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고성.진주관광 (진주성. .진양호..)

bonitahuh 2022. 11. 9. 10:01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리라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내가 태어난 고향 경남 고성군 영화면 연화리를

실로 50년 넘어서야  찾아 갔다

내가 일곱살까지 살았던 고향이고 중학때쯤인가 고향에 사시던 이모님 댁에 가보고 고등학교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 선산에 장례를 할때에 잠시 기보곤 처음이니 실로 오랜만이라 마음이 찡 해온다

 냇가가 제법 크고 물이 많아 여기서 멱도 감고 고기도 잡고 냇가 돌을 주워서 가루로 만들고 소꼽장난하던

기억이 어렴픗이 난다

멀리 고속도로가 보이는데 고속도로 정류장이 없으니 그냥 지나갈 뿐이라서 마을 발전에 크게 도움은 안되는 모양

냇가를 끼고 오른쪽으로ㅡ마지막에 보이는 집이 아마 이모님 댁이었던 같다

내게는 참 많은 추억이 어린 교회이다..그전에는 교회 정문이 길 쪽이었는데 새로 지으면서 문을 옆쪽으로 내었다 한다

 이 교회에서 결혼식때 어린 내가 화동했던 일도 생각나고 성탄절에 즐겁던 기억도 조금 난다

외가쪽으로 큰 할아버지께서 맨처음 호주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 들이시고 이 교회를 세웠는데

금년 10월에 교회 설립 100주년이다

우리 외가쪽으로 이모,삼촌들.어머니까지 이 교회에서 세례받고 결혼식을 했으니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교회이다

교회를 참 아름답게 잘 지었는데 고향을 떠난지 거의 70여년이 다 되신 우리 외당숙께서 교회 건축을 거의 다 감당하셨다는데 지금 당숙은 말도 못 하시고 거동도 전혀 못하시는 중환자로 병원에 계시는데 아직도 교회 빚이 있다 하니 안타깝다

일부러 예배를 드리려고 주일에 갔었는데 성도래야 거의 노인들만 30여명이 채 안되어 마음이 너무 아프다

현재 시골교회의 실상을 보는것 같아 너무 가슴이 아픈데 이렇게 아름답게 교회를 지어놓고 정작 성도들이 없다니......

교회 종탑 뒤로 보이는 사택인데 내가 이 사택에서 태어 났단다

와갓집이 제일 먼저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어머니가 결혼하시자 막내이셔서

교회사택에서 사셨으므로 내가 이곳서 태어났다 하니 물론 지금은 옛 모습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 옛 날 생각이 난다

이제 진주로 간다

진양호 공원

1970년 7월에 완성된 낙동감 유역의 최초의 다목적 댐인 남강댐의 건설로 형성된 인공 호수이며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진양호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서부경남의 대표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진양호공원, 휴게전망대,

봄 벚꽃터널, 경남유일의 동물원, 물문화관, 어린이 교통공원, 진양호 일주도로 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진양호 중턱에 자리한 "해뜨는 집" 레스트랑

고향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바로 진주로 와서 터미널에서  진양호로 가니 2시가  가까와 몹씨 배가 고파

먼저 식당 부터 찾았다

진양호수 정상부근에 아담한 레스트랑을 발견하고 들어가니 바라보는 경치도 인테리어도 음식도 좋고

가격까지 착한데다  주인 아주머니의 교양있는 친절함도 너무 마음에 들어

주문한 스테이크와 후식으로 팥빙수까지 먹으며 잠시 피곤을 풀었다

적극 추천하고 싶은 레스트랑이다 이제 천천히 진양호를 구경하고 진주성으로 가야지

공원내 정자인 우약정은 제일교포인 하경환씨가 1974년에 건립하여 1974년에 진주시에 기증하였다

공원 숲속에 이런 테크노 길이 있어 걷기에 참 편하다

 망향비인데 진주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의 사람들이 그들의 고향을 그리며 세웠는데 

진양호 물이 다 마르기 전에는 고향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충혼탑은  1968년 현충일에  진수성지 안에 세웠는데  그러다 십년 뒤 진주시 상평동으로 옮겼다가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면서  2002 6 6일 이 자리에 모신 것이었다. 

진주 시민들이 여가를 즐길 때면 찾곤 하는 호반에 충혼탑이 자리를 잡은 건 9년째.

                                                            진주성의 정문인 촉석 문

진주는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와 보곤 오늘 남편과 함께 왔으니 실로 50여년이 넘은 세월이다

진주성은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석성으로,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은 1.7km에 이른며 높이는 5~8미터 이다

축조된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남쪽엔 남강이 서쪽은 청천이 북쪽은 못이 있고 사방으로는 절벽을 이루어 성곽으로서 좋은 조건을 가졌다.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

                                                                     촉석루로 들어가는 문

벼랑 위에 높이 솟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촉석루는 남강변 벼랑 위에 우아하고 위엄 있게 서있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고려 고종 28년(1241)에 창건하여 8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남강과 의암, 진주성과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며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한다.

전쟁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상시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考試場)으로 활용되었다.

미국 CNN에서 한국 방문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되기도 였다

진주 남강위에 떠있는  의암 바위로 당초 위험하다 하여 위암으로 불리다가 논개가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 순국한 뒤

의암이라 불려지기 시작했으며 인조 7년(1629년)에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고 새겼다

촉석루에서 내려가니 남강 푸른 물에 띄엄 띄엄 큰 바위들이 아찔하다

제법 무서운데 의암 바위위에 남편과 나란히 서서 마침 옆에 있는 젊은 이에게 부탁하여 찍은 사진이 어디 갔지? 아까워 ㅠ

의기사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다산 정약용의 중수기, 매천 황현 및 진주 기생 산홍의 시판이 걸려있다.

                                                                 변영로 시인의 논개 시비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여고시절 나의 애송시 중에 하나였는데 논개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더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경남 유형문화재 3호 쌍충각과 쌍충사적비

임진왜란 의병장 제말의 기념비로 의기사 옆에 자리하고 있다. 1792년 정조 16년에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기리기 위해 쌍충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멀리 촉석루와 남강을 배경으로 성곽에 기대어서

                                                          진주성 전쟁을 승리를 이끈 총통들  

 

  서장대로  진주성 서문의 지휘장대로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중건하였다.

                                                                  진주성 내에 있는 호국사 전경

전통 사찰 제70호로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

고려 말에 왜구를 막기 위한 승병을 기르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僧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때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 

현재의 호국사는 진주성을 정비하면서, 일주문(一柱門)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건립한 것이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창렬사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 39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

                                                                                             북장대

진주성 내성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시에 성내와  외성의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진주성 임진대첩 제사 순의단

1592년(壬辰年),진주성 제1차 전투시 진주목사 김시민를 비롯한 아군 3,800여명이 왜군 2만여명을 맞아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친 임진년 진주성 대첩을 기리고 이듬해인 1593년(癸巳年) 진주성 제2차 전투시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 등 세분의 주장(主將)을 비롯한 민, 관, 군 7만여명이 진주성을 공격해 온 왜군 12만1천6백여명을 맞아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의(殉義)하자 그분들의 충혼을 위령(慰靈)하기 위하여 198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건립한 단이다.

진주성은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과 잘 가꾸어진 잔디와 나무들 곳곳에 유적과 사적들이 있고

박물관도 있어  하루 천천히  걸으며 즐기기에 참 적당하다

                                                  김시민 장군의 동상 앞에서 잠시 휴식

                                                                               영남 포정사 문루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병사 남이흥이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전신이다.

고종 32년(1895)에는 진주관찰부, 건양원년(1896)에는 경상남도 관찰사청사의 관문으로 영남 포정사라 하였으며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망미루의 현판은 수원유수 지중추부사를 지낸 서영보의 글씨이다.

                                                                        진주성 안에 있는 비석군

조선조 선조 37년(1640년)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

효종 10년(1656년)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 협회 진주 지부에서 모아

이곳으로 옮겼다 (묘비에서...)

진주성내에 자리한 국립 진주 박물관은 1984년에 개관하여 여러번  증 보수 공사를 거친후 2008년 2월 10일에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으로 재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진주성 뜰을 걷노라면 보도가로  잔디위에 임진왜한때의 공신들의 기념돌판이 띄엄 띄엄 있다

기념 돌판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보며 지금도 우리나라에 이런 충신들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마음이 착찹해 온다