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수원 화성과 행궁(2011.09.20)

bonitahuh 2022. 11. 8. 10:23

 수원화성과 행궁을 보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수원시내에 들어서니 화성 성곽이 보인다

장안문 부근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게 되어  장안문 부터 출발하여 5.744 미터의 화성 성곽길을 걷기를 시작햇다

뒤주에 갇혀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잘 알려진 정조의 숨결을 느끼면서 천천히 걸어 본다

수원화성은 총 48개 시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41개소가 보수 복원되었다 한다

                                      경기 수원 화성(華城)의 제1관문인  북쪽 대문인 장안문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문루의 높이가 13.5m, 너비가 9m에 달하는 성의 북문이다  

독특한 복층 구조로 축조되어 있으며 문의 안과 밖은 홍예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처럼 둥글게 만든 문)로 되어 있다.

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홍예 위에 아름다운 단청의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벽돌로 반원형을 그리면서 둥근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문 위에 4개의 기둥을 설치하고, 성벽 바깥에는 화포를 갖추고 있다.

 

특히 홍예 위에 5개의 구멍이 있는 큰 물통인 ‘오성지’를 만들어 적이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 장치로 사용되었다.

장안문은 화성의 성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문에서 500미터 가량 떨어진 위치에 적대를 쌓고 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인해 누각이 피해를 입었지만, 1978년 문루를 원래대로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

 

화성은 4대문이 있는데 대문은 팔달문(八達門, 남문), 창룡문(蒼龍門, 동문), 장안문 (長安門, 북문), 화서문(華西門 서문)이며 남북의 대문과는 달리 동서의 대문은 격을 낮춰 규모가 작다. 4대문에는 모두 옹성(甕城)이 있다.

우리가 간 날은 도시 도로에 있는 팔달문은 수리중이라서 천으로 가려져 있어 보지를 못하였다 

 

옹성이란 성문에 접근한 적군을 옆이나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문앞쪽으로 반원형으로 빼낸 보조성벽이다.

옹성에는 오성지라 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 끊는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5개의 작은 구멍도 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정신이 잘 담겨있다고도 볼 수있다.

 장안문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걷다가 화서문과 멀리 사북 공심돈이 보이는 곳에서 한 컷!

화서문은 화성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조선 정조 20년(1796년)에 완공되었고 동쪽에 있는 창룡문과 같은 규모이며

문을 보호하는 옹성도 같은 형식이다.

서북공심돈은 화성의 2개 공심돈(동북과. 서북) 중 하나로 화서문 옆 지척에 위치하고 있다.

공심돈이란 적의 동정을 살피는 일종의 망루로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목조 3층으로 안에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를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하여 총안과 포혈이 뚫려 있으며

주위 성벽보다 높게 하여 경계와 방어에 효율적으로 되어있다.

수원 화성(華城)은 정조의 효심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는 즉위하자 당쟁으로 인해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남쪽 화산으로 옮긴다

조선 후기의 성벽으로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둘레는 4,423.8 m이고 넓이는 206만 7,073.7 m2이다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 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수원화성은 당대의 철학, 과학, 문화가 총 집결했기에 18세기 실학의 결정체’라 불린다

 

그 우아한 아름다움과 ‘거중기’ 같은 기계를 활용한 과학성은 한국 성곽의 백미로 꼽히고,

199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 성역 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너무 많은 부분이 복원이 되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내젓는 지정 심의위원들에게

화성 성역 의궤를 보여주자 그 옛 모습을 확인한 유네스코 지정위원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허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화성 성역 의궤는 축성방법과 도면뿐만 아니라 사용된 장비 및 인원까지 세밀하고 정확하게 기술된

소중한 기록문화재였던 것이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벽 곳곳에 뚫어놓은 구멍은 총과 활을 쏘기 위한 것이다

 성 밖에서 보면 성벽은 6~9m 높이지만, 성곽길 위에 서면 어른 키만 한 담장이 된다.

성벽 곳곳에 뚫어놓은 구멍은 총과 활을 쏘기 위한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옛 역사를 음미하며 성곽길을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 지는데 이래서 난 옛 성곽길 걷기를 좋아한다

성곽길을 쭉 따라 걸으니 이런 아름다운 무궁화 꽃길이 나온다

우리나라 무궁화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을 미처 물랐는데 수수하고 은은한 보라 꽃과

싱싱한 초록 잎새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가 살던 브라질에도 개량된 크고 화려한 여러 색갈의  무궁화꽃을 많이 볼수 있었지만 우리나라 토종 무궁화와 같은

소박하고 은근한 멋이 없어 운치를 찾아 볼수가 없었다. 무궁화가 핀 꽃길을 걷는 것도 큰 행운이었다

연무대 라는 편액이 적힌 1층 월대 위에 세운 단층 누각인 팔작지붕의  동장대

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며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지형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 보기

좋은 군사 요충지로 이곳에서 무예를 수련하였기에 연무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화성행궁 정문 앞에서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앞쪽으로 보이는 화성행궁은 정조의 임시거처로 쓰인 곳이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봉수당, 정조가 활을 쏘던 득중정,

궁녀와 군인들의 숙소 등 482칸이 복원됐다.

행궁 왼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장안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유장한 흐름이 펼쳐지고,그 뒤로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의 후덕한 품이 눈에 들어온다.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갔던 날은 행궁에서 백동수라는 드라마 촬영이 한창하고 있었다 드라마 주연배우인 전광열.지동수와 박준규등을 보았고 그와 더러 낯익은 배우들도 있었는데 한참 보노라니 배우도 여간 중노동자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꽤 더운 날씨였는데  무사 옷차림과 궁중 옷차림을 하고 몇번이고 같은 신을 찍는데

겉보기에 화려하기만 한 배우생활이 아니네ㅎㅎㅎ

 

*사진을 꽤 찍었는데 카메라가  잘못되어서 정작 몇장 밖에 건질수 없어서 정말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