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쟁사

십자군전쟁(CRUSADE)

bonitahuh 2022. 10. 12. 06:48
 

1. 개요

서기 11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회교도에 빼앗긴 성지 엘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유럽 그리스도 교회가 주도한

수차레의 원정 전쟁 

 

2.십자군전쟁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째 시기는(1095-1204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장악된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

 두 번째 시기(12 04-1291년) 

 시리아에서 확보한 프랑크인들의 소유권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감행되었는데,

 수차에 걸친 원정이 있었고 29-44년 성지에 다시 한 번 라틴제국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1291년에 라틴제국은 멸망했고 유럽 내에 십자군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전쟁이 아닌

 선교를 통해 동방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세 번째 시기(1291-1464년)

 라틴제국 건설이라는 초기 십자군운동의 정신은 사라지고 오토만제국의 세력확장을 막으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십자군 원정

 이 추진되었다. 1396년 대규모 십자군이 원정했으나 니코폴리스에서 터어키에게 대패함으로써 실질적인 십자군운동의 종말

 을 고하게 되었다.

 

 

3. 십자군 전쟁의 배경
(1) 십자군 전쟁 전의 유럽
    ① 사회적 안정 

        11세기에 들어 유럽은 이민족의 침입이 줄어들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활력이 생겨났다.
    ② 농업 생산성의 증가 

        땅을 깊게 갈 수 있는 쟁기의 보급과 경작지를 춘경지, 추경지,휴한지로 나누어 경작하는 삼포제 농법이 실시되면서

        수확량이 크게 늘어났다.
    ③ 시장의 형성

        농업의 발달에 따라 잉여(남는) 생산물이 늘어나자, 이를 교환하기 위해 곳곳에 시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④ 도시의 발달

         시장이 형성되자 그 주위에 인구가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게 되어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⑤ 원거리 무역의 발달

         도시가 성장하면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고, 가까운 지역뿐 아니라 멀리 비잔틴 제국이나 동방 세계와의

         원거리 무역도 행하여졌다.

(2) 십자군 전쟁의 배경
    ① 유럽의 사회·경제적 변화 

        인구가 크게 늘고 새로운 땅을 얻기 위한 바람이 증가했으며, 그 세력을 확대하려는 욕구가 커졌다.
    ② 직접적인 원인(표면적 이유)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 족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크리스트 교 순례자를 박해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반 2세는 동ㆍ서로 분리된 교회를 통합하는 기회로 삼고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전쟁을 선포하였다(1095).

    ③ 간접적인 이유(실제적 이유)

          성지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음에도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르바노 2세를 중심으로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티오키아(안타키아), 예루살렘 등 그리스도교 성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동방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관할권 아래 흡수

    ,     통합시키고 교황권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당시 서 유럽 내 영주의 장남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미지의 땅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3) 십자군 전쟁의 결과

      중세시대 지배층인 교황, 영주,기사,상인 이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각자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들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한것이기 때문에  오래 이 전쟁을 하다보니 다툼(즉, 갈등)이 발생하고

      결국 완전 실패로 끝나고 만다.

5 교황권의 쇠퇴


(1) 로마 교회의 쇠퇴 과정
    ① 십자군 전쟁(1096∼1270) 

        교황은 십자군의 파견을 호소하여, 약 200여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으나, 성지는 이슬람 인들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돌아가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② 아비뇽 유수(1309∼1377) 

        로마의 정치적 혼란이 심해져 안정적인 교회 행정을 펼수 없게 되고 교황의 신변도 위태롭게 되자,

        로마 교황청을 남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 프랑스 왕의 힘에 의존하여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③ 교회의 대분열(1378∼1417)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한 뒤 아비뇽과 로마에서 교황이 각각 선출되어, 교회가 프랑스와 로마 양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④ 후스 전쟁(1419∼1436)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하던 후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자, 그의 추종자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2) 교황권의 쇠퇴

     교회는 이와 같이 그 권위가 크게 약화되고 교황권도 추락하여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전쟁과정

1.1차 십자군 전쟁 (1096-1099)

   교황 우르바노 2세(재위 1088~1099)의(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선동으로 유럽의 유력한 제후들이 '십자군'에 대거 참가했다

   전쟁참가 병력은 60만명, 기사만 10만명 10975  니케아를 점령, 10986월 안디오크 점령 1099 7월 엘루살렘 탈환

 

2.  2차 십자군 전쟁(1145-1149)   

    이슬람의 반격으로 재차 전쟁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또다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권유하여,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통제가 되지 못하고,

    큰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군에게 패배했다

 

3.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 

     1187년에 이슬람 세계의 영웅인 살라딘에 의해 대략 90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측에게 점령, 탈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의 재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고, 이에 응한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 존엄왕 필리프 1세, 신성 로마 제국의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리처드1세는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예루살렘 탈환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났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지 순례의 자유가 보장됨 

 

 

 

4. 4차 십자군 전쟁(1201 – 1204)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요청에 따라 실행에 옮겨졌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1204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주를 받고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 콘스탄티 노폴리스

    를 함락시키고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움

 

5. 5차 십자군전쟁 (1217 – 1221)

    아크레 왕국(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의 장 드 브리엔느 등이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 6차 십자군전쟁 (1228 – 1229)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여러 번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이행하려 하지 않자 그를 파문하였다.

    1228년이 되어서야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채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당시 이집트 아유비드 왕조의 술탄 알 카밀은 내란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상황인지라 프리드리히 2세의

    교묘한 외교 정책에 휘말려,평화 조약을 체결하고.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1239년에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휴전은 유명무실해졌다.

    1239년부터 1240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제후 등이 원정에 나섰지만, 역시 싸우지 않은 채 귀환하였다.

 

7.  7차 십자군전쟁 (1248 – 1254)

    1244년에 예루살렘이 이슬람교 측의 공격을 받아 함락, 2천 명 남짓한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다.

    1248년 오랫동안 십자군 원정을 준비한 프랑스의 성왕 루이가 원정을 하여 이듬해 다미에타를 정복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 2세의 이집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패하고 1250년 그 자신도 포로가 되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루이는 1254년까지 이집트에 머물면서 몽골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

8.  8차 십자군전쟁 (1270-)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재차 출병하여 바이바르스가 주도하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    한편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계속 전진하여 트리폴리를 차지하고 1291년에는 팔레스타인에 마지막 남은

     십자군 지역인 아크레마저 점령하여 사실상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 

                                                                                                                                                                                                                                                                                5.7.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관점 

1)    성전 미명하에 이루어진 중세사를 100년정도 후퇴시킨 전쟁

2)    문명의 극심한 파괴 이교도간의 반목 질시 인종적 차별감 급증

3)    지역간 갈등으로 비 기독교 민족의 기독교 문명의 수탈과 파괴행위 급증

4)    종교간 갈등 격차 심화

           

 8.십자군 전쟁의 유산 (결과)

1)    귀족및 영주체계 붕괴 귀족사회의 권위 추락    

2)    교황의 권위추락과 각국의 왕권 신장 절대왕권체제 확립 

3)    봉건영주와 장원의 급속한 발전  

4)    서민경제와 시장경제체제 확립 

5)    상업도시 발전    

6)    시민사회의 기틀 마련   

7)    동서양 교류 시작

8)    교회의 대부분 분열  

9)    종교혁명의 원인 제공 

10)  문예부흥 (르네상스) 가속화

 

지역간 현상

 

서 유럽권: 1453년 비잔티 제국의 몰락 

이슬람권: 유럽의 중동 개입의 전초를 마련

유대 지역:  반 유대주의 사상 발생시작 

코카사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 교류나 분열이 종교 전쟁을 통하여 구분되기 시작하였음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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