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Việt Nam) 또는 대 미 항전(對美抗戰, 베트남어: Kháng chiến chống Mỹ 캉 찌엔 쫑 미)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영어: Vietnam war)으로 부른다.
프랑스와 베트남이 치른 전쟁이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에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영어: second Indochina war)이라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월남전(越南戰)으로 부른다
<요약>
언제: 1960년-1975년 , / 한국파병(1964-1973)
누가: 남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 북 베트남 vs 남베트남, 미국
결과: 북 베트남의 승리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됨.
<배경>
베트남은 188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독립 운동을 끊임없이 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엔 잠시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이후, 베트남 독립 연맹은 1달 후인 9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에, 일본이 물러가고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하였으나(우리나라 포함..)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베트남의 하이퐁 항구에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1954)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결국, 호찌민(사회 주의자)이 이끄는 베트남 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프랑스는 물러갔다
<결정적 이유>
그러나..미국은 베트남이 사회 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북 베트남엔 호찌민 체제, 남 베트남엔 미국이 들어섰다.
이 때 남 베트남의 대통령은 응오딘지엠으로 독재 정치를 펼쳤고,
그러므로 남 베트남에 살지만 북 베트남의 호찌민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베트콩)을 만들어 호찌민의 지원 아래 남 베트남 정부와 싸웠다.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으로 널리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남어: Mặt Trận Dân Tộc Giải Phóng Miền Nam)의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때 미국은(케네디 대통령 정권) '통킹 만 사건'을 꾸며 명분을 내세우며 남 베트남 정권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통킹만 사건: 미국이 북 베트남과 전쟁을 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통킹 만(베트남, 중국 사이에 있는 바다)에서 미국의 배가
북 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하며 미국은, 북 베트남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였다. 베트남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이다
<경과>
쉽게 물러나지 않은 북 베트남과 베트콩으로 전쟁은 점점 어려워지고. 당황한 미국의 요청으로
우리나라를 포함,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트, 태국 등이 원군을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베트남과 베트콩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1968년엔 남 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까지 함락시켰다.
베트남 전쟁 동안 많은 미군들을 잃은 미국 내에선 이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많아졌고, 결국 평화 회담을 열어
휴전 협정을 맺는다.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전쟁의 끝..>
1973년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상이 성사되어 미군이 철수하였고,
베트남 전쟁은 사이공 함락이 있었던 1975년 4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을 함락하였다.
324호 탱크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깃발을 들고 사이공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간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이틀 전 쩐반흐엉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이양받은 즈엉반민은 항복하였고 전쟁은 공식 종료되었다.
베트남 전쟁 종료 이듬해인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의의>
이 전쟁은, 세계 최강의 경제력, 군사력을 소유한 미국이 패배한 최초의 전쟁이라는 점과,
적은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는 민족 독립 운동의 강인함을 시사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
1964년 9월 - 1973년 3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미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군이 참전하였다.
이 기간동안 파병된 인원은 32만명에 달했다.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
이 참전으로 한국 전쟁 때 미국의 많은 도움을 받은 우리 입장에서는, 미국 열세의 베트남 전쟁에 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의 요청과 남 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시 참전한 우방국에 보답한다.”는 명분과
“베트남 전선은 한국 전선과 직결되어 있다.”는 국가 안보의 차원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조약상의 의무가 아니라 '신의'라는 명분과 차후 한반도의 안보를 지킨다는 명분이었다
따라서 전투 수당을 목적으로 협의된 것이 아니기에 베트남 파병 군사들을 '용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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