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언니네서 이틀자고 부산 여동생네로 왔다
오늘도 무지 더운 날씨가 될 듯 하여 더위에 완전 넉 다운 되어 버린 남편은 동생네서 쉬라 하고 나 혼자 길을 나섰다
부산은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닌 나의 고향같은 곳이라서 혼자 길을 나서도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에서 내려 한 십여분 걸어서 초량교회로 향하였다
조금 언덕길을 따라 십여분 걸어 가니 높다랗게 초량교회 간판이 보인다
초량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 사적지로 2018년 1월 24일에 정식 지정되었다.
서울 승동교회(1호), 김제 금산교회(2호)에 이어 세 번째다.
초량교회는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윌리엄 베어드
(William M. Baird.배위량 .1862년 6월 16일~1931년 11월 29일)
선교사가 1892년 11월 설립한 부산지역 및 한강 이남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다.
일본인 거주지역인 영서현(英署峴)에 있던 서당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삼았으며
초창기 교인은 정준환 등 4명이었다.
영서현 교회, 영주동 교회, 초량 삼일교회 등의 이름을 거쳐 현재 명칭으로 정착됐다.
초량교회는 영주동 교회 시절인 1920년 호주 선교부의 부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자리에 교회를 지으면서 급성장했다.
초량교회는 일제 강점기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후원하고, 첫 개척교회인 산리교회에서
비밀리에 회합하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추진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선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기철, 이약신, 한상동 등 역대 담임목사와 방계성 장로, 조수옥 전도사 등이
옥고를 치르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10년 한득룡(韓得龍) 목사가 초대 한인 목회자로 시무하였으며,
1913년에는 김주관(金周寬)이 장로로 장립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1914년에는 예배당 신축이 시작되어 1917년 정덕생(鄭德生) 목사가 부임하면서 70여 평의 건물을 준공시켰다.
1925년에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부임하여 신사 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삼일유치원(三一幼稚園)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뒤, 이약신(李約信)·김만일(金萬一) 목사로 이어지다가 1946년 한상동(韓相東) 목사가 시무하였다
1952년 장로교의 분열이 일어나 고려파(高麗派)로 갈라져 나갈 때
300여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삼일교회(三一敎會)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교세가 약화되었으며 6·25전쟁 중에는 남대문 교회와 합동으로 예배를 보았다.
1967년 예배당이 400여 평으로 증축되었으며 1972년 교회설립 80주년을 맞아
"초량교회 80년사"를 발간하고 교육관을 신축하였다.
반송 교회,·초락 교회,·반여동 교회 등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브라질·나이지리아·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92년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초량 교회는 1992년 케냐에 나쿠루 북 장로교회의 설립,
1994년 "초량교회 100년사" 발간 하며 역사 자료 전시관을 개관하여
초기 당회록, 주기철 목사의 강대상 등 총 120여 점의 교회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교회 바깥 담벼락에 교회 역사에 관한 설명판이 붙어 있어 찬찬히 읽어 보고 들어갔다
건너편 담벼락에는 이바구길 설명판이 붙어 있다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배위량 1862년 6월 16일~1931년 11월 29일)
베어드는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하여 1885년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을 졸업하고,
바로 멕코믹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8년 맥코믹 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90년 11월 18일 애니 아담스(Annie Adams) 양과 결혼했다.
미 북 장로교 선교사로 그의 아내 애니와 함께 1891년 1월 2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부산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 후 서울로 향했고 도착 다음날 매년 개최되는 북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 회의에서
미국 북 장로회 조선 선교부가 창립된지 7년 되던 해 두 번째 선교기지 개설을 항구 도시 부산으로 정하였다
윌리엄 베어드 부부는 공식적으로 부산 지부 선교사로 임명되었고.
언더우드와 베어드는 부산에 선교 부지를 매입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베어드는 언더우드와 함께 1891년 2월 25일 서울을 떠나 동래에 선교용 부지를 매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베어드는 그해 여름을 서울과 남한산성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보낸 후
9월 선교 지부를 본격 개척하기 위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온 베어드는 감리교 선교사 하디의 집에 기거하면서 영국 영사 허드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 거주지인 영서현(현 코모도호텔 부근)에 세 필지의 대지를 구입해 부산 선교 기지를 마련했다.
베어드는 앞서 구입한 부지에 아직 미 완성된 선교사관으로 이사 하여 방 하나를 사랑방으로 개방하여
예배와 세례, 기독교 서적 번역, 서당교육과 사랑방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사랑방 전도는 1892년 11월 영서현(또는 영선현)교회로 발전했고 한강 이남 최초 교회인
초량교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미 북장로교의 부산 경남 지역 선교 거점이 되었다
이로써 베어드는 미국 북 장로회의 한국 선교 역사상 두 번째 선교 지부를 부산에 설립한 셈이 됐다.
베어드는 사랑방에서 조선인 조사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기독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1893년 ‘텬로지귀’ ‘구셰진쥬’ ‘텬로지명’ 등 3권의 소책자를 펴냈다
이 소책자들은 초기에 간행된 전도문서 혹은 교리서로 한국인 독자들에게 기독교의 본질과 기본교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지침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지역 답사와 순회 전도 활동을 통해 신자를 확보해 갔는데, /P>
베어드는 처음부터 한국 남부에 선교 기지를 세운다는 생각으로 순회 전도 여행에 열중했다.
그는 김해, 진주, 동래, 울산, 밀양, 대구, 상주, 안동, 경주 등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방의
순회 전도 여행은 후일 영남과 호남 지역에 선교 지부를 설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드디어 미국 선교 본부에 청원했던 대구 선교 지부 설립건은 1895년 11월에 승인이 났다.
베어드는 한 해 동안 부산과 대구를 왕래하며 제임스 애덤스( James Edward Adams, 안의와.1867~1929 ) 와
대구 지역 선교지부 개척 사역을 감당했다
그러던 중 선교지 분할 정책으로 호주 선교부가 부산·경남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1895년 12월 미 북장로교단이 선교부를 대구로 옮기면서 배위량 선교사도 부산을 떠났다.
베어드는 1896년 1월에 대구 남문 안에 위치한 정완식 씨 소유의 집을 구입고 선교 지부를 개설했다
이곳이 현재 약전골목에 위치한 구 대구 제일 교회당 부지로서 역사적인 대구 선교 지부 자리이다
1896년 10월에 열린 미 북장로교 조선 선교부의 정기 연례 회의는 대구 선교 지부를 애덤스에게 맡기고,
베어드를 조선 선교부의 교육 고문으로 임명해 서울로 이주토록 결정했다
이로써 베어드는 서울로 이임했지만 그는 부산과 대구 두 지역의 선교지부를 설립하는데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교회 뜰로 들어서면 왼편에 베어드 관이 있는데 예약하지 않고 간지라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선교 본부는 베어드 선교사를 교육 사업의 적임자로 보고 이 일을 맡기기 위해 서울로 이동시킨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선교는 교육 사업으로 집중되었으며. 그는 서울 곤당골에 학교를 세우고 이미 있던 예수교 학당도 맡았다.
그러나 이 학교들은 모두 고아를 상대로 했고 또한 안식년이 되어 잠시
한국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곧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는 1897년 10월 10일 평양 신양리 자택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숭실학당을 개설하여
1900년에는 4년제 중학교로 발전시켰고 1904년에 중학교 첫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그리고 1905년부터는 대학 교육을 시작하여 미국 장로교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 운영을 하기로 결의하였고
1908년에 2명의 첫 졸업생을 내었다. 이 학교가 그 뒤 숭실 대학으로 발전했다.
숭실 대학은 장로교뿐만 아니라 여러 교파가 합동 경영을 했는데 이러한 합동 경영은 감리교와는 1914년까지 계속되었고
나머지 선교부들과는 1938년 폐교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숭실학교는 베어드 교장의 엄격한 학칙 준수와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성경 공부와 주일 예배는 엄격히 지겼다
숭실 학교의 특색은 학생들의 학자금 자급 제도와 자립 정신에 있었다.
그는 육체 노동을 천시하고, 앉아서 글만 읽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개혁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기고 교내에다 소위 자조 사업부를 두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근로와 자조 정신을 불어넣어주는 것을 제1의 교육 목적으로 삼았다.
그의 교육 정책은 창의적이며 또 하나는 네비우스 선교 방법(Nevius Method)을 한국 실정에 맞도록 수정 적용한 것이다
네비우스 선교 방법이란 교회로 하여금 자력 유지(Self-Support), 자진 처리(Self-government),
자진 전도(Self-propagation)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베어드 박사는 1917년부터 주로 문서사업에 종사하였고 베어드는 주로 성서 번역에 열중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 신학과에서 다시 히브리어 공부를 했고 다시 한국에 나와서는
김인준 목사, 남궁혁 박사 등과 함께 구약성서 개역에 힘썼다.
1891년에 한국에 와서 40여년간선교와 교육에 최선을 다하다가 1931년 장티프스로 평양에서 소천하엿다
그의 유해는 평양 숭실 학교 구내에 묻혀 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는 그의 기념비가 있다
베어드의 첫 부인인 애니 베어드(Annie Laurie Baird, 1864.9.15-1916,6.9 안애리)
미국 인디애나 주 디케이터 카운티에서 태어나서 1883년 웨스턴 여자대학 졸업과
하노버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1891년 한국에 왔다
1897년 평양으로 이주한 이후에는 남편이 설립한 숭실학교에서
식물학·천문학·지리학 등을 가르쳤고, 숭실학교가 필요로 하는 교과서 편찬 작업을 수행하였다.
애니 베어드가 편찬한 교과서는 한국에서 만든 근대 학교의 최초의 교과서였다.
또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어 찬송가를 역편하고 교회 음악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애니 베어드는 1891년 내한한 이래 1916년 6월 9일에 52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한국에서 봉사하였다.
그녀의 묘비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남편의 기념비 옆에 나란히 있다
베어드 부부는 부산 지방 기독교 형성에 기여하였고, 초기 기독교 전도 활동, 교회 설립,
교육과 자선 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애니 베어드는 복음주의 혹은 보수적인 신앙인으로서 유교적인 조선 사회를 기독교적 가치로 재해석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한데 한 가지가 학교 교육이었고, 다른 한 가지가 문서 운동, 곧 저술 활동이었다.
그래서 애니 베어드는 숭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여러 책을 저술하거나 역간하였다
그녀는 국적과 언어를 뛰어넘어 작품 활동을 했는데, 특히 한국을 배경으로 하여 선교를 목적으로 한 작품들을 썼다.
그녀는 한국에 관심있는 외국인들을 위해 "한국의 새벽" (극동에서의 한 회심에 대한 이야기
(Daybreak in Korea: A Tale of Transformation in the Far East)(1909)를 뉴욕에서 출간했다.
한국에서는" 따라 따라 예수따라 가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한국의 전통적인 가정에서 자란 한 한국 소녀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임으로
인생에 변화를 가져온 이야기를 극적으로 매끄럽게 풀어내고 있다.
또한 1911년에 경성 예수교 서회에서 간행한 "고영규젼"은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고영규의 삶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부부의 모본"은 크리스천 부부의 사랑이 가득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아니라 "한국어를 배우는 50가지 도움들"(Fifty Helps for the Study of the Korean Language),
"안에서 본 선교사의 생활"(Inside Views of Mission Life, 1913)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쟝자로인론", 교과서로 집필한 "동물학", "식물 도셜", "챵가집"등이 있다.
이런 저작들은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91년 부산 선교기지를 개설한 베어드 선교사 부부에게 1892년 7월 딸 낸시가 태어났다.
이듬해 1894년 5월 13일(3세)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하여 부산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베어드 선교사 부인은 이국에서 딸을 잃은 슬픔과 지방 선교여행을 떠난 남편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애절한 찬송시 찬송가 387장(멀리 멀리 갔더니)와 나는 갈길 모르니(375장)를 작사하였다
베어드 선교사 부인이 초창기 초량교회의 어렵던 시절, 눈물로 부르면서 위로받던 찬송가였기에
우리 교인들에게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찬송곡은 미국 19세기말 복음성가 작가로 무디와 생키의 부흥집회의 음악을 담당하였던 피셔(W. G. Fischer)의 곡이다.
그 후 베어드 여사는 한국 찬송가의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한국 찬송가 역사에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의 두 번째 부인 로즈 베어드(Rose May Fetterolf Baird, 배로사, 1881-1946)
첫부인 애니 베어드가 1916년 52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소천하자 2년 후 베어드는 재혼한다
애니 베어드 못지않게 로즈 베어드도 남편을 따라 1918년 내한한 후 선교사 아내로서 가사를 돌보는 외에,
교육과 전도, 집필 분야에서 남성 선교사 및 독신 여선교사에 뒤지지 않는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녀는 1931년 남편인 베어드의 소천 후에도 일제 말기 강제 추방되기까지 22년 동안
한국에 남아 선교 사역에 임하였는데
특히 선교 후반기에는 평양 여자 고등 성경학교(후의 평양 여자신학교) 교장으로서
토착교회 여성 목회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시카고의 무디 성경학교 출신답게 복음 주의적 신학교육과 전도활동에 주안점을 두었고
자신의 교육과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신 구약 대지》와 《개인 전도 연구》란 저술을 남겼다.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비록 상처하고 재혼했지만 두 명의 부인이 다 휼륭한 선교 사역의 내조자며 동역자요
현모양처였으니 복 받은 사람이다 ㅎㅎㅎ
참고로 베어드의 두 아들 쥬니어 베어드도 서울에서 출생하여 북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던중
건강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 소천했고
평양에서 출생한 셋째 아들 역시도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강계지방에서 순회 전도하였고,
강계 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전도인 양성에 헌신하다가 1941년 일시귀국 후 1957년 다시 내한하여
북장로회 한국 선교부 총무로 봉직하다가 1960년 귀국하여, 한국 유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1995년 미국서 소천하였는데 두 아들의 유해는 양화진에 안장 되었다
베어드는 1895년 1월 사랑방에 서당을 열고 교육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처음 학생들은 조선인 하인들과 부두 노동자, 일본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이었다.
처음엔 한문을 교육했고 이후 성서와 산수, 지리 등을 함께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매일 예배와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당시 서당은 교육 기관이라기보다 자선 기관이며 전도 기관이었다.
부산에서의 서당 교육은 훗날 베어드가 평양에 숭실 학당을 세워 운영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됐다.
그해 9월 당시 일본인 거류지였던 영서현(영선현)에 대지를 마련하고, 다음해 4월 일명 ‘옴니버스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선교사 사택에 입주한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방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랑방은 예배와 세례, 기독교 서적 번역, 서당교육 등 모든 활동의 중심지였다.
베어드는 사랑방에 찾아오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복음을 전하며
소책자를 무료로 나눠 주거나 구입하도록 권유했다.
선교부에서 개설한 ‘한문서당’을 찾아온 학생들, 여인들, 항구 선원들이 전도를 받고
예배에 참석하며 점점 그 인원이 늘어났다
사랑방 전도는 1892년 11월 영서현(또는 영선현)교회로 발전했고 미 북장로교의 부산 경남 지역 선교 거점이 되었다
베어드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 믿은 사람들에게 세례는 2년 후에야 베풀어 졌는데
그것은 그의 청교도적인 철저한 신앙 검증을 통과한 성도들에게만 베풀어 졌기 때문이었다
베어드는 사랑방에서 조선인 조사들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기독교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1893년 ‘텬로지귀’ ‘구셰진쥬’ ‘텬로지명’ 등 3권의 소책자를 펴냈다
이 소책자들은 초기에 간행된 전도문서 혹은 교리서로 한국인 독자들에게 기독교의 본질과 기본교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지침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영주동 교회 시절 호주 선교부의 부지를 매입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오면서,
초량교회는 일제 치세에 시달리던 겨레를 위해 영남 일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맹활약을 시작한다.
126년(1892~2018)간 초량교회를 이끌었던 담임목사는
배위량(윌리엄 베어드)선교사와 노세영(시릴로스) 선교사, 사보담(리차드 사이드보텀) 선교사를 제외하고
한인 담임 목사님들은 제1대인 한득룡 목사를 시작으로 정덕생 목사, 주기철 목사, 이약신 목사, 김만일 목사, 한상동 목사,
구영기 목사, 강주선 목사, 최동진 목사, 하근호 목사이며, 현재 김대훈 목사가 20년 넘게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제2대 정덕생 목사를 비롯해 주기철, 이약신 ,한상동 등 역대 담임 목사들과 방계성 장로,
손명복 조수옥 전도사, 윤현태 ,윤현진,강루식 집사 등은
이와 연관해 옥고를 치르거나, 목숨까지 잃는 등 애국신앙을 보여준 산 표본들로 기억되고 있다.
초량교회의 이름이 한때 초량 3.1교회로 불렸던 배경에는 이런 희생과 수난의 역사가 자리한다.
1932년 초량교회가 첫 개척교회로 설립한 산리교회 예배당은 초량교회 교우들이 신사참배 반대 등 항일운동을
모의하며 회합하던 장소로 활용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교회가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로비에 들어서면 한 켠에 있는 아름다운 꽃과 글.
교회 라비 한 벽면에 붙어 있는 나무 십자가 세 개의 못 그리고 성경구절. 가슴이 찡하듯 울려온다.
본당 예배실 입구에 있는 헌금함
초량교회 본당 내부 앞쪽과 뒷쪽..
잠시 들어가 앉아 기도하고 나니 뒤에 앉으신 두 권사님께서 친절하게도 시원한 차와 과자를 주시며 쉬어 가란다
이곳 역시도 예약 없이 무작정 간지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는데 사무실에 가서 미국서 일부러 왔다고 얘기를 하니
직원이 열쇠를 가지고 역사관 문을 열어 주면서 예약없이 오시면 문을 안열지만 먼데서 오셨으니 열어 준단다
보통때는 순례객들이 꽤 많이 찾아 오는데 날씨가 워낙 더워서 오늘은 없단다
2011년 7월 개관한 초량교회 역사관에는 길고도 역동적인 세월들이 응축되어 있다.
숨결을 느껴보고자 매일처럼 전국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의 발길이 교회당 문턱을 넘나든다.
초량교회가 남긴 유산들은 비단 한 교회만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은 실내에 좌우로 자료들이 잘 진열되어 있고 정 중앙에 주기철 목사님이 쓰시던 강대상이 버티고 있다
역시 강대상은 이렇게 나무로 큼직하게 무게감이 있는게 좋다
요즘 훤히 다 비치는 아크릴로 만든 작은 강대상은 세련되고 현대적 감각이라지만
말씀이 선포되는 강대상으로는 너무 가벼워 보여 별로 마음에 안들었다. 내가 구식이라서 그런가?
초량교회 역사관에 들어서면 벽안의 서양여성 한 사람의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남편인 배위량을 따라 한국에 찾아온 애니 베어드 선교사이다.
부산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그녀가 낳은 딸 낸시는 3살때 안타깝게도 뇌 척수막염으로 숨지고 만다.
사명을 위해 슬픔과 고독을 삭혀야 했던 애니 베어드가 잠잠히 써내려간 시들이 있었고
나중에 이 시들은 한국 찬송가에 수록된다.
‘멀리 멀리 갔더니’와 ‘나는 갈길 모르니’ 등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들은 이처럼 초량교회 초기 역사와 맥이 닿아있다
민족사의 아픔에 함께한 초량교회의 역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수도로 정해진 부산으로 찾아온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초량 교회는위로와 안식의 처소 였다
당시 피난민 성도들이 초량 교회에 모여 전개한 통회 구국 기도운동은 한국 교회사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된다.
보이는 돌은 초량교회 건축할때 쓰였던 돌이다.
초량교회 역사관에는 1920년 교회당 신축당시 헌금을 바친 내역들을 기록한
‘예배당 신축 의연금장’이라는 문서가 전시되어있다.
이 장부에는 교우들 뿐 아니라 다수의 불신자들까지 건축헌금에 참여한 내용들이 나온다.
겨레를 위해 항거했던 초량 삼일 교회에 대한 이웃들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관에는 배위량 선교사를 필두로 한 여러 선교사들과 초대 한국인 담임목사였던 한득룡 목사.
이후 여러 담임목사들이 이어 섬기며 초량교회에 남긴 갖가지 행적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영주동교회 시절 작성된 교인명부인 ‘생명록’과 ‘당회록’, 백산상회와 상해임시정부를 통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윤현태 윤현진 집사의 관련 자료들,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사용했던 강대상, 손양원 목사가 친필로 작성했던 이력서,
60여년 간 발간되었다는 교회소식지 <초량> 등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역사관에는 눈길이 가는 전시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교회를 나오니 뜨거운 열기가 대단히 더운 날씨다
넓이 불과 2m도 채 안되는 초량교회 담벼락과 마주 하는 담벼락은 부산의 유명한 거리인 이바구 길이 시작되는 길이다
길이 1.5km의 이바구길은 부산역 건너편에 자리한 부산 최초 물류창고인 남선창고 터에서 출발해 옛 백제병원 건물
초량 초등학교 담장에 설치된 이바구 갤러리, 우물터, 168계단과 모노레일. 김민부 전망대, 당산, 망양로까지 이어져 있다
이바구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말인데 부산의 근 현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골목길을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라는 뜻으로 아마도 '이바구 길'이라고 이름을 붙인듯 하다
이바구 길은 일제 강점기 부산항 개항을 시작으로 해방 후 피난민의 생활터였던 1950~1960년대,
산업 부흥기였던 1970~1980년대 부산의 모습을 사진과 이야기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 창고였던 ‘남선창고’, 층계마다 피란민들의 설움이 밴 ‘168계단’,
영화 한 편으로 울고 웃게 했던 ‘범일동 극장 트리오’, 가냘픈 어깨로 부산의 경제를 지탱했던
신발공장 여공들의 ‘누나의 길’까지
근 현대 부산의 옛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곳이자 역동적인 세월의 자취가 남은 상징적인 곳이다
이바구길에서는 낯선 여행객들의 정감 있는 쉼터이자 ‘이바구 충전소’와 ‘까꼬막’,
막걸리 한잔과 따스한 국밥 한 그릇으로
애환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6•25 막걸리’와 ‘168도시락국’ 등을 접할 수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바구길'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의 가교’라고 할 수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라는 시 구절로 유명한 김민부 시인의 전망대는
부산항을 조망하기 더없이 좋은 장소로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기념관에서는 건강지원센터를 이용할 수 있고,
까꼬막(‘산비탈’의 경상도 사투리)은 산복도로 투어 및 체험을 제공한다.
끝자락에 위치한 지상 2층 규모의 ‘이바구 공작소’는 지역의 역사관 격으로 마을 자료관, 전망 데크 등을 운영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참 인술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의 더 나눔센터, 청마 유치환의 우체통 등
온갖 볼거리들이 즐비한 멋진 탐방로의 중심에 바로 초량교회가 있다.
날씨가 왠만 만해도 또 동행이라도 있으면 걸어볼 만한 길이었는데 168계단 앞까지 갔는데
위를 쳐다보니 도저히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 그만 두었다
부산은 내가 50~60년대 살았던 곳이고 더구나 초량에서 살았으므로 어쩐지 이 곳이 낯설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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