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랍 이스라엘 분쟁의 역사 서론 [Arab-Israeli wars]
2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면서 이 지역에서 유대인과 아랍인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난민이 되어 떠돌게 되었다.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이슬람 저항운동단체의 테러와 유혈분쟁이 계속되었다.
체결되었으나, 합의안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이 지역의 유혈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 팔레스타인지역 유대인의 정착과 로마지배 그리고 이산
기원전 15세기 경 팔레스타인지역에 들어온 유대인은 BC 997년 다윗왕에 의해 처음 국가를 성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외세에 의해 망하고 유대인들은 식민치하에 들어간다. 기원전 100년 무렵엔 로마의 속령이 되어 지배를 받게된다.
■ 팔레스타인 지역 이스람교도의 정착과 유대인의 시오니즘 운동
팔레스타인 지역은 637년 이슬람교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16∼20세기 초에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였는데 주로 이슬람교도의 지배가 지속되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이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에는 예로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지역이 되었다. 터키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터키가 패하면서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그 런데 19세기 후반들어 국가건설을 위해 투쟁하던 유대인은 국가건설의 예정지를 성서에서 약속한 땅 팔레스타인으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의 시온산은 그들 국가건설의 상징이었으므로 시온산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하며 팔레스타인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의 이주가 계속 증가하자 아랍인의 유대인 배격운동이 격화되었다.
■ 벨푸어선언과 아랍-유대인의 갈등
1차대전중인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독립을 약속하였다. (맥마흔 선언)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차 중동전쟁 ( 팔레스타인 전쟁 (아랍측 명칭), 독립전쟁(이스라엘측 명칭1948~1949)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하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하자 7개국으로 구성된 아랍국가들등은 즉각 이를 거부하면서
선제공격으로 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절대적 약세 놓여있던 이스라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일 넘게 일어난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내 UN 분할안에 명시된 영토보다 많은 영토의 80%(2만 662㎢)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 예루살렘 지역도 포함되었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 게릴라가 조직되었다.
*제2차 중동 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시나이 전쟁 1956)
1956년 6월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쫓아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나세르는 소련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과 영국이 아스완 댐 건설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수에즈 운하 국유화 정책을 선포한다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얻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이집트는 '이스라엘 국가의 전멸'다짐한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급기야 이스라엘과도 연합군을 결성해 시나이 반도를 급습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인하여 미국 소련의 압력을 받게 되자 연합군과 이스라엘은 철수하게 된다.
대신 가자의 이집트군 기지를 철저하게 파괴시킨다. 2차 중동전쟁에서도 이집트는 대패했다.
*제3차 중동 전쟁 (1967년. 6일 전쟁)
1964년경부터 아랍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지역, 구예루살렘지역, 요르단강 서안지역,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의 8,600㎢가 새로이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들어간 영토 면적은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2,400㎢로 확대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측의 일방적 승리는 미국의 지원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중동의 진보적인 아랍국가들은 미국과의 단교를 서슴지 않았다. 전제3차 중동전쟁의 아랍측의 대패는 아랍국가들의 반성을 촉구했으며, 아랍은 단결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즉 이로 인한 팔레스틴 난민의 확대는 PLO 활동을 더욱 활성화시키게 되고, PLO의 활동은 더욱 과격해졌다는 점이다.
*제4차 중동 전쟁 (1973년)
1973년 10월 5일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날) 이집트의 기습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3차 전쟁에 걸쳐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아랍국가들은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남쪽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그리고 북쪽 골란고원을 시리아가 동시에 공격하게 된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 패전하게 되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전멸 위기에 처해진 이스라엘 군을 포기하고
시리아 군대는 작전상 후퇴함으로써 믿을수 없는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로인해 전쟁은 한 순간에 반전이 되어버린다.
다시 이스라엘은 전열을 정비한 후 수에즈운하를 이집트군으로 가장해 도강한 후 이집트 영토에 몰래 침입한다.
이집트 영토를 직접 침입하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인 다윗별을 이집트 영토 안에 게양한 후 수많은 이집트군을 포위, 전멸의 위기에 몰아넣게 된다.
다급해진 이집트 왕 사다트는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며 미국무장관 키신저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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