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2012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리랑의 유래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2012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아리랑의 유래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리랑의 유래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리랑의 유래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세번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정선 아리랑 학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閼英井)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과 알영천(閼英川)에서 유래된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비(妃) '알영'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알영’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추모하면서 아낙네들이 부른 노래 ‘아랑가’가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라고 부른 아이랑(我離娘)에서 유추하고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願納錢)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싶지 않다"는 '但願我耳聾 不聞願我耳聾'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魚河 我多苦'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는 뜻인 '魚河 我難離'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가 후에 '아라리'로 되었다고 한다.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조문(上樑文)에 '아랑위(兒郞偉)'란 글을 검게 쓰는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이상운(李尙云)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
)을 찾아옴'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 리령(嶺)'이라고 밝히고 아리·어리·오리·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의한 유추설로 낙랑(樂浪)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慈悲嶺)의 이름을 '아라'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童男), 동녀(童女)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아리랑의 뜻과 의미(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신 신용하교수)
아리랑’의 ‘아리’의 첫째 뜻은 ‘고운’의 뜻이고, ‘랑’의 뜻은 ‘님’이다.
‘아리’가 고대 한국에서 ‘고운’ ‘곱다’ ‘아름다운’ ‘아름답다'의 뜻으로 쓰인 흔적은 현대 한국어에서
‘아리따운’(아리+다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몽골어에서 ‘아리’는 아직도 ‘고운’ ‘곱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 아리랑’의 첫째 뜻은 ‘고운님’이다.
‘아리’의 둘째 뜻은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 을 담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마음이) ‘아리다’의 동사는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렸을 때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의 표현이다.
이것이 형용사가 되면 ‘아리’는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운’의 뜻이 된다. 이때의 ‘아리랑’은 ‘(사무치게) 그리운 님’의 뜻이다.
‘쓰리랑’은 ‘아리랑’의 둘째의 뜻과 동의어 또는 유사어이다. 마음이 ‘쓰리다’는 마음이 ‘아리다’와 유사어이다. 즉 ‘쓰리랑’은 마음이 아리고 ‘쓰리도록 그리운 님’인 것이다. ‘랑’은 한자로서 삼국시대에는 ‘낭(郞)’자를 써서 젊은 남녀를 모두 표현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남자는 주로 ‘郞’자, 여자는 ‘娘’자로 표시하였다. 발음은 모두 ‘랑’이며, 뜻은 ‘님’이다. 신라 향가(鄕歌)의 죽지랑(竹旨郞), 기파랑(耆婆郞) 등이 좋은 예이다.
‘아라리’는 근 현대에 뜻을 몰라 잃어버린 말인데, 필자는 이를 ‘상사병’의 고대 한국어라고 판단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상사병을 나타내는 ‘가슴아리’(가슴앓이)에서 그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쓰리다’를 강조할 때 ‘쓰라리다’라고 강조사 ‘라’를 넣는 것처럼 ‘가슴아리’는 ‘가슴아라리’ ‘아라리’와 같다.
‘삼국유사’ 등에는 상사병에 걸린 사랑 이야기가 몇 개 나오는데, 상사병에 해당하는 순수고대 한국어를 한자가 수입된 뒤 언젠가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민요 ‘아리랑’에 들어있는 ‘아라리’가 바로 ‘상사병’의 순수 한국어인 것이다.
‘아리랑’ ‘아라리’ 등의 용례로 보아서 필자는 ‘아리랑’은 먼 옛날 삼국시대에 애창된 노래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에 ‘아리랑’ ‘아라리’의 뜻은 모르게 되었지만, ‘앞소리’ 또는 ‘후렴’으로 지금도 애창되는 것이라고 본다.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수백 년을 내려온 것은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어는 이미 분화되어서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을 복합한 1개 단어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고운님’과 ‘(사무치게) 그리운 님’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복합된다. 그러니 ‘아리랑’을 대체할 현대 한국어는 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아리랑’과 ‘아라리’는 뜻과 소리에서 실로 절묘한 운율 대응을 이루어서, 기막히게 멋진 표현인 것이다. 현대 한국어로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의 이 멋있는 절묘한 표현을 도저히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현대 한국어로 리듬을 접어두고 번역하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곱고 그리운님/곱고 그리운님/(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의 뜻이다. 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곱고 고운님/그립고 그리운님/(사무치게 그리워) 상사병이 났네” 의 뜻이다.
노랫말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는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간다”의 표현을 운율에 맞추어 ‘아리랑’ 다음의 토씨를 생략한 것이다.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뜻이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를 차단하는 것은 ‘고개’였다.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공간으로의 ‘이별’을 의미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은 “곱고 그리운 님과의 가슴아픈 이별
”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랑’의 뜻을 모르게 된 이후에는 ‘아리랑’이 고개이름인 줄 알고 ‘아리랑고개’로 생각하여 다수의 가사들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많은 설을 뒤로한채 신용하교수의 어여쁜 우리 말 해석이 가장 마음에 들고 어쩐지 고운님으로 사무치게 그리운 님으로 풀이하고 싶은건 내 고집일까?
*아리랑의 종류
아리랑의 변이형에는
신(新)아리랑, 별조(別調)아리랑, 긴아리랑, 아리랑세상, 등이 있으며,
이들 변이형과 구별하기 위해 본래의 아리랑을 본조(本調)아리랑이라고 한다.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로 되어 있다
.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지방의 (경기아리랑=서울아리랑):신민요 아리랑 또는 신 아리랑으로 분류됨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
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정선아리랑:'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
전라도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전통아리랑>이라 한다
* 민요가 뭔지 조차도 모르던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 키는 대로 일정한 음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그들의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속에 품은 정한을 술술 풀어나갔다. 아니 자기도 모르게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색정을 유발하는 선정 가요 로 불려지기도 했다.
아리랑 가사 속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 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히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리랑을 부를 수가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든지 거리낌없이 표출해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삶의 가치를 구하고자 했다.
아리랑은 오늘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쉬며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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