세워졌던 옛 비석모양을 본 떠 세워놓았다.

1889년 10월 2일, 호주 출신 헨리 데이비스는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최초의 호주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한양에서 5 개월간 언어훈련을 마친 그는 이듬해 3월, 선교 목적지였던 부산을 향해 선교여행을 떠났다.

스무날 동안 500㎞를 걸어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지만, 그 다음날 4월 5일 그에게 부산은 선교지가 아니라 순교지가 되고 말았다.

천연두와 급성폐렴으로 그가 숨을 거두면서 이미 부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캐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게일을 만나

하룻밤 동안 조선을 향한 선교 비전을 토해내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날 밤 데이비스가 게일에게 전한 내용 중 일부다.

 

“부산까지의 여정은 ‘넘치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쪽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아프다는 겁니다. 주님께 기도합니다.

건강하거나 약하거나 살거나 죽거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구원자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게일 선교사는 헨리 데이비스로부터 들은 내용을 편지에 담아 데이비스의 여동생인 메리 데이비스에게 전했다.

후에 메리도 폐렴으로 고생하다가 치료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시신은 부산항이 굽어  보이는 부산진 복병산에 안장하였다.

헌데 안타깝게도 아파트 재 개발사업으로 묘지가 손실되었다하니 참으로 우리나라 기독교 계의 무성의함은

선교사들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을 배반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싶어 화가 난다

부산진 교회 설립자인 멘지스(Belle Manzies1856. 6. 30-1935. 9.10)와

고아들과 가난한 자를 도왔던 무어(Elizabeth Moore)의 공로 기념비가 교회 뜰에 있다

이 공로비는 1930년 6월 11일 당시 한센병환자 일동과 장로교회와 지역 주민의 뜻으로 기념비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기념비는 1942-1946년 사이에 분실되었다. 그러다 2001년 4월 부산진 교회에서 복원하였다.

부산진교회는 1891년 내한한 호주 여선교사 멘지스(Belle Manzies)에 의해 세워졌다.

그녀는 1892년 버림받은 소녀들을 보살피고 신앙으로 기르기 위해 미우라 고아원(Myoora Institute)을 설립했다.

멘지스는 부산진교회와 일신여학교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까지 30여년을 전도와 교육 사업에 헌신하여

후배 선교사들로부터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교회 로비에 진열되어 있는 사료실이다

부산진 교회 담벼락 건너편에 교육관과 왕길지 기념관이 있다

부산진 교회는 초대 당회장 왕길지 목사를 기리기 위해 2010년 완공한 교육관을 '왕길지 기념관'으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왕길지 기념관은 주일에는 교회학교와 청년들의 예배 장소로 이용되고, 평일에는 주변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장소와 지역 주민을 위한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왕길지(Rev.Dr.Gelson Engel,1868.10일-1939..5.24) 선교사

설명판에 없는 부분만 여기에 쓰려한다

1889년 데이비스가 첫 발을 내디딘 후, 126여명의 호주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았다.

엥겔 목사는 1900년 10번째로 한국에 와서 37년간 머물면서 초기 경상남도의 교회설립과

평양신학교 교육에 주춧돌을 놓은 호주 선교사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1900년 10월 29일 부산에 와서 1937년 3월 25일 한국을 떠나기까지 36년 5개월간 부산(1900-1919)과

평양(1919-1937)에서 봉사했던 위대한 선교사였다

 

엥겔은 그의 나이 32세이던 1900년 9월19일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멜버른을 출발하여 10월2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언어와 풍습을 익힌 그는 한국에 온지 27일만인 11월25일 주일예배 때 처음으로 조선말로 축도를 하여

신자들을 감동시켰으며 3~4개월 후인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만큼 언어에 탁월하였다.

‘엥겔'과 비슷한 발음인‘왕길'에‘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를 덧붙여

자신의 한국 이름을 왕길지(王吉志)라고 지었다

.

부산진 교회는 1900년 10월 엥겔(George O. Engel)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14년까지 담임하였으며,

엥겔은 그동안 여 선교사들이 어렵게 유지해 오던 주일 집회를 정식 교회로 발전시켜 부산진 교회를 조직하여

남자 교인들을 모아 예배당을 건축하였고,또한 수요 기도회를 시작하여 평신도들에게 인도를 맡겼다.

초읍교회와 지곡교회를 개척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부산진 교회의 첫 남성 세례자 심상현의 동생 심취명은 1904년 부산진 교회 최초로 장로가 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1904년 심취명을 장로로 세우고 부산교회 당회를 조직해 초대 당회장을 맡았다

부산진교회는 서울을 제외한 최초의 당회를 부산진교회에서 조직하여 영남 지방 최초로 조직 교회를 세웠다

왕길지 목사의 권유로 평양 신학교에 진학한 심취명은 경남지역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어

1914년 부산진 교회 제2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미 북장로교 선교사 아담슨은 마산과 거창,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 서부지역을,

호주 장로교 선교부 엥겔은 울산과 함안 등 동남부지역을 맡기로 하였다.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동래 일신여학교 운영을 맡아 초대 설립자이자 2대 교장(1902~13)으로

봉직했으며,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제2회 총회장(1913), 경남노회장(1917) 등을 역임했다

한편 그의 부인 클라라는 한국에서 질병을 얻어 1906년 4월 호주로 돌아가 수술을 받다가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평양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왕길지 목사는 10월이 되어서야 휴가를 얻어 한동안 호주에 머물면서

1907년 7월3일 안식년 휴가를 맞아 귀국한 부인의 친구이자 여 선교연합회 소속 선교사로

그보다 먼저 부산에서 활동하였던 브라운(A. Brown)과 재혼한 후 다시 부산에 복귀하였다.

 

왕길지 목사는 1902년부터 평양 신학교의 강사로 매년 3개월씩 강의하던 것을 1919년부터는 전임교수로 청빙을 받아

평양에 상주하면서 귀국할 때까지 신학 교육에 전념하며 성경 언어 및 교회사 교수, 도서관장 등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선교사 교수였으며, 특히 1918 년 창간된 '신학지남'의 초대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27회에 걸쳐 논문을 게재했다. 또한 "조선예수교 장로회 사기"(1928), "구약전서 개역"(1936) 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왕길지목사는 1920년에 성경 개역자문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3~1934년에 아모스서를 개정했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연주하였고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일했는데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길지 목사는 1938년 70세가 되어 31년간 봉직했던 평양신학교 교수와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가, 이듬해인 1939년 5월24일, 7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부산진 교회와 왕길지 기념관을 둘러보고 교회 마당으로 오니 부산진 교회 사모님께서 일신 학교로 안내해 주신다

마침 다른 교회 중등부 주일학생들이 20여명 와서 같이 부산진 교회 앞 조금 언덕에 일신 여학교로 갔다

 건물은 2층 벽돌 서민풍의 건축양식으로 1층 133,485㎡, 2층 126,225㎡ 총 251,060㎡이다.

정면 4각형에 가까운 평면은 장식이 없으나, 전면에 벽돌의 장주(長柱)를 2층 처마까지 계속하여 세우고,

2층에는 목조의 발코니를 내고 거기에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배치하였다.

 1층 벽체는 4군데의 창 둘레의 벽돌외에는 전부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은 벽돌로 쌓았다.

건물은 높은 축대 위에 서 있어 건립 당시에는 멀리 바다가 바라보였을 것이며,

정면의 계단과 계단 2층의 난간은 20세기 초의 서양식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벽돌쌓기와 돌쌓기의 세부 기법이 매우 뛰어나 공이 많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1905년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로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것일 뿐 아니라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뛰어나며 부산지역에 현존하는 근대건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이 건물의 건축 및 교육시설 운영주체, 그 동안 교육시설로서 맡아온 역할 등을

고려할 때 교회사적, 교육사적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이처럼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재임은 물론, 부산·경남 지역 최초의 신 여성 교육기관이자

1919년 부산·경남 지역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의 깃발을 올렸던 독립운동의 산실로서

호주 선교사들의 노력과 어린 여학생들의 민족사랑 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 되고 있다.

2층에 있는 기념관으로 올라갔다

부산진 일신 여학교는 부산에 파견된 호주 장로교 선교회 여자 전도부에 의해,

선교 활동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교육 사업의 하나로 설립되었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의 멘지스(Menzies)와 페리(Perry)는 1891년에 부산에 파견되어,

1895년10월1 5일 좌천동에 있던 한칸의 초가에서 3년 과정의 소학교를 설치한 것이 시초로

마오리 고아원과 교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3명의 여아들로 일신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교명인 일신은 ‘날마다 새롭게(Daily New)’라는 뜻이며, 초대 교장으로는 멘지스가 취임하였다.

1905년 4 월 15일에 현재의 교사를 준공하여 이전하였고 1909년(순종 3) 8월에 사립 학교 인가를 받고,

더불어 3년 과정의 고등과도 병설하였다.

이 고등과는 후에 동래학원으로 이어져 현재의 동래 여자중 학교와 동래 여자 고등학교 전신이 되었다.

1915년 8월에는 학칙 개정에 의해 수업 연한 3학년이었던 소학교와 고등과를 4학년으로 증설하였다

1925년 6월 10 일 동래구 북천동에 신축 교사를 지어 이전하여 동래 일신 여학교라 불리게 되었다

.부산진 일신 여학교는 한국 기독교 사적 제 7호로 지정되었고 2003년 5월에 시 지정기념물 55호로 지정되었다

또 일신 여학교 아래에는 역시 호주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일신 기독병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진 교회는 일신 여학교·일신 기독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역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일신 여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부산진 교회 교인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일어선  3.1 만세 운동은

부산 구포시장과 경남 거제, 통영, 그리고 황해도를 이어 전국 3위의 만세운동 참여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층으로 된 일신 여학교는 아래층에 교실을 재현해 놓았고 이층에 전시실이 있었다

당시의 교실을 그대로 복원해 놓았는데 내 어릴적 교실 모습과 그 시절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두 사람씩 나란히 앉아 공부하던 초록색으로 칠한 나무 책상이며 걸상이며 나무 마루 바닥에

길다란 칠판과 한켠에 놓여진 풍금까지 가난했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 그 때가 그립다.

또한 민족의식 고취로 인하여 부산 경남 지역 최초의 3.1 독립 운동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나의 큰 외숙모님은 일신 여학교 출신이셨는데 내 여고시절 가끔 일신 여학교에 대해 말씀하실때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회 졸업생 양한나(1893-1976))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부산 YMCA를 창설하였다 

당시 고등과 학생으로 독립 운동에 투신했던 김반수 지사(대통령표창, 1992), 박차정 (독립장, 1995) ,

심순의(대통령표창,1992), 김응수(대통령표창,1995), 이명시(대통령표창, 2010)등이있고

또한 일신 여학교 출신으로  교사 박시연등 교사 2명과 학생 12명이 6개월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박순천 민주당 총재도 이학교 5회 졸업생이며 소설가 김말봉도 일신여학교 출신이다

일신여학교 건너편에 설치된 기미 독립 선언서 가벽

일신 여학교를 둘러보고 나서 이제 혼자 바로 아래쪽에 있는 일신 기독병원으로 향했다

일신 기독병원에 가기전에 부산진 교회 담을 돌아 왕길지 기념관 맞은편족에 매긴시 목사 기념비가 있어 먼저 보고 갔다

제임스 노블 맥켄지 목사(James Noble Mackenzie, 매겐시 1865. 1. 8-1956. 7. 2)

맥켄지 선교사의 이야기는 설명판으로 대신한다

부산진 교회에서 큰 길쪽으로 조금 걸어내려오니 일산 기독병원이 보인다

일산 기독병원 본관 건물과 분원 건물

일산 기독병원 본관 안내데스크에 가서 여기 온 사연을 말하니 원목실 전도사님이 점심시간이라 안게시니 조금 기다리란다

병원에 비치되어 있는 안내문을 찬찬히 보고 있으니 20여분 지나 원목실 이정화 전도사님께서 나오신다

친절하시게도 단체가 아닌 혼자 예약도 없이 왔는데 먼 곳에서 오셨다며

친절하게도 병원 뒷켠에 있는 맥켄지 역사관으로 안내를 맡아 주신다

구관 뒷켠 이층 맥켄지 역사관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 기념비가 서있다
현재 이 기념비는 사적 문화재 등록을 추진중에 있다 한다

높이 113㎝, 하단폭 12㎝, 상단폭 9㎝ 크기로 오벨리스크 모양을 한 화강암 비석은

1909년 부산 남구 감만동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부산 나병원을 기념하기 위해 1930년에 제작됐다.

비석에는 부산 나병원 건립비를 지원한 국제 나병 구호조직인 '대영나환자구료회',라는 글씨와

병원 설립자인 어빈 등 북미 선교사 3명의 한자 이름(심익순·어을빈·사목사)과

병원 운영자였던 호주 선교사 맥켄지의 한자 이름(매견시), 비석 제작일, 병원 설립일 등이 각인돼 있다.

이 기념비는 지금은 자취를 감춘 우리나라 최초 나병원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비석이다.

 

북미 선교사 3명이 건립한 부산 나병원은 이듬해인 1910년 호주 선교회로 병원 관리권이 이관됐다.

이후 호주 선교사 맥켄지가 나병환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 속에서 29년간 운영해온 나병원은 일제가 .

1941년 맥켄지 선교사를 추방하고 일방적으로 부산 나병원을 폐쇄해 군부대로 사용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부산 나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당수는 소록도로 강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 나병원은 설립 초기 환자가 20명에 불과했지만 병원 폐쇄 무렵에는
650여명의 환자가 공동체를 이룰 정도로 발전했다.

25%이던 환자 사망률이 1.5%까지 떨어지는 등 한센병 치료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해방 후 흩어졌던 나환자들이 나병원 자리 인근인 용호동으로 모여 상애원
혹은 용호 농장으로 불리던 나환자촌을 만들어 정착했다.

맥켄지 선교사 부부는 슬하에 혜란(헬렌) 혜영(캐서린) 루시 ,쉴라, 네 딸과 아들 짐을 두었다.

모두 부산에서 출생했는데 짐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여 현재 부산진교회 묘지에 묻혀 있다

맥켄지 선교사의 두 딸(헬렌, 캐더린)이 한국전쟁중 고통당하는 부인들을 위해 연 병원이 일신 기독 병원이다.

일신 기독병원 설립자인 매헤란.매헤영 지매의 흉상

 

매혜란(Dr. Helen Pearl. Mackenzie 1913,10,6~2000.9.18)

맥켄지 선교사의 첫딸로 부산에서 출생하여 1931년 평양 외국인학교를 졸업한 뒤 호주 멜버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진 교회 유치원을 빌려 1952년 9월 17일,

동생 캐서린과 함께 부산 좌천동에 일신 부인 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세운다

6.25 전쟁 피난민은 물론 산모와 아기들,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진료를 시작한다.

특히, 의료진이 없어 출산 중 사망하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인술을 펴면서

1953년부터 400여명의 산부인과 수련의와 2,599명에게 조산교육을 시킨다.

1954년 현재의 병원 부지에 주한 미군과 호주 선교부의 도움으로 병원을 지었고,

부산·경남지역의 무의촌을 찾아 매주 순회 진료를 하였다.

의료 인력을 늘리기 위해 동생 매혜영 선생과 합심하여 조산원 교육을 시작하여 조산원 양성에 힘썼다

1972년 병원 창립 20주년에 김영선에게 병원장 직을 이양하고, 1976년 호주로 귀국했다.

2012년 매혜란 여사에게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하였다

일신 기독병원은 1963년 국가에서 인정하는 산부인과,1976년 소아과 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인정받는다.

지난 1993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유니세프가 지정한 친근한 병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매혜영 선생(Miss Catherine Margaret  Mackenzie(1915.10.6~ 2005.2.10)

맥켄지 선교사의 둘째달로 호주에서 간호 교수과를 수료한 뒤 조산원 교육을 시작하였고 .

1978년 한국어로 간호 조산학 제 1판을 출판하는 등 우리나라 조산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다.

27년 동안  훈련시킨 조산원은 모두 1,000여명에 달하며,1975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나이팅게일기장을 수상하였다.

1978년 매헤영도 언니를 따라 호주로  귀국을 하여 호주 전역을 돌며 기부금을 모아 맥켄지 재단을 만들었다.

그 결과 맥켄지 재단에서는 1976년부터 지금까지 매달 약 1,000만원을

어려운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헬렌과 캐서린 두 자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정년이 되자

 가방하나 달랑 들고 호주로 귀국하였고 지금 멜버른 소재 포크너 묘지에 부모님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

먼 이국땅에서 헌신과 사랑을 몸소 실천한 참 그리스도인이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으로 일평생을 헌신한 그들의 정신은 (재)한호 기독교선교회가 이어가고 있다.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미 북 장로교.미 남 장로교. 카나다 장로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한 4대 장로교이다

매해란 선교사님 사진앞에서 일신 기독병원 원목실의 이정화 전도사님과 함께.
 

나중에 전도사님께서 매일로 일신 기독병원에 대한 파일을 보내주셨다..

원목실은 매 주일 예배와 매주 한번 병실 찬양과 각 병실 심방기도및 신생아를 위한 기도

의료진이나 환자 요청시 특별 상담과 기도, 환자 신앙도서 대여들을 하며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이정화 전도사님은 대학과 신학대에서 전문 교육을 받으시고 기독교 심리 상담사 슈퍼바이저로

의사소통 감사로 원목실에서 활동하시는 실력자이시다.

일신 기독병원 환자분들은 복도 많으시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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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늘 기억하며 이어가고 싶다, 감사해요 전도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