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집사님 내외의 안내로 통영에서 하루를 보내고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관람하였다
거제포로 수용소는 1951년 11월27일 유엔군에 의해 거제시 신현읍 연초면 일대에 설치 되었고
정식업무는 1951년 2월부터 실시 되었습니다 전체수용소는 4개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개구역에 약 6,000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1951년 6월까지 북한군포로 15만명, 중국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으며
그중에는 여자포로도 300명정도가 있었다
6.25 참전 6개국 국기가 펄럭인다 중간 남자는 내 남편 보라색 잠버 입은 분은 송순자 권사님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으로 27,389명이 탈출하였고,
친공 포로의 소환과 등 존재의 이유가 없어져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6.25 참전 16개국 국기와 유엔기가 나부끼는 분수 광장
포로 사상 대립관(친공 반공 포로들의 사상과 갈등에대하여 영상을 통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고 볼 수 있다
흥남 철수 작전 기념탑 앞에 역사적 배경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말이 새겨진 돌이 보인다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은 국내최초이자 단일 디오라마관으로는 세계최대를 자랑하고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 생활상, 폭동현장등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포로수용소 안에서는 유혈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유엔군측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본국으로 돌아갈것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유엔군측이 일부 포로에게 본국으로 귀한을 포기할것을 권유했다는 이유로 공산군측 포로들이
격렬한 유혈폭동을 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을 비롯하여 포로들이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와중에서 거제포로수용소 소장이던 도드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고
얼마후 도드준장은 미국의 잔학행위를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한후에 석방되었다
그후 도드 준장은 포로수용소 소장직에서 해임되고 조사위원회에 회부되어 조사를 받은후 대령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1952년 5월 7일
발생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포로들이 일으킨 일련의 소요사건으로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드디어 끝났다.
M,P다리의 모습이다 헌병초소가 있었던 이 다리는 포로 수용소 출입의 주요 관문이었다
6.25 참전 용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탑
그 밖에도 포로수용관 취사장.야외 막사.포로 생활관 여자 포로관.야외 무기 전시장등 여러가지로 잘 전시되어 있어
꼭 후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역사 체험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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