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원인과 경과 결과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1.병자호란의 원인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약체인 군사력,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기, 즉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후금)이 강해지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조선은 일찍부터 명나라에 조공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명나라는 이전에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구원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읽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그것이 불만인 조선내 신하들은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해군을 내쫓은 후 새로이 '인조'를 임금자리에 앉힙니다. 이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부는 광해군과는 정반대되는 정책, 즉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금의 태종(홍타이치)은 조선을 침략합니다.
2.병자호란의 경과
1차적으로 쳐들어온 후금군은 대략 4만에서 5만명이었습니다. 이것만해도 당시 조선은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를 의식한 후금은 조선과의 형제(兄弟)관계만 맺고 돌아갑니다. 물론 형은 후금이죠. 그리고 몇년 후 세력이 엄청나게 커진 후금은 이미 약골로 전락한 명나라군을 짓밟은 후에,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합니다. 즉 후금이 왕이고 조선이 신하를 하라는 거였지요. 조선왕조는 이를 거부하고,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문을 전국에 배포합니다.
이것에 분노한 홍타이치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에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이에 청군은 본국에서 증원한 4만명의 군대를 더해 20만대군으로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그리고 강화도로 도망쳤던 왕비와 세자등을 몽땅 잡아와서는 남한산성앞에서 조선왕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 남한산성안에는 만 3천명의 군사와 한달분의 식량밖에 없었습니다. 모든면에서 절망적인 인조는 항복할 뜻을 표시합니다.
3.병자호란의 결과
1637년 병자호란 때 50만명의 부녀자가 청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람피운 여자를 뜻하는 '화냥년' 이라는 욕은 이 때 끌려간 부녀자들이 고생 끝에 고국으로 돌아오면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손가락질하는 냉대와 멸시를 견디다 못해 목을 매 자살하는 일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결국 모진 고생끝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조선 여인들은 목을 매거나 매춘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원나라에 항복한 뒤 거의 복속되어 버렸던 고려와는 달리 사실상 청나라로부터 자유로웠던 조선은 호란 이후에도 청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더 키워 갔습니다.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조심스럽게 북벌을 추진하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병자호란의 원인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썼습니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때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때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의 맹약을 하자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몇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옵니다.
병자호란의 전개
청이 침입하자 조정은 극도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침입 1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다다르자 도성내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합니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 자신도 그날밤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했으나 벌써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길을 봉쇄하였다는 보고를 듣자 이를 포기하였습니다.
인조는 대책을 논의한끝에 세자와 백관들을 대리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날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떠나려했지만 폭설이 내려 포기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약 50일 정도 버틸수있는 식량이 있었습니다.
한편 청태종과 청군은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에 포진하였습니다.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완전 전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때 대신들은 끝까지 버티자는 주전파와 청군과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주화파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합니다.
항복을 결심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온뒤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뒤 세번절을 합니다(삼전도의 치욕)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등을 인질로 잡아갔으며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도 끌고 갔습니다. 끌고간 이유는 돈을 받고 여자들을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거나 쫓겨나는등 문제가 심각 하였습니다.
또 임진왜란때 입은 피해를 복구도 다 하기전에 난이 발생한터라 국가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더더욱 피폐헤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습니다.
이 호란후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때 까지 계속됩니다.
병자호란은 막지 못하고 패한 전쟁 입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으며 왕자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청나라에게 복속을 당했으니 막지 못한 전쟁이죠.
막을수 없었던 이유는 이괄의난등으로 인해 북방방어가 허술해져 있었고 인조와 서인들이 지나친 대명사대주의에 빠져있었던 까닭입니다.
또 병자호란 후에 북학론과 북벌론으로 갈라졌는데, 북학론은 청에서부터 발달된 문물을 받아드리자는 의견이고 북벌론은 청나라를 치자는 의견인데, 효종은 북벌론으로 따라갔다만, 청나라의 군사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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