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경주 기행(2011.10 29)

bonitahuh 2022. 11. 6. 11:39

단풍이 한창인 10월 말에 한민족 축전의 일원으로 경주를 다녀왔고 나중에 김성철 집사님 내외분과. 함께

꽃피는 봄날에 또 한번가 보았다. 

경주는 아무리 많이 다녀도 신라 천년 고도의 멋스럼과 정취가 있어 질리지 않고 볼거리가 많은것 같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서기 751년)에 김대성(金大城)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石窟庵)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그러나 김대성은 서기 774년까지 24년 동안 이 대사업을 이끌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그 후 나라에 의해 완공을 보았는데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임진왜란때에 목조 건물 전체가 타버리고, 점차로 재건되고 여러번 수축되어, 신라 시대의 찬란하던 옛 모습을 많이 잃어 버렸다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의미를 지닌다.

아래의 17단의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아래의 백운교(白雲橋)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국사 대 웅전

 대 웅전 뜰에 마주 보고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

불국사 대웅전 앞뜰의 동쪽에 다보탑(국보 30호) 서쪽에 삼층 석탑인 석가탑(국보 21호) 이 세워져 있다

이 두 탑이 함께 세워진 이유는 현세불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불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란다.

 

석가탑은 높이 8.2미터,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되어 당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석가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덕왕 10년)경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무렵에 세워졌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742년에 완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이 탑은 고려 초에 일어난 지진으로 1024년과 1038년에 중수되었다..

탑의 상륜부는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상륜부가 가장 잘 보전된 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상륜부를 참고해서 최근에 복원하였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제126호)은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석가탑에서 나왔다.

다보탑은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을 설치하고 사방에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8각형의 탑신 주위로는 사면에 난간을 설치했다.

다보탑이 건립된 시기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경 불국사가 중수될 때 석가탑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목조건축의 화려한 구조를 산만하지 않게 석재로 표현한 뛰어난 석탑으로 4각, 8각, 원을 적절하게 구성하였고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켜 8세기 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탑 속에 안치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모두 사라져 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없다. 또한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좋았을 것으로 보이는 3마리의 돌사자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으나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대웅전 뒷담 곁에서

  따사한  가을 햇살이  머무는 사찰의 한적한 모습

불국사 경내로 들어가는 국보 제 23호 청운교와 백운교 

아래쪽 17단이 청운교로 청년을, 위쪽 16단이 백운교로 노년을 각각 비유한다는데...

내가 찍은 사진이지만 제법 멋지게 잘  찍었네 ㅎㅎㅎㅎ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왔을때 토함산 석굴암에 오르려면 해뜨는 것을 본다고 새벽에 일찍 이곳까지 헉헉거리며

걸어 올라왔던 기억이 새롭다.그 때는 젊었으니까 그렇지 지금은 걸어서는 도저히 못오르겠는데 아예 석굴암 입구까지

차가 올라오니 세상 참 많이도 좋아졌지..

본존불 이 모셔진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입구 계단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 때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서기 774년인 신라 혜공왕 때 완공하였으며 건립 당시의 명칭은 석불사로 칭하였다

학창 시절 왔을때는 본존불이 그대로 았었는데 이번에는 보존을 위하여 유리벽 안에 모셔져 있고 굴 안 온도도 일정을 유지한다  석굴암 본존불(本尊佛)의 명호는 학자들이 적용하는 교리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고 있는데,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등으로 불리고 있다.
어느 불교학자는 이름짓기에 집착하는 분별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석굴 안 벽에는 본존불을 둘러싸고  인왕상, 사천왕상, 천부상, 제자상, 11면관음보살상, 12연기상 등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완벽한 佛世界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나 신라 최대의 절 황룡사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 정문 앞에서
 정문인 밀레니엄게이트는 석굴암 전실에 있는 아치를 모티브로 만든 것으로 가장 큰 게이트의 높이가 10m,

작은 게이트의 높이가 7m이고 실제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양 옆에 인왕상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환상적인 신라로의 여행이 기다린다니  기대 만발?

경주 밀레니엄 파크는 2007년 3월 30일에 문을 열고. 총사업비 1천억 원을 들여 약 18만 1800㎢의 부지 위에 조성하였다.

유적중심의 관광이나 놀이기구 위주의 기존 테마 파크와 달리 신라의 역사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체험 위주의 에듀테인먼트 놀이동산이다

입구를 들어서자 말자 쭉 늘어서 십이지상들........ 늘름한 모습들.... 멋지다!
문화 해설사의 재미있는 신라이야기.
서수형 토기,에밀레 타워,석빙고 등의 볼거리들과 직접 전통공예를 체험할 수 있는 공예체험과
화랑연무대의 시연과 장보고 해상전의 공연등을 직접 볼수 있어 즐겁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의 장승과 인형들이 있는 토우 공방 앞에서

 신라시대의 고건축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귀족 마을들을 재현해 놓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의  주 세트장이었던 미실의 궁

  화랑 김유신의 연무장이었던 세트 촬영장

1시간 남짓  화랑들이 말타고 칼싸움과 활쏘는 무예들을  시범으로 보여주어 일행들과 함께 즐겁게 감상했다

 솔 향기가 솔솔 나는 송림길을 산책하면서 옛 신라의 정취에 잠겨본다

  두번째로 찾은 경주에서 김성철 집사님 내외분과 함께 보문단지를 돌아보았다

   보문단지내의 보문 호수에서

  첨성대로 들어가는 입구의 안내판과 매표소

 국보 제31호 첨성대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며 밑에서부터 4.16m 되는 곳의 남쪽 허리에 한 변이 1m인

정사각형 문이 달려 있다. 모양은 원통형으로 남쪽 문에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있다.
30cm 높이의 돌 361개 반을 사용하여 상층부와 기단을 제외한 27단을 쌓아 올렸다.(전체 돌의 개수는 401개)

첨성대 쪽에서 바라다 본 능들...

경주에는 대릉원 외에도 곳곳에 이런 아름다운 곡선의 능들이 많이 있다

안압지의 입구에 있는 안내판의 글을 옮겨 본다

이곳은 통일 신라시대에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임해전을 비롯한 많은 부속건물과 정원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14년(675년}에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며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

임해전을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을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도 이용 되었던 걸로 짐작된다

못 이름은 월래 월지 였는데 조선시대에 페허가 된 이 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신라때 축조된 안압지의 모습을 거의 확인하게 되었고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으로 궁궐의 축조년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임해전은 별궁 터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컷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안압지의 복원된 3개의 누각중 한곳이다 누각 안에는 앞으로 복원될 예정인 모형도가 전시되어 있다

안압지는 임해전이라는 전각을 중심으로 지어진 궁의 연못으로 추정되며, 임해전은 통일신라의 동궁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치는 않다.두번째 복원된 건물 안에는 압압지 준설때 나온 유물들이 종류별로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박물관에 가면 진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여기는 비록 모형이지만 설명이 더 충실하고

종류별로 전시하여 살펴보기가 좋았다.

당시 궁궐에서 나인들이 부주의로 연못에 떨어뜨린 것도 있을 것이고난리중에 황망히 피신하느라

연못속으로 내려가 천년을 숨어 살아온 유물들 아닌가?

옛 별궁 터가 있던 자리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못은 동서 길이 약 190m, 남북 길이가 약 190m의 장방형 평면이며,

 면적은 1만 5,658평방미터(4,738평), 세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는 1,285m이다.

안압지는 한민족 축전때 달빛여행이라 하여 밤에 너무도 아름다운 야경에 감탄했는데

그때 깜빡 사진을 못 찍어서 이제 봄날에 다시 와서 이나마도 사진을 찍었다

 대릉원 정문 입구

이팝꽃이 환하게 핀 꽃 나무 아래서 송순자 권사님,김성철 집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

천마총을 들어가기전 해설사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중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벅정희 대통령이 경주를 문화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경주 유적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대릉원과 천마총역시도 그때에 발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단다.

위대한 지도자의 능력이 얼마나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지.

우리 모두 감탄하며 이 시대에 그러한 지도자 상이 정말 그립고 그립도다!

누군가 누워 있었을 관 속 모습

 무덤에 봉분을 쌓을때의 층들을 보여 준다

  아름다운 능들의 곡선들이 너무나도 우아하다

   깨끗하고 깔끔한 배롱나무 줄기

고분의 아름다운 능선 가운데 화사하게 핀 철쭉 나무 옆에서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