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요르단 성지 순례기

성지순례 34 .쉐펠라(Shephela)지역의 골짜기들. 벧세메스(Beit Shemesh,)라기스(Lakhish)

bonitahuh 2022. 10. 14. 23:36

쉐펠라는 어느 특정한 장소의 명칭이 아니며 그 뜻은 낮은 곳 또는 구릉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동쪽으로 높이 솟아있는 산악지대보다 낮다는 의미이지 그 지역 자체는 결코 평지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평지(신1:7. 수 9:1,삿 1:9,왕상 10:27. 대하 1:15.렘 17:25 욥1:19...)

 '평야(대상 27:28)'저지대(렘 32:44)  평원(슥7:7)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산들과 골짜기들로 이루어진 해안과 산악지대 중간이 바로 '쉐펠라’인데

성경은 넓은 산과 산 사이를 골짜기로 표현하고 있다

쉐펠라 구릉지대는 남북으로 45km, 동서로 평균 15~25km, 높이 해발 300~600m로서,

 계곡이 45개에 달하며 그중 중요한 계곡은 척추의 갈비뼈 모양 능선을 형성하여 북에서 남으로

아얄론 골짜기, 소렉 골짜기, 엘라 골짜기, 구부린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 등 다섯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쉐펠라는 해안평야와 유다산지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런 지리적인 요건때문에 쉐펠라는 이스라엘 정착 시대 뿐만 아니라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투를 가장 치열하게 치루던 곳이었다.

 다섯 개의 골짜기는 서쪽(지중해쪽)에서 동쪽(예루살렘과 요단강과 사해와 요단강 동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들이었기에

이 지역을 장악하게 되면 무역을 통한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옥한 땅, 유다 지파와 블레셋 족속의 완충지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무역로와

그 이익 등을 볼 때 쉐펠라는 시대를 불문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지질학적 특징으로 유대 산악지대는 강한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반면

이곳은 점토와 석회로 이루어진 부드러운 흙이 대부분이다

계곡과 저지대는 모래를 함유하고 있으며 아주 비옥한 곳으로 넓은 계곡은 농사하기에 적합하여

올리브,포도,무화과,석류 등 이스라엘의 특산물이 지금도 이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벧세메스에서 버스를 내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중.

현대 벧세메스 도시에 싸여 있는 고대 텔 벧세메스

벧세메스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30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쉐펠라 지역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벧세메스’ 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베이트’(Beit )는 ‘집’을 의미하고

‘쉐메쉬’(Shemesh)는 ‘태양’을 의미한다.

즉‘태양의 집’이라는 의미로, 가나안 사람들이 태양신을 섬겼으며

 아마도 벧세메스 도시 안에 태양신의 신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구약에 ‘이르세메스’ (수19 :4)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이르’는 ‘도시’ 라는 뜻으로

 ‘태양의 도시’ 라는 뜻이며 벧세메스를 말한다.

텔 벧세메스의 정상에서 남쪽 구역에 건물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건물 유적이다

여러 번의 고고학 발굴 결과로 발굴된 것은 토기 조각들과 토기, 무덤 남쪽 성문 등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토기로 보아서 BC 2000-600년 까지 주민이 거주하였으며 견고한 성읍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벧세메스는 단 지파에게 분배 되었으며(수19:41), 또한 유다 지파의 북쪽 경계로 성경은 기록한다(수15:10).

벧세메스 성 자체는 아론 자손인 레위 자손에게 주어졌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유다 왕 아마샤와 전투에서 아마샤를 사로잡은 곳이며(왕하14:11-14)

유대 왕 아하스 시대에는 국력이 약해져서

결국 블레셋에게 쉐펠라 지역을 빼앗기게 되는데 그 중에 한 성읍으로 포함된다(대하28:18)

아벡 전투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는데 법궤로 인한 재앙으로 인하여

결국 블레셋은 법궤를 벧세메스로 가져온다

 

페허가 되어 있는 성지에서 잡풀과 무성하게 자란 엉겅퀴를 흔히 보게 되는데

 성경에서 엉겅퀴는 저주 받은 식물로 표현되고 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시면서 하나님은 땅에 대한 벌을 주셨는데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말씀하셨다(창3:17~18)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가시떨기'도 바로 이 엉겅퀴를 말함이다

엉겅퀴는 곡식이 자라는 밭가에 무더기로 자라서 어린 싹들을 뒤덮어 죽게 하고

줄기와, 잎, 열매에 달려있는 가시들은 포름산을 함유하고 있어서

찔리게 되면 마치 쐐기에게 쏘인것 처럼 아프다

농부들은 이 가시투성이의 엉겅퀴를 거두어다가 불 사르는데

성경은 이것을 악인들의 운명에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쉐펠라 지역의 소렉, 아얄론, 엘라 골짜기는 직접 가보지 못하고 벧세메스에서

 가이드가 가리키는 곳으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멀리 바라보면서 설명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성경에서 골짜기라는 지형은 보이는 산과 이쪽 벧세메스 성터 사이의

 넓은 평원을 일반적으로 골짜기라고 부른다.

이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면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며

소렉 골짜기 바로 남쪽에는 벧세메스 북쪽에는 소라와 에스다올 서북쪽에는 딤나가 자리잡고 있다

소라는 삼손의 출생지이며(삿13:2-3), 딤나는 삼손이 사랑한 여인 들릴라가 살던 곳이다(삿14:2)

소렉골짜기에서 삼손이 블레셋을 물리치던 곳이다

지금 소렉 골짜기에 접해 있는 산 기슭에는 농장을 비롯한 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벧세메스에서 바라다 본 엘라 골짜기((Valley of Elah)라고 하는데

엘라는 '상수리나무' 골짜기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의 서남쪽 25키로 지점에 베들레헴 남서쪽에 있으며

양편에는 50미터 이상의 산이 솟아있고   골짜기 너비는 4백미터 가량이다.

오늘날 에산드 시내가 흐르는 계곡으로 이 계곡에 소고와 아세가라는 성읍이 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싸운 치열하게 싸운 전쟁터였으며(삼상 17:1~2))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 다섯개로 죽여 승리한 곳이다(삼상17장)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소고’와 ‘아세가’의 산등성이 사이에 위치한 이 골짜기는,

옛날에는 예루살렘·베들레헴·헤브론을 이어주는 중요한 군사 이동로였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한때 숨었던 가드 역시 이 지역에 속한다.

가드는 옛 팔레스타인 땅으로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얄론 골짜기는 쉐펠라 지역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한 골짜기 이며 쉐펠라 지역의 다섯 개의 골짜기 중에

가장 큰 골짜기로 산과 산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평야 지역을 일컫는다.

해안 평야에서 유다 산지로 올라갈 때 이 아얄론 골짜기를 통과해서 가야하며 벧호론길과 연결되어

베냐민 산지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수 10:10-15, 삼상14:31)

이것은 아얄론 골짜기가 유다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을 지켜주는

일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 왕때 불레셋은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이 아얄론 골짜기로 침범해 들어왔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에 애굽왕 시삭이 유다를 침공하기 위해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대하12:1-12).

그때도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통과하던 곳이 바로 아얄론 골짜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영원히 잊지 못할 사건은 바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연합군과의 전쟁이다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10:12)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기도에 그대로 응답하셔서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물고

달이 아얄론 골짜기에 하루 종일토록 머물게 하셨다.

옛 텔 벧세메스와 현대의 벧세메스 도시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여전 그 자리에 건재하고 있다.

벧세메스 터 위에서 쉐펠라 지역의 골짜기들을 바라보며 그 때 역사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그때와 같이 역사하심을 믿으며 '여호와  닛시'를 외쳐본다..

벧구브린 지역과 마레사 지역을 합쳐 벧구브린-마레사 국립공원과 벨 동굴 표지 안내판

 

구부린 골짜기는 구약성경에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로 기록되어 있으며(대하14:10)

유다 지파의 영토였다(수15:44),

쉐펠라 지역의 골짜기 중에서 남쪽으로 네번째 골짜기로 해안지대에서

헤브론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다.

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에돔 사람들이 유다 남방과 쉐펠라에 들어와 정착했는데

헬라 시대에 ‘이두메’라고 불렀으며 그 중심지는 구부린 골짜기 마레사였다

유다 3대왕 '아사'가 구스 사람 '세라'와 싸워서 승리한 곳이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이며(대하(14;9-15)

르호보암 왕이 애굽의 바로인 시삭과 전투 후에 요새화한 곳이 이 곳이다(대하11:8)

또한 이곳은 미가 선지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벧 구부린은 주후 68년에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에 의해 점령당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벧 구부린은 바르 코크바 전쟁 때 주후132-135년까지

유대인의 정착지로서 존재하게 된다

주후 200년에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가 벧 구부린의 이름을

엘류쎄로폴리스(Eleutheropolis),즉 자유의 도시로 바꿔버린다

비잔틴 시대 동안에 벧 구부린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고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였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작은 요새화된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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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의해 아랍 마을이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 때1948년까지 이 곳을 점유했었다.

그러다가 1948년 10월 27일에 이스라엘 군대가 이 지역을 수복하고 1949년 5월에

키부츠 벧 구부린이 이곳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석회암 지대로 많은 자연, 인조동굴들이 존재하고 있다

올리브가 많이 생산되고 있어 주전 4~3세기의 22개의 올리브 기름짜는 틀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공원은 올리브 나무가 가득했는데 열매철이 아니라서 열매를 보지 못해서 아쉽다.

무지 막대하게 크고 우람한데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올리브 기름을 짰을꼬?

벤구브린에 있는 콜롬바리움(The columbarium)이라고 비둘기 양식장이다

구부린에 있는 비둘기 동굴은 두 개의 십자가 형태로 만들어 졌으며 컴컴한 지하 동굴 같은 곳에

벽에 보이는 수 많은 구멍들이 비둘기 집이라는데 가요에 있는

비둘기 같은 아름다운 집하고는 거리가 멀다 ㅎㅎㅎ

우리가 갔을때도 실제로 비둘기 들이 컴컴한 작은 구멍에서 들락거리며 날아오는 것을 보고 신기했다

여기서 제의용과 식용의 목적으로 비둘기들을 길렀다는데 당 시대에

비둘기는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단다

80개의 큰 동굴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종(bell) 동굴로 높이가 가장 큰 동굴의 경우15m정도가 된다

벨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곳은 석회암 지대라 여러 동굴들이 많은데 이 동굴은 bell동굴로

과거 위에서 구멍을 뚫어 석회암을 채굴하던 곳이다.

우리 일행은 동굴 안에서 찬양을 했는데 너무나도 청아한 소리로 되돌아 온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숨었던 아들람 동글이라는데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특히 이곳은 쉐펠라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쉽게 사울이 다윗을 잡기위해

군사를 이동시킬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블레셋과의 완충지대이므로 자칫 군사의 이동은 전쟁으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때가 되어 공원에서 여행사측에서 준비해온 한식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야외에서 김치랑 한식을 먹으니 솜씨없는 반찬도 맛이 있다 ㅋㅋㅋ

라기스 골짜기와 텔 라기스

라기스 골짜기는 평지(쉐펠라)에 위치한 다섯 개의 골짜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마레사 서 남쪽 예루살렘 서남쪽 48km지점에 있는 구릉지역으로

팔레스틴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드넓은 남방지역과 해안 평야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라기스 골짜기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며 산악지역으로 올라간다.

이 구릉 지대 아래는 풍부한 물이 있어 많은 지역에서 포도가 재배되고 있다

라기스는 여호수아와 그 군대를 공격했던 아모리 족속의 다섯 성읍 중 하나였으며(수 10장),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 전쟁때에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모여 ......

 기브온에 대진하고 싸우니라 (수 10: 5절)

'

텔 라기스'는 남유다의 왕 르호보암에 의해서 이중 성벽을 갖춘 견고한 성으로 세워져 이 골짜기와

이스라엘의 남서쪽 지역을 통제하는 군사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큰 성이었다(대하11:5-12, 23).

이처럼 크고 견고한 성이었기에 라기스 성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남유다왕국의 마지막 보루의 역할을 했다.

유다왕 아마사 왕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을 피하여 라기스로 도망왔으나

추적해 온 사람들에 의해 죽고 말았다(왕하 14:19).

무엇보다 이곳은 주전 701년 유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이

라기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위협했다(왕하 18~19장)).

히스기야와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앗수르 군대를 멸망시켰다(왕하 19:20~37)

또 하나는 남 유다왕국이 망하던 586년 바벨론 왕 느브닷네살과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전쟁도 이 라기스에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