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 순례기

12. 정동 제일 감리교회

bonitahuh 2022. 10. 20. 06:12

오늘도  무척 무더운 날씨지만 정동 교회를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앞에서 내려 덕수궁쪽 으로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정동교회로 향했다

 

고궁의 돌담길은 그 엣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남편과 연애시절 참 많이도 걸었던 곳이어서 감회가 새롭다

이제까지 영국 대사관이 점유하면서 제한됐던 덕수궁 돌담길 미 연결 구간 170m가

영국 대사관측과 문회재청의 협상을 통해 원만히 해결되어 올 10월까지 모든 공사를 마치고

1100m의 돌담길 전체를 돌아가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된다하니 너무 잘된 일이다.

아! 그때 와서 젊은 날을 추억하며 다시 한번 남편과 함께 걸어 보고 싶다!

정동 제일 교회 정문

정동 제일교회는 구 한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10월 11일에 정동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서

한국 기독교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한 날을 정동 제일 교회 창립 기념일로 정한다

옛 예배당 (벧엘 예배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로 1977년 사적 256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고딕 양식의 건물이나 돌로 된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맵시가 배어 있다.

고풍스런 붉은 벽돌, 야트막한 지붕, 검소한 모양의 아트형의 창문···

3층 높이의 종탑도 뾰족하지 않은 평탑 형식(고딕 양식)이어서 위압적이지 않고 소박하고 담백한 느낌이 좋았다.

준공 당시 바닥은 십자가 모양이었지만 두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직사각형 모습을 갖게 되었다

 

아펜젤러 목사의 주도아래 1895년 9월에 예배당 정초식을 거행하고 1897년 12.26일 벧엘 예배당을 봉헌하였다

그 후 이 예배당은 6,25전쟁때 파괴된 것을 1953.12월에 복원하였고

1916년에 북쪽 벽면을 증축. 1926년에 종각과 남쪽 벽면을 층축하였다

1987년 화재로 일부 소실되었지만 2002년.3월에 재 봉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건물은 아펜젤러 목사가 미국 북 감리교회 교회 확장국 설계 도안집에서 택한 25번 도안을 바탕으로,

일본인 요시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설계하고 조선인 목수 심의석이 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러시아, 독일 등 서양 열강의 공관이 줄지어 있었던 정동의 한복판에 정동교회가 있었으므로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애국 지사들이 모여 들었다

갑신 정변 실패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은 귀국한 뒤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아펜젤러와 더불어 협성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반일 애국과 회원간 친목,

학문 발전을 위해 구성되어 장차 독립협회의 모태가 되었다.

.

협성회는 토론회와 유명 인사의 초청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토론과 참여 계층, 운영방식을 ‘협성회 회보’, ‘매일신문’에 기고하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굵직한 주제들을 날카롭게 통찰하여 이 나라의 계몽과 개혁에 이바지했다.,

구 한말과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의 거점 중 하나가 이 건물이었다.

1918년 한국 최초로 예배당안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의 몸체에서 비밀리에 3·1운동 독립선언서가 등사됐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고 외부에서 볼 수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

예배당 안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을 보고 싶었고 옛 강대상도 꼭 보고 싶었지만

예약을 하지 않고 간데다 또 한창 보수공사 중이어서 못 본것이 못내 아쉽다

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말하자면 청년교회요, 학생교회이었다.

뿐만 아니라 1902년 6월 아펜젤러 목사가 선박 충돌 사고로 순직한 이후 목회자로서 교회를 이끌어간

노병선(1902~03)·전도사, 최병헌(1903~13),·현순(1914~15),·손정도(1915~18)·이필주(1918~19) 목사는

하나같이 개화, 개혁 운동과 민족 운동의 지도자들이었으며.

1919년 담임목사 이필주와 전도사 박동완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면서 3·1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또한 현순 3대 담임목사와 손정도 4대 담임목사는 임시 정부 주요 요인이기도 했다

 

협성회와 독립협회의 활동에 열심이었던 이승만은 정동 제일교회의 장로였으며 이화학당의 유관순 학생도 정동교회 교인이었다

그 밖에도 신흥우.이상재. 김활란,윤치호등도 정동교회 교인들이었다

이렇게 정동 교회는 독립운동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1919,3.1 정동교회에도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렸고

교회 지하실에서는 성도들이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정동 제일 교회를'붉은 벽돌로 쓴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간 날이 교회 보수 공사가 한창이어서 마당에는 건축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옛 성전(벧엘 예배당)은 예약없이 남편과 단둘이 그냥 간지라 들어갈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그래도 한창 공사 마감중인 새 성전 본당에 들어가 볼 수 있었고 기념 조형물들은 마당에 있으니 볼 수 있었다

오른쪽 옛 예배당건물과 연이어 지은 계단 위쪽 새 예배당 건물이다

새 성전 건물은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 않게 붉은 벽돌과 지붕의 조화로움이 옛 성전 건물과 잘 어울리게 지었다

그 때문에 정동 교회는 그 옛날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정동길은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되었다.

새 성전 건물(본당)이 1980년 10월에 '1979년도 한국 건축가 협회 건축대상'을 수상했다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싶다

정동교회는 감리교단의 대표격으로 여러 분야에서 "한국 최초" 기록을 보유하면서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한국 기독교 최초의 성찬식 거행(1885.10.11)  최초의 여성 주일학교 시작(1888.1) ,최초의 남성 주일학교 시작(1888.3),

한국 교회 최초의 여 선교회 조직(1889.2), 최초의 구역회 조직(1889.12) ,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 봉헌(1897.12.26),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설치(1918)

한국 교회 최초의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 개최(1923),한국 교회 최초의 성가대 조직(1929) 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06년 창내교회와 서강교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5 여개에 달하는 교회를 개척하고

봉헌했다는 것이다(정동 제일 교회 연혁 참조)

 

특히 파이프 오르간을 중심으로 구성된 성가대는 많은 음악인을 배출하고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김애식, 김인식, 김자경, 김영의, 이흥렬, 황재황, 현제명, 황지경 등).

파이프 오르간은 1918년 이화여고 출신 하란사가 세계 감리교 여성 대회에 참석차 도미하여

 

각 시도의 지부에서 연설하고 받은 성금으로 이 정동 교회에 기증하여 설치하였다

 

이 파이프 오르간 역시 한국 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2003년 9월 12일 복원하여 봉헌하였다.

(설치된 지 85년, 소실된 지 52년 만이었다) .

100주년 기념예배당 착공예배는 1977년 11월 6일에 하고 봉헌예배를 1979년 4월 15일에 드렸다

본당 건물 아래 일층에 젠센 홀과 지하에 웨슬레 홀이 있다는데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젠센 기념관은 "앤더스 크리스 젠센 (Anders Kristian.Jensen. 1897.3.14~1956.11.20) 선교사의

부인 마우드 K 젠센(Maud Keister Jensen)목사가 남편의 헌신적인 선교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전역의 교회를 돌며 간증과 집회로 선교 헌금을 모아 서울 정동교회 내에 젠센 기념관을 지어

1960년 12월 3일 선교 75주년 행사 때 정동 제일 교회에 헌증하였다

젠센 기념관은 교육관으로 학생들을 위한 활동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특별집회나 부인회 등의 모임장소로 제공되었다

젠센 선교사 부부와 딸 클레어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다(한국 성지 순례기 3.참조)

헨리 아펜젤러 목사상(1858.2.8~1902.6.11)

헨리 아펜젤러 목사는 1895년 4월 5일 부활 주일 미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아펜젤러 목사는 고종황제의 허락으로 이 곳에서 선교사업, 교육사업, 봉사활동 등 무수히 많은 일을 하였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정동 제일 교회를 창립하여 정동교회 초대 목사로 봉직하였다 

조선인의 민족 복음화와 한글 신약성서 번역 작업을 통해 우리 나라 성서 보급에도 큰 일을 하였다.

그리고 교육 사업을 통해 배재 학당을 건립하고 민족을 일깨웠으며 기독교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는 위대한 선교사요, 교육자요, 조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성서 번역위원회 참석차 배를 타고 가던중 1902년 해상 충돌 사고로 순직하였다

감리교회 조선 선교 50주년 기념비

1936년 4월12일 기독교 조선 감리회 교우 일동 명의로 교회 정원에 건립했다

기념비에 사용된 돌은 이끼가 끼지 않을뿐더러 견고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난 보령 염포오석이다.

후면에는 "부활주일에 조선과 만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념 헌금한 것과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이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다.

탁사 최병현 목사(1858.1.16~1957.5.3)

아펜젤러 목사가 갑작스런 사고로 순교하자 일년 정도 노병선 전도사가 목회를 담당하다가

1903년 최병현 목사가 한국인 최초의 정동제일교회 제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한다

본당 건물 입구에서 서서 더위에 너무 지친 내 남편 표정이 너무도 불쌍도 하여라 ㅠㅠㅠ

강단 뒤의 좁은 창에 스테인드 글라스 창도 양편에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도 무게를 더한다

역시 공사중이라 어수선하다

고전적인 내부와 목재를 사용한 천정과 은은한 조명도 품위가 있다

목재를 사용한 교회 천정

벽은 빛뱌랜 듯한 작은 벽돌로 쌓아 약간 어둡고 묵직하면서도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길고 좁다란 스테인드 글라스 창 또한 은은한 빛으로 예배실을 비추어 준다

대형교회의 일인용 의자보다 긴 나무 장의자도  교회다운 분위기이다

정동 제일 교회 100주년 기념비

본당 건너편에 사회 교육관인데 역시 대대적으로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5층에 역시 자료실이 있고 지하에  아펜젤러 홀과 메레 홀등이 있다는데 아쉽지만 발길을 돌린다

정동길. 덕수궁 길. 서소문길이 만나는 지점이다

정동교회 탐방은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하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근처 고궁도 돌담길도

또 정동길도 천천히 걸으며 돌아보고 하면 아주 좋을듯 하다

우리 부부는 날씨가 너무 더웠고 또 시간적 여유로움도 없어서 바쁘게 둘러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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